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과 사람들[14호] 국제개발협력 미투운동, 그 움직임의 시작

2018-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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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개발협력 미투운동, 그 움직임의 시작


“요즘 한국에 미투운동 드디어 번지는데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성명서 이런 거 없나요?”2018년 2월 7일 오후 7시 38분, 국제개발협력 해외현장에 함께 파견되어 돌아온 활동가들과의 단체 카톡방에 메세지가 올라왔다. 해외현장에서 성폭력을 경험한 나는 주저 없이 ‘시작하자. 함께 할게. 성명서 한번 만들어보자.’ 라고 바로 답했다. 그 날 저녁 해외 현장에 같은 사업으로 파견되었던 동료 활동가와 통화를 했다. 우리는 25분 정도의 통화 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목표로 국제개발협력 현장에서 일어나는 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한 실상을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집담회 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통화를 한 활동가와 나는 3일후 첫 번째 모임을 갖기로 했다.



국제개발협력 미투운동을 위한 첫 번째 모임


통화 이 후 만나는 우리는 서로를 보자 마자 해외 현장에 2년 동안 있으면서 각자가 겪었던 성폭력 경험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가 왜 그런 경험을 겪어야 했는지 토로하기 시작했다.

“파견되었을 때 20대 초반으로 모르는 것이 많았고 사회경험이 적었던 때였어.”
“생각해보면 여성활동가가 더 많아. 그런데 주로 파견되는 국가들은 여성의 지위가 낮은 국가였던 것 같아.”
“좋은 일을 하기 위한 활동가로 파견되어서 나 자신이 봉사와 희생을 강요 받았어. 어떤 일을 겪어도 활동가로서 감수해야 한다는 거야.”
“나를 만지는 느낌이 드는데, 이게 문화적 차이인가? 나에게 이상한 말을 하는데, 이게 통번역의 문제인가? 처음에 혼란스러웠어.”
“파견되기 전에 항상 현장의 문화를 배우라고 배웠어. 그렇다면 여성을 억압하는 문화는? 현지 문화가 늘 옳은가?”
“갑자기 나를 안거나 만져. 주변 한국인에게 얘기를 하면 여성 외국인이니까 어쩔 수 없대. 그 자리에 왜 갔냐고 오히려 나한테 되묻는 거야.”
“해외에서 성폭력을 당하면 피해자는 어떻게 치료받고 가해자 처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성폭력이 발생해서 사무국에 보고를 해도, 사무국은 서울에 있고 나는 비행기로 17시간 떨어져 있는 성폭력이 발생한 현장에 홀로 남아 있다는 거야.”
“실망스러웠던 것은 나는 방치되었고 사무국의 대처와 결정도 결국 단체와 사업 중심이었어. 피해자는 2차 피해를 입게 된 거지.”
“사무국에 보고를 했는데 보고했던 이메일을 내리라는 요청을 받은 적도 있어. 지금 생각해보면 사무국도 젠더 감수성이 부족했고, 이것은 명백한 2차 가해야. 그런데도 나는 바보같이 보낸 이메일을 어떻게 취소해야 하나 고민했어.”
“난 언제나 최선을 다했어. 결국 함께 한 주민들을 생각하면서 나만 침묵하면 사업에 지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위와 같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국제개발협력 미투운동의 목적과 목표를 잡을 수 있었다. 한국 국제개발협력기관을 통해 해외로 파견되는 활동가들이 현장에서 겪는 성폭력을 알리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강화하는 계기를 만든다는 목적, 이를 위해 세계 여성의 날에 맞춰 성명서를 발표하고 집담회를 연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국내 기관에서 일어나는 성폭력보다 해외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국내에서도 성폭력을 겪으면 대응하기 어렵고 큰 용기가 필요하지만 해외에서 발생했을 경우 그 심각성이 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방법도 제한되어 있고 물리적으로 떨어진 만큼 소통이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집담회를 구상한 이유는 어떤 형태로든 활동가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8년 전 함께 해외현장에 파견되어 돌아온 활동가와 서로의 성폭력 경험을 한국에 돌아온 지 6년 만에 털어놓은 것처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같이 눈물 흘리고 서로를 위로했던 그 짧은 두 시간을 통해 마음 한 구석이 치유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어딘 가에서 그 상처를 애써 모른 체 하고 살아가고 있을 활동가들이 보고 싶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운동에 더 많은 활동가들이 동참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더 큰 단위의 국제개발협력 미투운동을 조직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내가 속해 있는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모임인 네오브릿지와 코빌 두 군데에 제안했다. 그리고 두 번째 모임을 가졌다. 나를 포함하여 네 명이 모였고, 해외에서 참여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어 화상채팅으로 함께 진행했다.



두 번째 모임


모임에 참여한 우리 모두는 국제개발협력 현장에서 미투운동이 수면 위로 떠오를 필요가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우리는 더 깊이 고민하고 더 많은 지지자를 찾고 전문가의 도움과 함께 차근차근 운동으로 가져가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또한 모임 참가자들이 설명한 해외현장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피해 유형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① 현지주민에 의한 활동가의 피해 ② 한국인(같은 활동가, 기관관계자, 교민 등)에 의한 활동가의 피해 ③ 한국인에 의한 현지주민의 피해. 유형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흥미로웠던 점은 단순히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조 안에서만 성폭력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남성 피해자도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성과 여성, 제1세계와 제3세계, 제3세계 남성과 제1세계 여성 등 다양한 권력구조 속에서 성폭력이 존재했다. 또한 이러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단체 측에서 성폭력 발생 사실이 현지 주민에 대한 낙인이나 현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침묵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성활동가들이 해외파견을 망설이면 어떻게 하냐는 우려도 있었다. 이러한 염려는 서운하기 그지 없었다. 현지나 사업을 우선으로 하기 전에 누구든 해외현장에서 당당하고 불안감 없이 활동할 수 있도록 안전망이 설치되어야 한다. 오히려 그 동안 안전망 없이 청년들이 가진 열정을 방패로 그들을 해외로 파견해온 것을 반성해야 한다.


모임을 거듭하며 함께 하는 사람이 배로 늘어난 만큼 우리의 고민과 이야기도 배로 깊어지고 풍성해졌다. 국제개발협력 단체 내 젠더 감수성을 높이고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의 중요함을 깨달았으나 어떤 방식으로 문화를 바꾸어 나가야 하는지, 피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서 움직임과 변화를 만들어가는 방향으로 가되 집담회 이후 어떻게 운동성을 가지고 갈 것인지가 중요했다. 또한 사람들의 참여를 어떻게 유도할 것인지, 국제개발협력이 가진 특수한 문화 속에서 미투운동이 어떤 여파를 일으킬 수 있을지도 고민되었지만 이 모든 고민이 이 분야 안에서 메아리처럼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모임


뒤이은 세 번째, 네 번째 모임은 국제개발협력 미투운동의 모임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국내 국제개발협력 기관에서 일어난 권력 관계에 의한 성폭력에 대해 논의해 오던 그룹이 합류한 것이다. 매우 반가웠다. 하나의 방향을 향해 서로가 다른 출발선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었고, 함께 달리고 있는 동지를 그제서야 알게 된 것이었다. 당초 해외 현장 사례에 집중 하기로 했지만 국내 활동가들이 겪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고 함께 하기로 했다. 국제개발협력 미투운동을 준비하며 국제개발협력 활동가 뿐만이 아닌 여성단체에 활동하는 활동가의 전문성이 필요했다. 그리고 네 번째 모임에 드디어 해외현장 파견의 경험을 가진 여성단체 활동가도 합류했다.


세 번째 모임에서 집담회를 열기 전에 먼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를 만들기 위해 페이스북에 익명페이지를 개설하기로 했다. “국제개발협력 미투운동”이라는 익명페이지 운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페이지에 게시글을 올린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자가 이메일을 보내 게시글 삭제 압박과 회유를 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긴급회의를 가졌고 법적 자문과 여성단체에 연대 요청을 했다. 이 사건이 일시적으로 일어난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앞으로도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임을 인지하고, 피해자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안전망을 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익명으로 쓴 글인데 글을 쓴 사람을 찾아내 가해자가 협박을 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우리가 공동으로 만든 페이지에 게시된 글에 대한 협박인 만큼 우리가 함께 대응해야 하는 일이었다. 공동 행동하는 것을 통해 피해자가 위축되지 않아야 하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목소리와 피해자의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피해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가해자에 대응했고 계속해서 많은 사례를 수집했다.



다섯 번째 모임


다섯 번째 모임에 10명이 모여 집담회 날짜를 잡았다. 2명에서 시작한 모임이 12명으로 늘어나며 모임의 활동 방향에 대해서 다시 정돈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국제개발협력 미투운동을 준비하는 모임은 네트워크 모임이고, 언제까지 어떤 방식으로 이끌어 가야 하는지 불투명한 상태였다. 모임을 이어가는 데 함께하는 사람들이 지치지 않도록 명확한 방향 설정이 필요했다. 오랜 논의 끝에 (1) 피해자 치유 (2) 국제개발협력 문화 변화/쇄신 (3) 가해자(개인) 대응으로 활동 방향을 정리할 수 있었다.



여섯 번째 모임 그리고 그 이후


여섯 번째 모임에서 국제개발협력 미투운동의 진행과 요구안을 정리해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갖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여덟번째 모임 이후, 지난 5월 29일(화) 오전 11시 광화문광장 광장 세종대왕동상 앞에서 기자회견을 주최하여 국제개발협력 국내외 현장에서 발생한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를 알리고 국제개발협력 내 변화와 관련 제도마련을 촉구했다.



▲ 국제개발협력 미투운동 기자회견 © 발전대안 피다



국제개발협력 미투운동을 통해 피해자들이 서로 소통하고 치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또한 이 운동이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어떻게 문화를 변화시켜 나갈지 계속 고민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국제개발협력 미투운동 페이지를 운영하고 기자회견 이후의 파장을 지켜보며 지금의 흐름과 현장에 맞추어 국제개발협력 미투운동이 추구해야 할 방향을 끊임없이 재정립하면서 나아가고자 한다.


이 운동을 이끌어가는 나의 원동력은 내가 파견되었던 마을, 하숙하던 방에서 웅크린 채 울던 나 자신에 대한 기억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침묵하며 괴로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힘들겠지만 용기 내어 침묵을 깨고 말하기를 바란다. 국제개발협력 미투운동을 이끌어오며 깨달은 분명한 것은 둘보다는 넷이, 넷보다는 여섯이, 여섯보다는 열이 함께 할수록 커진다는 점이다. 이제 막 시작했다. 앞으로 더 많은 활동가들이 국제개발협력 미투운동에 함께 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더 이상 참지 않겠습니다!” #ME TOO, #WITH YOU


* 페이스북 국제개발협력 미투운동 페이지 : https://www.facebook.com/idcmetoo/



기사 입력 일자: 2018-05-31


작성: 활동가 당당 의정부EXODUS 이주민센터 / kendi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