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과 사람들[19호] ‘연대로서의 발전’을 꿈꾸는 사람 - 장대업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과 교수/발전대안 피다 운영위원 인터뷰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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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로서의 발전’을 꿈꾸는 사람

 - 장대업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과 교수/발전대안 피다 운영위원 인터뷰-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살아가다 문득 ‘지금 이대로 살아가도 괜찮을 걸까’, ‘내가 바라던 삶이 이런 모습일까’라는 고민이 들 때가 있다. 설령, 고민의 끝에서 ‘이대로는 괜찮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르더라도 다시 해가 뜨면 어제의 고민을 안고서 반복되는 일상을 이어가기 마련이다. 하루, 이틀 견디는 시간이 점차 익숙해지면서 나만의 자유로운 삶에 대한 고민은 또 다시 옅어진다. 

쌀쌀한 바람에도 봄기운이 스며들어 마음이 들썩이던 3월의 어느 오후, 올해로 2년 째 발전대안 피다 운영위원으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장대업 운영위원을 만났다. 

피움 19호 [현장]에서는 기존의 여타 인터뷰와는 달리 지극히 개인적이고 솔직하게 ‘연대로서의 발전’을 꿈꾸며 살아온 좌충우돌 삶의 이야기와 피다에서 함께 꽃피워낸 활동 이야기들을 인터뷰 글로 함께 전하려 한다.

  

Q. 피다의 운영위원으로 올해 2년째 함께 해주고 계신데요. 피움 독자분들에게 간략한 자기 소개와 함께 어떻게 피다에서 활동하게 되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저는 현재 발전대안 피다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대업입니다. 피다의 전신인 ODA Watch 시절에 활동 내용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OWL(ODA Watch Letter, 피움의 전신)도 봐왔던지라 한국에 이런 단체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어요. 계속 관심을 갖고 있던 찰나에 한재광 대표를 만나게 되면서 ‘ODA Watch’에서 ‘발전대안 피다’로 전환하는 그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피다와 함께 하게 되었어요. 발전과 노동을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고, 1기 전문위원이 되어 활동하게 되었죠. 피다가 그리는 발전상이 제가 지향하는 발전상과 많이 닮아 있어 더욱 친숙하게 느껴졌어요. 전문위원이었지만 그때는 사실 조언자 역할 정도로, 직접적으로는 관여할 기회는 크게 없었는데 2기 운영위원 참여 제안을 받고 덥석 수락하게 되었어요. 제가 오랜시간 해외에서 생활을 하고, 2015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귀국하면 국내의 사회 운동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생각을 미루고 있던 찰나에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고 여기고 있어요.

 

Q. 네. 피다가 그리는 발전상과 원래 지향하셨던 발전상이 닮아있다 하셨는데,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생각 하셨는지 조금 더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A. 제가 그리는 발전상은 피다의 <피다 꽃피우기: 2019-2025> 비전 문서에 반영이 되긴 했는데, 그 문서 작업을 해나가면서 더욱 더 생각이 일치해나간다는 생각을 했어요. 발전은 참 어려운 주제이고, 선뜻 한마디로 잘라서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저는 ‘발전’이라는 주제를 발전학에서 연구하기 시작한 게 아니라 정치경제학에서부터 시작했고, 저의 연구 주제는 자본주의적 발전이 만들어 낸 여러 가지 문제들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반목, 충돌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이었어요. 일단 자본주의적 발전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사회관계 특성을 보면 착취를 빼놓고 자본주의를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에 착취를 어떻게 하면 가급적 ‘연대’로 바꿀 수 있는가가 제 화두이고요. 경제 자체가 운영되는 방식이 얼마나 착취가 아닌 연대에 기반 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연대는 어떻게 퍼져나갈 수 있고, 유지되고, 재생산될 수 있는지, 어떻게 공동체 내에서, 밖에서, 국경을 넘어서 가능한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요약해보면, 제가 지향하는 발전상은 ‘연대로서의 발전’으로 말할 수 있겠네요.


▲ 2018 '함께 찾아가는 발전상' 캄보디아 프로젝트 활동 중 방문한 벙꺽 호수의 여성활동가 그룹 그리고 팀원들과 함께한 장대업 위원의 모습(앞줄 맨 오른쪽) ⓒ발전대안피다 

 

Q. 작년에 운영위원을 시작하면서 ‘함께 찾아가는 발전상’ 캄보디아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하셨지요피다 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어떤 즐거움 또는 어려움이 있으셨는지현장에서 기억에 남는 일에 대해서 나눠주세요.

*2018 캄보디아 프로젝트함께 찾아가는 발전상피다는 ()바보의나눔의 ‘공익활동 지원사업으로 지난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간 ‘시민이 직접 개발협력현장을 감시한다’ 기조로 시민현장감시단 활동을 진행해 왔다올해는 ()바보의나눔의 ‘나눔공유화’ 사업의 일환으로 3년간의 사업을 되돌아보면서 ‘함께 찾아가는 발전상’ 이라는 주제로 캄보디아를 찾아 다양한 그룹에서 말하는 진정한 발전상에 대해 인터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A. ‘함께 찾아가는 발전상’ 프로젝트는 너무 즐겁게 참여했어요. 일단 저는 캄보디아에서 오랜 기간 연구를 해 왔기 때문에 익숙한 곳이기도 하고, 한국보다 캄보디아에 있을 때 마음이 더 편하기도 해요. 더군다나 저와 발전에 대한 생각과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현지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 게 큰 즐거움이었어요. 저는 캄보디아에서 주로 노동 관련된 단체를 통해서 사람들을 만나왔는데, 이번에는 늘상 만나던 사람들이 아니라 국제개발협력 분야라는 틀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새로웠고, 배울 수 있는 측면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제가 캄보디아에서 노동과 발전 연구를 10년 넘게 했는데 현지 사람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면 어느정도 답을 예상하게 되고, 90% 이상은 그 예상을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그러나 이번에는 답을 예상할 수 없는 인터뷰들이 많았고, 스스로가 갖고 있는 어떤 인식론적인 한계를 느끼게 하는 순간들도 많았어요. 가장 큰 예로 캄보디아 라따나끼리에서 댐 개발로 터전을 잃어버린 주민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주민들이 댐 건설 뒤 삶의 변화를 한마디로 "강이 없어졌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들에게 강은 삶 자체인데, 우리 눈에 거대한 매콩강은 댐이 있건 말건 흐르고 있었지만 주민들에게는 터전으로서의 강이 사라져버린 상황인거죠. 사물을 파악하는 눈이 아무리 우리가 피다에서 대안적인 발전, 민주적인 발전, 국제 연대를 이야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시각이라는 것이 수없이 재고한다 하더라도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그럼에도 더욱 즐거울 수 있었던 이유는 함께 했던 팀원들 덕분이에요. 활동가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발전에 대한 어떤 상을 갖고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과 접촉하는 방식,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회운동 활동가라고 하더라도 소위 말하는 현장에 나가서는 여러 가지 보지 못했던 행동과 태도를 보여주는 경우가 굉장히 많거든요. 겸손했던 사람들이 거만해지기도 하고, 현학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이야기를 듣기보다 더 많이 하려 하거나 가르치려 하거나 동료 간의 관계에서 갑질을 하려고 하는 등 여러 진상들이 벌어지기 마련인데 신기한 게 우리 팀 안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거죠. 자신이 갖고 있는 마음 속의 지향점들과 사람과 관계 맺는 방식 자체가 대부분 일치하는 사람들이어서 그 점에서 팀 구성이 매우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기 때문에 캄보디아에서 만난 사람들과도 우리가 갖고 있는 잣대로 판단하려 하지 않았고, 그 사람들을 대상화시키는 것을 최대한 방지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건 단순히 기분의 좋음으로 나타나지만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어가 보면 인터뷰 할 때 방법론도 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얼마만큼 '상대를 대상화시켜서 정보를 빼내는 인터뷰를 하느냐, 아니면 인터뷰를 통해서 서로간의 교감을 확인하고 인터뷰를 토론으로 발전시켜 참여자들이 한 번 더 곱씹어볼 수 있는 인터뷰를 하느냐' 인데 학문적인 연구 활동을 할 때 후자는 그렇게 많이 벌어지는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번 프로젝트는 그것을 가능하게 했어요. 파트너 선정, 세팅, 질문 시간 자체, 더운 상황에서의 참을성 이런 모든 것들이 잘 맞아 떨어져서 모범적이고 깊이 생각해 볼만한 인터뷰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해요. 그 점이 제일 기분이 좋았고 그래서 더 인상에 오랫동안 남을 것 같아요.

 

Q. 네. 이번 질문은 개인적인 질문일 수 있는데요. 학창시절에 대한 질문이에요. 사실 이 질문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어떤 계기로 발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가 궁금해서요. 어떤 관심사와 활동들이 삶에 중요한 결정들 곳곳에 영향을 미쳤는지 함께 나눠주세요.

A. 대학생활을 91년도에 시작했는데 최루탄이 가득하고 지하철역에서 검문이 일상이던 시국이었어요. 처음에는 선배들의 데모 모습을 지켜보다가 슬쩍 참여하게 되었고, 명지대학교 학생이었던 강경대 열사가 백골단이라는 진압부대에 맞아죽은 사건으로 신촌에 있는 거의 모든 학교들이 휴교를 하게 되었어요. 당시 제가 다니던 학과 정원이 200명이었는데 80명 가까이가 데모에 나갔어요. 약간이라도 사회에 관심 있던 사람들이 행동으로 전환하던 시기였어요. 그렇게 학사 경고를 두 번 받고 1학년이 끝났어요(웃음). 

2학년부터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의문이 들기 시작했고, 관련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학생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철거 문제를 접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사회의 문제가 단순히 위에서만 있는 문제가 아니라 굉장히 밑에까지 깊게 깔려 있는 문제라는 걸 생각하게 되었어요. 터전을 무참히 파괴하는 이런 발전이 과연 온전한 건지, 분명히 나중에 탈이 나지 않을지, 그리고 제일 큰 문제는 여기서 쫓겨 난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지가 너무 궁금한 거예요. 그 당시에는 발전, 도시개발이 도대체 뭐고,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누구의 이권이 개입되어 있고 국가는 어느 쪽을 도와주는지, 사람들은 어디로 밀려나며 이 사람들이 전체 사회를 보았을 때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는가에 등에 대한 현실들을 나름대로 이론화하려고 많이 애를 썼어요.

어떻게 보면 제가 공부하기 시작한 건 우연인데, 물론 공부하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졸업을 앞두고서는 취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IMF가 터져서 취직이 어려워졌어요. 그런 상황에서 학생운동의 경험들을 더 깊게 확인하고 싶었고, 한국에서 여러 이론을 공부했지만 외국에서는 어떤 식으로 공부할지, 전해 들은 이론이 아닌 원래의 이론은 무엇일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유학을 가게 되었죠.

 

Q. 박사 학위를 마치고, NGO 활동가가 된다는 것은 꽤 신선한 행보로 보여지는데요! 홍콩 아시아노동정보센터(Asia Monitor Resource Centre, 이하 AMRC)에서 어떻게 일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A. 일종의 우연인데,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세요. 저는 유학 시절 동안 한국 커뮤니티와 면밀한 관계가 없었어서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크게 안 했어요. 원래는 영국에 더 있고 싶어서 직장을 지원해보기도 하고, 영국에 있는 저널에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면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지요. 그렇게 ‘뭘 할까?’ 고민하다가 우연히 AMRC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했는데, 알고 보니 지도 교수님이 단체와 친분이 있었고 가면 좋을 것 같다고 추천까지 하셔서 가게 되었어요. 인터뷰하러 홍콩에 갔더니 무척 재미있는 단체더라고요. 인터뷰였지만 오랜만에 활동가들을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하다 보니 반갑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해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제 논문은 한국의 자본주의적 발달을 주제로, 국가와 노동, 자본 간의 역동을 분석하는 것이 핵심내용이었어요. 기존의 이론이 시장과 국가의 역동만을 보았다면 자본주의의 주축이 되는 사회관계 전체를 보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 노동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게 되었죠. 노동에 대한 관심은 항상 존재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노동 NGO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었어요. 제가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다가 유학을 갔으면 선택이 달랐을 수 도 있겠지만, 그 당시 누가 이야기 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커리어에 대한 고정관념 자체가 없었어요.


▲ 2008년, 이랜드와 뉴코아 노조의 홍콩 원정 노동 투쟁에 참여한 장대업 운영위원의 모습(맨 뒷줄 가운데) ⓒ 민중언론참세상

 

Q. 홍콩 AMRC에서 하신 활동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나눠주세요.

A. 홍콩에서 정말 많은 일을 했었어요. 원래 직함은 리서치 코디네이터였어요. 그런데 그냥 다 하는 거죠. 리서치도 하고 캠페인도 하고 조직화도 하고 집회, 연설, 다 하는데 단지 핵심 영역이 리서치라는 거였어요. 거의 모든 파트너 단체들이 동남아에 있었는데고 그 단체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거기서 활동하는 활동가들과 이야기하고, 그때그때 사안에 대해서 아시아 레벨에서 캠페인이나 리서치를 할 수 있을지 논의하고 그 사람들이 결정한 것들을 중심으로 따라갔죠.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 중 하나는 태국과 미얀마의 국경도시 메솟에 들어간 일이에요. 

그 당시 메솟은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었는데, AMRC가 2003년 여름 거의 첫 번째로 들어간 곳이에요. 그 당시 메솟에서 노동자들이 죽어나간다는 루머가 있었고 실제로도 강압적인 노동 탄압이 있었어요. 그래서 루머가 사실인지 확인해볼 겸, 또 그런 곳에서 활동하는 노동단체가 있다고 해서 저랑 다른 활동가 동료 2명과 함께 고속버스를 타고 갔죠. 가서 그곳 노동단체에 활동하는 모스웨 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분을 만나서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따라 갔는데, 갔더니 장례식장이에요. 노동자들과 연대활동을 벌이려던 리더가 실종되었다가 사망한 채로 발견된 거예요. 유가족들이 저희를 보더니 갑자기 관을 열어서 붕대를 다 풀어서 사체를 보여주면서 우리 힘으로는 어려우니 당신들이 이 억울한 죽음과 진실을 세상에 알려달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런 역량이 없잖아요. 그래서 그냥 막 사진을 찍고 그랬어요. 그런 흉내를 내야 할 것만 같았어요. 이분들은 뉴욕타임즈 기자가 온 것처럼 하지만 우리는 힘없는 노동단체에서 온 거였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굉장히 우울해졌어요.

그러고 나서 그 사실에 대한 글을 여기 저기 쓰긴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지역의 노동 조건이나 상황들은 버마에서 온 이주노동자 자신들에 의해서만 바뀔 수 있는 것이었죠. 흔히 사람들은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굉장히 많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그 뒤에도 상당히 많은 저항이 그 지역에서 일어났고, 우리를 안내해줬던 모스웨의 단체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어요. 모스웨는 나중에  한국에서 지학순 정의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어요. 지금 메솟에서는 예전에 벌어졌던 그런 종류의 일들이 더 이상 벌어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죠. 물론 우리가 썼던 글과 말도 어느 정도 영향은 미쳤겠지만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의 힘으로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어요. 그런 것들이 기억에 남고, 굉장히 많이 배우고 경험한 시간들이었어요.

또 다른 활동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국제노동단체들이 모여서 올림픽에 협찬하는 스포츠웨어업체들을 대상으로 캠페인을 조직한 일이에요. 그때 AMRC가 선구적으로 했던 것이 아시아 출신 초국적 기업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거예요. 단순히 서구의 초국적 기업뿐만 아니라 실제로 아시아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업체들 대부분이 아시아 업체들이고, 이 업체들도 현지 노동권을 존중하지 않는 풍습을 갖고 있다는 것, 앞으로 아시아 자본이 더욱 더 중요해질 것이라는 걸 캠페인을 통해 알리고자 했죠. 그 당시 서구 캠페인들은 아시아 자본은 그냥 하수인에 불과하고 아시아를 바꾸는 힘이 서구에 있는 소비자들의 손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노동자들이 직접 자신들을 조직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올림픽 기간 내내 각종 미팅에서 서구 단체들과 충돌하기도 하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노선으로 아시아 단체들을 설득했어요. 아시아 내에서의 연대를 강조한 거죠. 재미있는 게, 캠페인을 하면 우리의 이론과 의의에는 다 동의해요. 그런데 결국 서구 단체와 연대를 더 우선해요. 예컨대 이런 거죠. 자기 지역에 있는 회사에서 노동탄압이 일어났어요. 그것을 우리(AMRC)한테 이야기하면 우리는 그들과 연대 캠페인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서구 단체는 바로 본사에 전화하고 본사가 현지 회사에 전화하면 그런 나쁜 종류의 행동이 멈춰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공론화 하는 건데 서구 단체들은 솔루션을 줄 수 있거든요. 그래서 게임이 안 되죠. 아시아 네트워크를 형성하자는 굉장히 큰 운동의 흐름은 만들어 냈지만 지금까지도 잘 실현되고 있지는 않죠.

이런 경험을 통해서 말로만 듣고 공부했던 세계 질서나, 제3세계와 선진국 간의 불균등한 관계, 이런 것들이 단순히 국가 간의 관계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밑에까지 내려와서 사회운동에서도 벌어지고 있고 굉장히 골이 깊다는 것, 그래서 함부로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어요. 그렇게 AMRC 코디네이터를 한 5년 하다가 지치게 되었죠. 제가 3년 반 정도 풀타임으로 하다가 내부의 방향을 정하는 데 약간의 논쟁이 있기도 했고, 일이 너무 많이 몰리기도 해서 풀타임을 그만두고 홍콩대학에 박사 후 연구원으로 들어갔어요

그리고나서 좋은 기회로 영국 런던대학교 산하 아시아아프리카 대학교(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이하 SOAS)로 가게 되었어요. 제가 영국 유학시절 부터 Historical materialism journal 이라고, 당시에는 대학원생이 몇 명 모여 만든 저널에 편집위원을 했었는데, 저널에서 매년 컨퍼런스를 열었어요. SOAS로 가기 일년 전에 SOAS에서 그 컨퍼런스가 있었고, 친구들이 초청해서 가서 발표를 하게 되었던 거죠. 그때 교정을 거닐면서 이곳에서 일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현실로 이루어져서 저도 감사하게 생각해요.

 

Q. 홍콩에서 영국으로 그리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신데, NGO활동가에서 SOAS와 서강대로 이어지는 교수로서의 삶은 어떻게 연결된다고 생각하시나요?

A. 제 머릿속에서는 굉장히 정합성이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는데 남들이 보기에는 갈팡질팡 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왜 현대사회의 발전은 노동의 희생을 대가로만 가능한가?’ 라는 것을 연구를 계속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연구를 하는 방식이 책을 보면서 하는 방식도 있고, 책에서 말하는 것들이 줄 수 없는 현장에서 느끼는 경험들,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느끼는 경험들이 있기 때문에 그때그때 기회가 주어지는 한 다양한 방식으로 고민을 진전시키고자 하는 거죠. 그걸 어떻게 풀어내고 보여주는가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이 책이 될 수도 있고 활동이나, 캠페인이 될 수도 있고 삶이 될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제 고민인 ‘‘노동의 희생을 대가로 이루어지는 발전’과 그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주어지면 놓치지 않고 그 길을 가는 거죠. 그래서 활동가로서 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지면 그걸 확! 물 수도 있고요. 저는 늘 어디에서 일을 하든 평생 직장이라고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발전에 대한 고민’을 방해하면 바로 그만하게 되는 것 같아요. 방해를 받는 순간 거기에 대한 재미를 잃게 되더라고요. 활동가도 좋지만, 활동 자체가 일이 되고 짐이 되어서 형식적으로 이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는 그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지금 내가 있는 위치가 내 고민을 진전시키는데 얼마만큼 효과적인가가 제일 중요한 기준인 것 같아요.


Q. 오랜 해외 생활 후, 한국에 돌아와 한국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도 활동하고 계신데요. 한국의 개발협력 분야의 아쉬운 점이나 한계 등을 느끼신 적이 있다면 나눠주세요.

A. 국제개발협력을 이야기 할 때, 진짜 발전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국제개발협력 자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주를 이루는 것 같아 아쉬워요. 사람들이 발전에 대한 고민이 없다거나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니에요. 제가 볼 때는 개발담론이 국가 주도로 들어오게 된 것에 원인이 있지 않나 싶어요. 그 다음에 전체적으로 국제개발협력이라는 것이 한국인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의 기반이 적을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래서 발전학을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고요. 그래서 제가 피다로 전환할 때 가장 바람직한 점이라고 느낀 것이 국제개발협력이라는 이슈와 우리의 삶을 ‘발전이라는 담론’으로 접합시키려는 시도 자체였어요. 그렇게 해야 국제개발협력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의 사회 운동도 기반을 가질 수 있어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어디 갔다 온 사람들이 와서 자기의 기억을 반추하면서 더 좋은 방향을 고민하고 이런 것들로는 너무 기반이 좁다는 거죠. 그런 배경을 가진 분들과 한국 사회의 삶의 문제를 고민하는 사회 운동가들이 만나야 국제개발협력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동력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작업을 피다가 미진하지만 시작했다고 생각하고요.

학문적으로 이야기했을 때도 국제개발협력을 고민하는 분들과 한국의 사회적 삶의 질을 고민하는 분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죠. 그 두 가지 학문분야가 어떻게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을 가깝게 묶는 하나의 틀거리가 발전학이 되어야겠죠. 발전학을 열심히 해보려는 생각이 있긴 해요. 그런데 아직까지는 저도 미진하죠. 그런 점들이 극복될 필요가 있을 것 같고요. 피다가 하는 일의 학문적 버전이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방금 말씀 하셨던 두 영역을 발전학으로 엮는 일이 앞으로 교수님의 계획이나 꿈과 연결이 될까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꿈이 있으시다면 나눠주세요.

A. 저는 일단 해보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요. 현재로서는 제일 하고 싶은 일이 책 쓰는 건데 시간이 부족해서 못 쓰고 있는 게 제일 아쉬워요. 발전학 교과서와 제가 예전에 아시아 노동과 관련해서 앞전에 SOAS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발표 했다던 논문을 책으로 엮는 게 제일 하고 싶은 일이고요. 발전학 교과서를 쓰게 되면 발전학으로 한국의 진보적인 사회과학과 국제개발협력 사이를 연결하는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체계적으로 발전학을 공부하고 배울 수 있는 틀이 마련되었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학회 형태가 되었든, 학과나 대학원의 형태가 되었든 장기적으로는 제가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고요. 다시 또 NGO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Q. NGO 활동가의 시절이 생각나거나 그리울 때가 있으세요?

A. 일종의 상호작용인데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치고 토론하고 현장을 보고 느끼는 것은 끊임없이 지금의 어떤 문제들을 이론화하는데 자극을 계속 주고, 그 이론화하는 문제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게 되요. 이 상호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데, 제일 좋은 것은 제가 0.5는 연구자로, 0.5는 활동가면 좋겠죠. 그런데 그럴 수 없으니까 몇 년 단위로 왔다 갔다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면 현실적으로 여러 문제가 발생하겠죠. 소위 말하는 학교를 떠났다가 다시 들어오는 경우가 어렵거든요. 그런데 기회만 주어진다면 다시 NGO로 가보고 싶기도 해요. 아시아 활동가들 만나면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적인 환경에서 자본주의가 들어와서 고생하고 핍박받았던 노동하는 사람들의 고유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아시아지역의 노동연대단체를 만들자’ 이런 이야기들을 수년 동안 계속 해오고 있어요. 이건 누군가 한 번 정말 삶을 걸고 도전해 봄직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시아지역의 노동연대가 진짜로 노동시민이 위주가 되어서 연대를 할 수 있다면, 그런 것이 어떤 제도적인 형태로 만들어질 수 있다면 그건 굉장히 이상적이고 한번쯤은 꼭 해보고 싶은 일이죠.

 

Q. 나중에 한국에 안계시면 말씀하신 일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겠습니다.(웃음) 이제 마지막 질문인데요. 피다에 앞으로 기대하는 바, 기여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시다면 나눠주세요.

A. 피다가 개발을 발전처럼 고민하고, 발전을 개발처럼 고민하는 유일한 단체라고 생각하는데요. 한국사회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국제개발협력 논의를 확장시켜서 시민이 삶에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단체가 되었으면 좋겠고, ‘연대로서의 국제개발협력’을 선도하는 단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들을 이론적으로 보족하는 역할일 것 같아요. 학문분야 역시 마찬가지로 국제개발협력의 고민이 다른 사회문제와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만남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에 대해서 제가 기여를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죠. 처해 있는 위치가 학교이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풀어갈 부분에서 기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Q. 혹시 못다한 이야기가 있을까요?

A. 발전대안 피다를 단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운동으로 봤으면 좋겠어요. 시민사회단체로 보게 되면 단체의 효율성과 성과를 많이 보게 되죠. 그렇다면 사실 ODA Watch로 남았어야 하고 ‘발전대안 피다’로의 전환을 시도 하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피다로 전환한 이상, 단순히 이름이 바뀌거나 활동영역이 확장되었다기보다 활동 자체가 바뀌었다고 저는 생각해요. ODA Watch는 분명히 NGO 였어요. 그러나 피다는 그 자신이 맡고 있는 역할 자체가 하나의 운동을 대변하는 것이지 단체로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피다를 판단하는 기준이나 사업 영역도 굉장히 장기적이고 때로는 효율적이게 보이지 않더라도 장기적인 투자를 통해서 묵묵하게 밀고 나가는 모습이 굉장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피다를 ODA Watch처럼 단체로 보게 되면 피다가 못나 보일 수도 있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여러 장애물로 여겨지는 이들이 많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피다를 하나의 운동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철거민과 함께 연대하던 대학생, 국가 자본과 노동의 역동을 연구하던 유학생, 아시아의 노동 현장을 발로 누비고 다니던 NGO 활동가, 발전과 노동을 강의하는 교수. 인터뷰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찌 보면 너무나도 이질적인 행보라고 생각했다. 백 마디 말보다 삶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는 여운이 깊다. 순간순간 주어진 기회들을 놓치지 않으며, 누군가의 희생과 억압에 빗진 발전이 아닌 모두가 연대하며 ‘함께’ 만들어 가는 발전을 꿈꾸는 그의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삶의 이야기가 그렇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문득 지금 이 사회가 괜찮지 않을 때,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해질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인터뷰를 옮기고 있는 지금, 어렴풋이 그때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것 같다. 지금 주어진 자리에서 옳다고 믿는 가치를 삶으로 밀고 나가는 것, 행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놓치지 않고 뛰어드는 것, 그렇게 옳다고 믿는 ‘나만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않을까.

 

 

기사 입력 일자 : 2019-04-18

 

작성: 이예향 피움 편집위원, 한국 우진학교 교사 / yehyang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