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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27호] 3. 경제 발전과 노동, 어떻게 볼 것인가?

2021-02-18
조회수 445


경제 발전과 노동, 어떻게 볼 것인가?



발전과 노동이라, 얼핏 보면 빤한 주제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이 주제를 쉽게 다룰 순 없다. 게다가 이 문제를 논하는 사람의 가치관이나 철학에 따라 정말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다. 일례로, 박정희식 ‘산업화’ 패러다임(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등 현재 ‘국민의힘’ 계보)으로 이 문제를 보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즉, 한국은 선진국의 문턱에 있으니 조금만 더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노동하면 나라가 더욱 발전하여 마침내 명실상부 선진국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부자 되세요!”가 현실이 된다. 이런 식이다. 이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롤 모델은 미국식 ‘시장 경쟁’ 모델이다. 반면, 김대중식 ‘민주화’ 패러다임(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등 현재 ‘민주당’ 계보)으로 이 문제를 보면, 경제개발이나 발전도 좋은데, 성장과 분배를 조화하고 노동의 몫도 좀 챙겨주면서 가야 하지 않느냐, 이런 논리다. 그래서 일부 노동자 권리나 노동조합, 노동운동도 형식적으로나마 보호해주고, 법정 노동시간도 단축하면서 노동자 임금(“구매력”)을 올려주자고 한다. 이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모델은 유럽, 그중에서도 중북부 유럽의 복지국가 모델이다.

그러나 박정희식이건 김대중 식이건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생산하는 부(富)의 원천(source)에 대해선 거의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전자는 주로 부의 크기(size)에만 신경을 쓰고, 후자는 주로 부의 분배(share)만 따지면서 투쟁을 불사한다. 

이런 면에서 만일 우리가 앞으로 ‘대안’ 내지 ‘제3의 길’을 모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자. 마치 자동차를 타고 가다 낯선 곳에서 길을 헤맬 때 ‘내비(navigation)’가 필요하듯, 개인의 삶이나 사회 발전 과정에서도 뭔가 불투명하고 혼란스러울 때는 ‘철학적 내비’가 필요하다.



이른바 ‘발전(개발)’에 대하여


역사적인 시각 또는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은 혁혁한 ‘발전’을 이뤄왔다. 억겁의 시간이 걸린 인간의 진화 자체가 발전이라면 발전이다. 굳이 그렇게 긴 시간까지 추적하지 않더라도 약 1만 년 전부터 시작된 신석기 시대(농경 시작) 때부터 따진다면 원시 부족 시대, 노예제 시대, 봉건제 시대를 거쳐 자본제 시대까지 온 것이 발전이며, 같은 자본제 안에서도 수공업 시대, 기계제 시대, 자동화 시대를 거쳐 디지털 시대까지 온 것도 발전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발전관은 주로 외관상의 변화나 기술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면, 아무 문명도 없던 “원시” 시대로부터 “문명화” 내지 “도시화”가 진행되는 방향으로, 또,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청동기를 지나 철기 시대로, 이런 식이다. 나아가 증기 에너지에서 전기 에너지, 원자력 에너지를 거쳐 태양광 에너지로의 (“지속가능한”) 발전도 있다.

그리하여 사태를 이렇게만 파악한다면 “인류는 자유와 진보를 향해 무한한 전진을 한다”라는 식으로 말하기 쉽다. 결국 이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모순과 삶의 고통을 교묘히 정당화한다. 특히, 화려한 도시화나 첨단 기술 발전 뒤에 물밑에서 진행되는 급격한 사회경제 양극화나 기후 위기, 지구 온난화, 자원 고갈,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등을 별로 대단치 않은 ‘부산물’쯤으로 치부한다. 즉, 이런 ‘필요악’들은 단지 특별한 정책이나 첨단 기술로 잘 ‘관리’하면 된다는 식이다. 나아가 눈을 과거로 돌려 보면, 영국, 스페인 등 유럽에 의한 세계의 식민지화, 미국에 의한 세계의 신 식민지화, 또 일제에 의한 아시아의 식민지화 같은 문제조차 결국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미화된다. “근대화”는 좋은 것이고 “글로벌 표준”이니까 “야만”이나 “후진국”이 되지 않으려면 모든 나라가 근대화를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 따라서 비록 “식민지 근대화”일지라도 근대화는 좋은 것이니 종주국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충고까지 나올 정도다.

한편, 이런 자국중심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시각, 나아가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에 대해 반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일례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쓴 E. F. 슈마허는 선진국이 후진국에 제공하는 ‘개발원조’조차 선진국의 필요가 아니라 후진국 민초의 입장에서 필요한 것을 지원하는 식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E. 월러스틴 같은 세계체제론자는 아예 세계 전체를 우리의 시야에 놓고 보아야 한다며, 선진국과 중진국, 후진국은 세계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파트너들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물론, 그 파트너들 사이엔 엄격한 위계질서가 있어 “국제 분업”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경제 ‘발전’이 전개되면서 파트너들 간에 구조적 불균형도 생기고 기형적 발전까지 나오게 된다. 나아가 각국 안에서는 노동운동이 발전하면서 ‘노동자의 힘’을 보여주게 되는데, 이는 결국 분배 투쟁을 통해 노동의 몫(이른바 “사회경제적 권익”)을 꾸준히 향상하게 시킨다. 물론, 그 분배 투쟁에서 자본이 노동에 “양보” 내지 “제공”할 물적 토대는 국내에서의 독점적 경쟁력, 그리고 해외에서의 독점적 지배력이다. 다시 말해, 일국 자본이 해외 (신)식민지로부터 더 많은 부를 획득할수록 국내 노동운동을 일종의 하위 파트너로 흡수할 수 있는 여력이 더 생겼다. 동시에 이를 노동운동의 입장에서 보면, 노동운동의 힘이 강해질수록 자본으로부터 더 많은 양보를 “쟁취”할 수 있기에, 노동운동은 그 양보 내지 쟁취물의 물적 토대가 무엇이건 상관없이 조직력과 투쟁력만 강화하면 성공한다. 이를 큰 차원에서 보면, 선진국 노동운동조차 자본의 (신)식민지 개척과 독점 이윤 획득 과정에 일종의 ‘공범’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즉, 자본 진영이나 노동 진영이나 모두, 부의 원천은 크게 문제 삼지 않은 상태에서 ‘분배 공정성’만 드높이면 (예, 노동권 강화와 복지국가 건설), 참된 선진국이나 모범적인 복지사회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대체로 이런 것을 사회경제적 ‘발전’의 큰 방향이라며 수용하고 있다.



이른바 ‘노동’에 대하여


동일한 맥락에서 노동의 이슈 역시 쉬운 듯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갈수록 만만찮다. 이 짧은 글에서 모두 말하긴 어렵지만, 일단 ‘인간은 노동 없이 살기 어렵다.’라는 사실 만큼은 누구나 인정한다. 오늘 하루도 밥을 먹지 못하면 우리가 어떻게 생활을 꾸리겠는가? 또 그 밥을 짓고 밥상을 차리는 ‘가사노동’은 물론, 밥의 원료인 쌀을 생산하는 ‘농민노동’ 역시 소중하다. 나아가 시장에서 쌀을 손쉽게 사먹기 위에서라도 대다수 사람은 돈을 벌어야 한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한 가장 보편적 방식이 노동이다. 기업이나 공장에 가서 하는 노동이건, 식당에 가서 하는 노동이건, 병원 간호사들이 하는 노동이건, 모두 노동이다. 그러니 노동 없이 인간 삶이 영위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존재론적 노동관이다.

하지만 이 시각은 노동의 소재적 측면 또는 사용가치(쓸모, 유용성, 구체성) 측면만 본 것이다. 노동은 또 다른 면을 지니는데, 이는 노동의 관계적 측면 또는 가치(만물의 수량화, 추상성, 교환가치) 측면이다. 이때 노동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관점, 특히 여기서는 500년 남짓한 자본주의 맥락에서 파악된다. 이는 달리 말해, 사람이 노동하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는가 하는 걸 따져보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봉건제와 자본제를 비교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봉건제 때는 영주와 농노나 지주와 소작농 간 인격적 종속 관계가 근간을 이루되, 장원(또는 농촌)에서 노동이 공동체적으로 이뤄졌고, 대체로 자연경제의 품속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자본제가 들어서면 인간 ‘노동력의 상품화’를 전제로 한 자본가와 노동자 간 계약적 종속 관계가 사회경제의 근간을 이룬다. 이제 마을이나 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과 개인 간 경쟁이 삶의 기본 원리가 된다. 개인들은 노동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스펙’을 쌓아야 하고, 개별 기업 차원에선 노동과 자본이 ‘상호 협력’하여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여야 ‘윈-윈(win-win)’이 가능하다. 이 맥락에서는 자연 생태계도, 다른 기업이나 다른 나라 민초도 모두 경쟁이나 정복의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경제 민주화’ 내지 ‘민주적 노사관계’ 차원에서는 ‘지나친’ 경쟁을 지양하고 ‘부당해고’나 산업재해를 예방하며, 노동자를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키고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줄이면서도 공정 보상을 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두드러진다.

그러나 아무리 경제 민주화가 이뤄져도 자본주의 노동의 기저엔 자본의 ‘가치법칙’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자본의 가치법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꽤 깊은 공부가 필요하다. (이 가치법칙에 대해선, 또한 가치법칙과 코로나19 사태 등 삶의 고통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자세히 논한다) 다만 여기서 그 핵심만 보면, 자본이란 (무한한 가치증식을 목표로) 이미 투자한 가치 이상의 가치를 획득하려는 운동이자 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자본의 실상을 들여다보고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곧 노동의 관계적 차원을 논하는 것이다.



맺는말


이 짧은 고찰에서도 분명하듯, 우리가 흔히 발전이나 노동을 이야기할 때 과연 그 개념들이 어떤 맥락에서 논해지는지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과연 무엇을 발전(또는 개발)이라 부를지, 또 어떻게 해야 참된 발전(개발)인지 등에 대해, 나아가 노동의 희생 위에 건설된 발전이 바람직한지, 또, 노동이 공정한 대우를 받는다는 게 무얼 뜻하는지, 과연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역사적 평가를 할 수 있을지, 나아가 이 모든 문제를 극복하는 대안은 무엇인지, 이런 이슈들에 대해 더 조심스럽게, 그러면서 더욱 깊이 있는 성찰을 해나갈 필요가 있다.



기사 입력 일자 : 2021-02-18(목)


작성 : 강수돌 고려대학교 융합경영학부 교수 / ksd@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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