피움 ㅣ 코너별 보기

발전대안 피다에서 격월로 발행하는 웹진 '피움' 기사를 코너별로 보실 수 있습니다. 

피움 ㅣ 코너별 보기

현장[23호] 8. 멈춘 시간 속에서 알게 된 것들 - 한 국제개발협력 활동가의 기록 : 두번째 이야기-

2020-05-28
조회수 821

멈춘 시간 속에서 알게 된 것들

- 한 국제개발협력 시민사회 활동가의 기록 : 두번째 이야기-



Cornerstone(이하 코너스톤)은 주춧돌이라는 의미로, 필리핀 농산촌 지역 ‘마운틴 프로빈스(Mountain Province)’와 ‘마닐라(Manila)’에서 소셜 비즈니스를 통해 지역 소농들의 경제적 문제를 해소하고 프로젝트와 활동가의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소셜벤처’이다. 그리고 나는 코너스톤을 설립해 그 일을 하고 있는 차홍선이다. 

2016년 나와 나의 파트너는 큰 꿈을 품고 필리핀 한 지역의 작은 땅을 빌려 바나나를 심었다. 하지만 애지중지 키운 바나나는 태풍에 쓸려가 버렸고, 간신히 복구해 수확한 바나나를 판매하는 과정에서는 불공정하고 불안정한 가격결정의 문제를 겪었다. 지역 사회 소작농들이 농작물을 유통할 때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거래의 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소농들도 안심하고 정당한 가격에 그들이 정성껏 기른 농산품을 거래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농산품을 공정하게 고시된 가격에 안정적으로 거래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지역 소농에게는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우리는 정당히 거래한 원재료로 일반 도시 소비자들의 건강관리에 필요한 제품을 개발해 판매한다면, 불합리한 거래 관습의 문제도 해결하면서 소농들에게 지속가능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의 프로젝트는 2018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검증하는 과정을 거쳤고, 2019년에는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음료제품을 개발할 수 있었다. 2020년을 맞이하면서는 마운틴 프로빈스의 파라셀리(Paracelis) 지역에 작은 생산시설을 구축하고 본격적인 영업과 마케팅을 진행해 비즈니스 프로젝트의 형태를 완성하려는 목표를 다졌다.

지난 2019년 12월, 마침내 팝업 스토어에서 제품 판매를 시연하고 두 군데 지점에 납품을 성공한 이후 나는 한국에 잠시 돌아왔다. 올해 1월 중순에는 다시 필리핀에 입국할 예정이었지만 국제개발협력 협동조합 빙고를 통해 WFK NGO 봉사단 파견 형태로 출국이 결정되면서 입국 일정을 3월로 변경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 곁에 조용히 다가왔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가 2월 말부터는 심각해지면서 나의 3월 파견 일정은 잠정 무기한 연기되었고 이후 모든 일정이 모두 속수무책으로 연기되고 또 연기되었다. 어느덧 5월 말, 내가 한국에 이렇게 오랜 시간 머무는 일이 5년 만에 처음인 듯하다.

▲    시청 앞에서 지역의 바나나를 모두 모아 정리하고 있는 광경 (1) © Mayor Marcos G. Ayangwa MD SNS


1. 필리핀에서 온 소식

(1) 첫 번째 한 달: 3월 15일~4월 14일

2월 말, 한국 내 코로나19가 심각해지면서 몇몇 국가에서는 한국 사람들의 입국을 금지했다. 초반에 필리핀은 한국의 일부 지역 사람들에 한해 입국을 금지시켰지만 이후 전 세계에서 코로나19가 심각해지는 양상을 보이자 전체 봉쇄령을 내렸다. 

3월 12일, 필리핀에 있는 멘토님과 동료들이 3월 15일부터 한 달 동안 비행기와 배편이 모두 금지되고 봉쇄령(Lockdown)이 시행된다고 알려왔다. 마닐라에서는 사람들이 물건을 사재기하고 손 소독용 알코올과 마스크도 더 이상 마트에 남아있지 않아 혼돈에 빠졌다는 소식이 추가로 전해졌다. 봉쇄령을 공표한 날 지방 출장을 갔던 멘토님은 마닐라행 버스를 잡지 못해 곤란해 하셨고 마닐라에서 일하고 있던 한 친구는 고향으로 빠르게 돌아간다고 전해와 사태의 심각성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봉쇄령이 공표된 날부터 시행되기까지 남은 3일 동안 필리핀에 거주하는 한인 커뮤니티에서도 큰 소란이 일었다. 급히 이삿짐을 빼고 한국 행 비행기를 100만 원 이상의 고가에 구매해 부랴부랴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봉쇄령이 시작되자 페이스북에는 늘 복잡하고 많은 교통량에 고통받던 EDSA길과 마닐라베이 옆으로 난 길이 텅 비어 있는 사진들이 올라왔다. 

한국에 있는 나에게 한국의 상황도 심각했지만, 필리핀에 비하면 조금 덜 심각하다는 느낌도 있었다. 매년 봄 미세먼지로 고통을 겪는 한국이기에 어머니가 일찍이 대량 구매해 놓으신 마스크를 쓰고, 열심히 손 소독제를 사용하고, 자주 손을 씻으며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받은 지원 사업 업무를 하며 도대체 이 일이 언제쯤 끝이 날까? 그리고 나는 안정적인 환경에서도 코로나19를 두려워하고 있는데 우리 지역 사람들은 마스크를 구할 수는 있을까?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등 많은 걱정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2) 그 다음 보름: 4월 14일~4월 30일

1차 봉쇄령이 끝나는 4월 14일이 가까워오자 필리핀 정부는 4월 말일까지 봉쇄령을 연장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과거 필리핀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가 일이 없어졌다고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페이스북에는 사람들이 봉쇄기간동안 집에 머무르며 살이 쪄간다는 씁쓸한 유머를 담은 그림과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나는 그저 필리핀 뉴스와 한인뉴스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며 나의 주 활동터인 파라셀리와 그 주변 지역에 확진자가 발생한 것은 아닌지, 바이러스의 확산 추이가 어떠한지 초조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우리 지역에 확진자가 생기면 지역 정부와 시장이 어떻게 할까? 우리 동네에는 큰 병원이 없는데 그러면 어디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될까? 관리는 어떻게 할까? 등등의 많은 걱정이 뒤엉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마운틴 프로빈스에 진입할 수 있는 4~5개의 지역 경계선에서 매일 지역 정부와 군인들이 바리게이트를 치고 통행하는 사람들의 통행허가증을 검사하고 체온을 기록한다고 했다. 지역 주민들은 페이스북을 통해서 프런티어(Frontier)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간단한 음식들을 보냈다. 모든 지역주민들의 노력과 응원 덕분에 마운틴 프로빈스 내 파라셀리에는 확진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지역정부에서는 각 가정마다 소정의 지원금과 식료품을 나눠주기도 했다. 지역 밖으로 나가는 통행증을 받는 것은 어렵고 통행증이 있어도 다른 지역에 진입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지역 내에서의 이동제한은 점차 완화되었다. 

하지만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모든 것이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마을의 많은 부분들은 여전히 멈춰 있었다. 식료품을 파는 슈퍼는 문을 열었지만 트라이시클(삼륜차) 운전을 해서 하루 일급을 버는 친구들은 여전히 일을 할 수 없었다. 지역정부도 문을 닫았고 오직 코로나19에 관련된 사람들만 일을 하는 것 같았다. 대부분이 농부인 우리 동네 주민들은 밭이나 농장에서 일을 할 수는 있었지만, 소출용으로 경작하는 옥수수와 바나나는 유통 트럭이 지역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 역시 금지되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라나는 농작물은 시들어가고 주민들은 거래가 진행되지 않아 돈을 벌 수 없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정부는 지자체 수준에서 큰 트럭을 마련하여 바나나 농가에서 바나나를 모두 모아 다른 지역으로 전달하는 일을 시작했다. 정부의 큰 역할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    시청 앞에서 지역의 바나나를 모두 모아 정리하고 있는 광경(2) 

이 바나나들은 지역정부에서 마련한 트럭에 실어져 마운틴 프로빈스의 주도 Bontoc으로 옮겨졌다. © Mayor Marcos G. Ayangwa MD SNS


코너스톤이 미리 자리를 잡아 바나나와 과일거래를 진행하며 제품을 상시적으로 생산하고 있었다면 남아나는 바나나 처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아직은 완공되지 않은 생산시설만 가지고 있을 뿐 본격적인 사업기반을 마련하기 전인데 내가 한국에 묶여 있어 어떤 일도 할 수 없으니 불편하고 불안하기까지 했다. 


2. 아직은 가늠할 수 없는 일정

2월에는 필리핀에서의 장기체류 일정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코로나 때문에 출국이 미뤄졌지만 필리핀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면서 가자마자 바로 일을 진행할 수 있도록 제품생산 시설 완공, 함께 일할 사람들에 대한 고용이슈 정리, 교육자료 및 시설이용 매뉴얼을 준비했다. 또한, 2020년 4월 15일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3월 31일에는 선관위에 귀국투표신고서를 문의하고 서류를 팩스로 제출했다. 그쯤이면 필리핀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작년에 이미 국외부재자 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소중한 권리는 필리핀이 아닌 한국 땅에서 행사하게 되었다.

필리핀에서 이미 진행되었어야 했던 일들을 구구절절 언급하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지만 코로나로 인해 어떤 일정이 변경되었고 어떤 일들이 한국에서 진행되었는지 아래의 표로 정리해보았다.



원래의 일정
변경된 업무
2월
필리핀 입국준비 장기체류 준비

3월
(필리핀 입국)
지역 바나나협동조합과의 업무 조율
각종 매뉴얼과 고용계획안 준비
4월
제품 생산시설 공사
필리핀 현지 법인등록
법인등록 사전 논의
제품 수출입 준비
5월
제품 관련 행정처리
소셜 비즈니스 관련 교육 이수
브랜딩 및 마켓팅 기획안
6월
필리핀 내 본격 제품판매를 위한 영업
?


변경된 업무를 하면서 나는 매일 언제쯤 필리핀에 돌아갈 수 있을지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원래의 일정보다 1개월 반이 늦어졌지만 다행히 마운틴 프로빈스 지역의 봉쇄령은 완화되어서 5월 18일을 기점으로 생산시설 공사를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 


3. 멈춘 시간 속에서 알게 된 것들

원래의 일정과는 달리 필리핀에 돌아가지 못하는 시간 동안 나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발견했던 것 같다. 첫 번째는 가끔은 천천히 가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한창 초기 비즈니스 기반을 다져야 하는 상황에 필리핀에 갈 수가 없는 것은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제품과 관련된 행정처리도, 당장 제품을 들고 새로운 거래처를 개척하는 영업도 할 수 없었다. 우리의 목표가 그만큼 미뤄지고 있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시간들이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시간 동안 나는 어딘가에 있을 크고 작은 구멍들의 존재를 알기에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이면서도, 숨 고를 틈도 없고 제대로 돌아볼 시간도 없이 코뿔소처럼 돌진하기만 했던 것 같다. 이번을 계기로 한 발짝 떨어져 프로젝트를 바라보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로부터 평가를 받으면서 돌아볼 수 없었던 파헤쳐진 구멍을 차분히 덮고 다시 뿌리를 잘 다지며 초조했던 마음들을 비로소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 동안 마음만 급해서 말로만 벼르고 기다리고 있었던 일들을 차분히 앉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때마침 좋은 기회들이 찾아와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교육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단체와 프로젝트에 관련된 내용들을 더 깊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 정말 좋았다.

두 번째로 발견한 것은 코너스톤의 기반이 되는 지역, 마운틴 프로빈스의 힘이다. 코로나19로 지역 봉쇄가 이어지는 동안 자급자족이 가능한 동네 사람들은 마트에서 사재기를 할 필요 없이 신선하고 안전한 음식을 자체적으로 수급했다. 가깝게는 집 앞에, 조금만 떨어진 곳에도 있는 크고 작은 농장과 밭에 심은 야채들은 코로나19와 상관없이 계속 자랐고 늘 그랬듯이 주민들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자급자족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자본주의 현실 앞에 소출이 불가피하고 여러 지원과 새로운 아이디어가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잊고 있었고 왜곡 되어있었던 지역성(Locality)의 힘을 새삼스럽게 다시금 마음으로 인지하게 된 순간이었다. 

2020년에 갑자기 찾아온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변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본의 아니게 한국에서 코로나19 사태를 마주하고, 다시 출국하지 못한 채 이곳에서 소강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도 나는 메신저와 전화 그리고 SNS로 매일 필리핀에서 진행되는 코로나19 사태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곳의 경험밖에 없기 때문에 필리핀 현지에서는 코로나가 그들의 일상에 어떤 변곡점을 주고 있는지는 피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보고 듣는 것은 직접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아득하게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세계적으로 사이버 강의, 온라인 회의 플랫폼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나 역시 편리한 시스템을 쓰게 되었지만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순식간에 가게의 종업원들을 대체해버린 무인결제기계 앞에서 주문을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어려웠던 작년이 생각난다. 세상은 이렇게나 빠르게 변화하는데 만약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하지도 배우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고도로 발전되어가는 기술의 혜택이 소수만을 위한 것들이 된다면? 필리핀의 우리 동네에서는 길 하나도 깔기가 어려운데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은 이 기시감! 


늘 그랬듯이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답답한 질문이 늘어간다. 하지만 나는 나와 동료들이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준비하겠다. 이번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코너스톤과 나 그리고 나의 활동 지역인 필리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리해 본 글을 닫는다.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활동하는 모두를 응원하며!! 



기사 입력 일자 : 2020-05-28


작성 : 차홍선 Cornerstone(코너스톤) 대표, 발전대안 피다 회원 / h98840235@gmail.com

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