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다뷰[23호] 코로나가 알려준 정상의 비정상성 : 우리는 이제 다른 발전이 필요하다!

202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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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알려준 정상의 비정상성 

: 우리는 이제 다른 발전이 필요하다!


현재까지 전세계에 걸쳐 180만 명이 감염되고 11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는 동물로부터 인간으로 전염된 감염병이다. 이러한 감염병의 발발은 동물 병원체가 인간 숙주로 전파될 기회를 제공하는 무분별한 벌채와 생태계 파괴, 동물포획이 이루어지는 자연과 인간의 ‘경계지역들'에서 출발한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자연과 인간문명의 경계에 존재하는 공동체나 ‘박쥐 애식가’들을 그 질병의 원인으로 치부하려 한다. 트럼프의 '중국 바이러스' 타령은 그러한 시도 중 하나이다. 하지만 우리는 감염병 대유행의 시발점이 되는 동물-인간 감염(인수감염)이 개발도상국 농촌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시작점은 바로 지구적 자본이 투자하고 있는 농업 산업, 개발 프로젝트에 의한 삼림 벌채와 생태계 파괴이다. 자본은 동물 병원균이 인간 숙주에게 뛰어드는 것만을 허락하지 않는다. 일단 동물 병원체가 인간, 혹은 인간이 소비하는 동물에 올라타게 되면 지구화된 자본의 순환 덕분에 불과 며칠 이내 발병지역에서 뉴욕, 런던, 홍콩과 같은 자본 유통의 진원지로 이동한다. 그러는 와중에 중간숙주에 옮겨진 병원균이 지역별 중심지에 착륙하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중국 우한 이었다. 여기까지는 발병의 공급 측면의 이야기다. 실제로 자본이 개발을 촉진하는 한, 개발이 인수감염을 막아주는 복잡한 생태계를 가진 환경을 계속 파괴하는 한, 이 문제는 계속된다. 이 공급측면의 문제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 위협이며 이에 대해 우리는 우리가 당연시하는 ‘발전’이 가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보다 근본적으로 되돌아보며 대응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급 측면의 문제가 항상 대유행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감염병의 대유행은 바이러스의 수신자 측의 이야기도 필요하다. 전염병의 대유행은 바이러스가 며칠 간의 세계 여행 후에 거대 도시에 상륙했을 때, 이러한 도시들이 적절한 공중 보건 위생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조건을 전제로 한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 발전이 가지고 있는 보다 근원적이고 미묘한 문제가 유행병과 그에 따른 경제 붕괴라는 심각한 위기로 변화한다. 이것이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 이야기 전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10년 동안 세계자본주의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코로나 위기는 2008년 글로벌 자본주의의 해결되지 않은 위기의 연속선에서 보아야 한다. 2008년 세계경제위기는 국가가 금융 분야에 세금을 투입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전 세계에 걸친 기업의 파산행렬을 중단시켰을지 모르지만 그 뒤 다가올 더 미묘하고 장기적인 위기를 키웠다. 일련의 구제금융 후 자본은 계속 확장하였다. 각종 경기부양책으로 도입된 대규모 인프라 사업과 시장을 확대하고 리스크를 분산하며 값싼 노동을 찾기위한 지구적 공급망의 확장은, 지구 온난화를 억제하기 위한 일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더 많은 자연을 희생시켰다. 그들은 대형 건설프로젝트를 통해 직접적으로, 혹은 가속화된 기후 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많은 동물의 자연 서식지를 파괴했다. 


한편, 재정 위기를 겪고 있는 국가들은 금융과 제조업을 구제하기 위해 진 빚을 갚느라 바빴다. 심각한 영향을 받은 부문 중 하나는 의료 분야였다. 많은 국가들이 시민을 위한 의료체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국가채무 상환에 퍼부어 왔다. 2008년 위기가 심각했던 국가들에서 이 문제는 도드라진다. 세계 강대국 미국도 이 문제를 알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전염병 유행에 대비되어 있지 못하며 미국 경제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에 대비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활발한 경제’를 위해 병상과 인공호흡기는 희생되었다. 무방비 상태의 숙주와 증가하는 동물 병원체의 인간사회로의 노출. 감염병 유행의 기본조건은 충족되었다. 


자본이 문제를 일으키고 국가가 구세주 역할을 하는 동안, 민주주의는 도처에서 침식되었다. 2008년 이후 권위주의 세력이 각 국 정부를 장악하고, 기존의 권위주의 정부는 더욱 억압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2010년대 중반까지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권위주의 정부 아래 있었다. 2014년 캄보디아, 2016년 한국, 2019~2020년 홍콩에서 민주화의 회복을 위한 저항의 발발은 그 추세를 반증한다. 권위주의는 남반구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른바 탈민주주의로 불리우는 ‘선진국’들의 위기는 이 민주주의 국가들이 '국부'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후진적인 발전을 경험했음을 보여준다. 대신 국가가 어떤 문제에 더 많은 돈을 쓸 용의가 있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 권위주의적인 국가들은 감염병의 대유행 동안 바이러스보다 인간 숙주들을 죽이는 데 더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의 극단적 예는 코로나19 위기 동안 질서유지를 위해 문제를 일으키는 시민들에 대한 현장 사살을 용인한 필리핀이다. 중국이 우한 시민들에게 저지른 일도 이와 같다. 유럽에서는 보리스 존슨의 영국 정부가 한때 추구했던 이른바 집단 면역 전략이 있었다. 결과는 동서양 모두에서 참혹했다. 


코로나 위기 이후 우리는 어떤 ‘발전’을 경험하게 될까? 이러한 위기 이후, “지금까지 하던 방식으로”는 어느 곳에서도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 위기는 국가 지원 없이 시장이 자립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2008년 이래로 의심받아온 ‘자유시장’이라는 이념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다 큰 어른 흉내를 내던 시장은 고작 배고플 때마다 우는 아이에 불과했다. 앞으로의 추세는 경제재건을 위해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큰 국가’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들 국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유행했던 ‘경제재건을 위한 발전주의’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는 부활한 발전주의가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 신발전주의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진보적 대안을 제공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2008년 이후 10년 동안 보수세력이 집권한 한국의 국가는 권력층의 금전적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권위주의 국가였다. 한국의 경험은 민주적 제도와 참여를 보장하지 않고 박정희 식 발전국가 정신을 일깨우는 위험을 미리 알려주었다. 이제 이러한 과거에 집착하기 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미래에 도전해야 할 때이다.


코로나 위기는 플랫폼 노동자, 가사 노동자, 이주 노동자, 구조 노동자, 미화원, 쓰레기 수거업자, 간병인 등 기존의 발전에서 철저히 소외된 계층이 반대로 우리의 생계를 유지해주는 사람들임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들의 저임금 노동을 당연히 여겼지만 이들없이는 또 다른 아침을 맞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들의 저임금 노동이 비정상적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과연 우리는 언제쯤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묻는다. 하지만 우리의 정상이 지극히 비정상적인 것에 기대고 있다면 정상으로의 복귀는 무엇을 의미할까? 매일 등장하는 새 건물이 같은 날 세상을 등지는 건설노동자에 기대고 있다면, 군사대국이 서민에게 의료보험조차 제공하지 않는 인색함에 기대고 있다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백신개발이 거대 제약회사들의 돈벌이 계산에 의해 좌우된다면, 한잔의 커피가 일당 천원의 농민에게 기대고 있다면, 내 식탁위의 야채와 고기가 야생동물을 밀어낸 땅에서 재배된다면, 그러한 정상이란 우리가 돌아가도 괜찮은 곳일까? 우리가 이렇게 정상적인 것의 비정상성을 알게된다면 그 깨달음은 우리가 발전을 사고하는 방식에도 적용될 필요가 있다. 이제 늘 해오던 발전을 다시 되돌아보고 그 반대의 탈성장을 논의할 시기이다. 탈성장은 사실상 인간의 발전을 의미한다. 기존의 발전이 인간이 소유한 물질의 성장을 의미한다면 탈성장은 인간의 다면적인 발전에 관한 것이다. 피다가 얘기해온 ‘사람이 꽃피는 발전’과 일맥상통한다. 코로나19 위기는 지금이 바로 ‘정상이 문제였기 때문에 우리는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때임을 말해준다. 이것이 코로나19로 인해 쓰러진 시민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고 더 큰 희생을 방지하는 길일 것이다.



기사 입력 일자: 2020-04-16


필자: 장대업 서강대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발전대안 피다 운영위원/ daeoup@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