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다뷰[15호] 난민, 인도주의, 그리고 국제개발협력

2018-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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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인도주의, 그리고 국제개발협력

월드컵 축구 열기로 전 세계가 달아오를 즈음, 한국 사회는 때아닌 난민 이슈로 들끓었다. 내전을 겪고  고국을 탈출한 예멘인 5백여 명이 무사증입국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한국(제주도)으로 입국해오면서 돌연 최고의 이슈로 급부상한 것이다. 지금 유럽 역시 난민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지만, 이번 예멘 난민 유입에 대한 유럽 언론 중에는 난민 500여 명의 유입이 전 사회적 이슈가 되는 현상에 대해 의아해하는 반응도 있었다.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에 달하는 난민들의 유입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유럽국가들의 시각에서는 이해가 잘 안될 만하다. 하지만 이주민과 함께 살아온 역사가 짧은 한국 사회는 한꺼번에 500여명의 난민이 입국한 사실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연일 난민 수용 찬성과 반대 논쟁이 언론과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었고, 반대 집회와 찬성 집회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날 열리기도 했다. 급기야 청와대 국민청원사이트에 올라온 ‘제주도 불법 난민 신청문제에 따른 난민증, 무사증입국, 난민신청허가 폐지/개헌 청원’에 한 달 만에 71만여 명이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에서는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실수로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선수들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예멘인, 무슬림, 난민들에 대한 괴담과 가짜 뉴스가 범람했다. 일상 살이의 버거움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구조적 차별과 노력의 소용없음에 대한 분노의 표출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민중들의 자연스러운 감정 분출이었고, 당연한 권리 행사였다. 안타까운 점은 그 분노의 에너지가, 차별과 폭력을 조장하는 세력과 구조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힘없고 취약한 이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을(乙)들 간의 분쟁이나 을(乙)에 의한 병(丙)의 차별은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일이다. 갈수록 사정이 어려워지는 편의점주들이 높은 가맹수수료, 임대료, 카드수수료 등의 보다 구조적인 문제를 제쳐 두고, 알바생의 최저임금만을 문제 삼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 사회의 일자리, 젠더, 범죄 문제에 대한 화를 근본적 원인제공자가 아닌 난민들에게 쏟아내는 것은 온당치 않다.


조금 눈을 돌려 국제개발협력 분야와 난민의 연관성을 살펴보자. 난민은 국제개발협력에서 전통적인 이슈이자 참여자이다. 한국의 국제개발협력 단체 중에는 시리아 난민 캠프에서 활동하는 단체들도 있고, 국내에서 시리아 난민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는 단체들도 있다.  흥미로운 현상은 이 단체들을 포함한 국제개발협력 단체 중 이번 예멘 난민 이슈에 대한 입장이나 성명을 발표하는 단체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활동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국제개발협력 단체들이 국내로 유입된 난민들을 위해 활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인도주의: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인종, 민족, 국가, 종교 따위의 차이를 초월하여 인류와 복지를 꾀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사상이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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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개발협력 단체들은 인도주의 사상에 기대어 위기에 처한 인간이나 집단에게 무조건적인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활동을 하고 있다. 국내 난민 이슈를 고민하기에 앞서, 개도국에서 실시하는 기존의 난민 프로그램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선 ‘기본적인 인권이 부정당하는 이들에 대한 마땅한 의무’가 아니라, ‘나의 선의로 한다고’고 여기는 자선에 기반해서 활동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우월함에 기반한 시각은 인도주의가 아니라 인종주의에 빠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내 난민들을 옹호하는 데에는 왜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인지를 스스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혹시 그것이 우리의 활동영역 밖이라고 여기기 때문은 아닌가? 정치중립(비정치성)의 원칙에 어긋날 우려가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의무가 아닌 선의로 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누구를, 어떻게 도울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은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하고 시행한 나라이다. 이 사실을 아는 국민들도 많지 않겠지만, 과연 우리 정부나 사회가 난민법을 제정, 시행하기 이전에 난민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돌아봐야 한다. 성숙한 인도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 없이 조급하게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라잡으려 도입한 난민법은 압축적 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사회적 부작용과 궤를 같이 한다. 원조 철학과 가치의 내실화보다 ‘한국형 원조’의 차별성을 급조하려는 경향 역시 성찰해야 한다.


"나는 아테네인도 그리스인도 아닌 세계시민이다."라는 소크라테스 외침과 “세계시민은 타인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간주하는 사람이다.”라는 칸트의 선언에 다시금 귀를 기울인다. 인도주의, 세계시민주의는 대상을 막론하고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자 가치이다. 우리가 자선이 아닌 인권과 인도주의 원칙에 기반하여 개도국의 시민들과 협력하고 있는지, 동일한 원칙이 우리 사회에 유입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난민에게도 적용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정부와 사회가 지금부터라도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난 난민들을 수용하고 함께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위기에 처한 이웃에 공감하고 돕는 과정에서 사람과 사회는 한층 성장한다. 도움은 일방적 행위가 아니라 서로 교류하고 함께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금번 예멘 난민 이슈는 우리사회의 현주소를 돌아보고 한층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게 나라냐?’ 며 분노하고 실망에 빠졌던 우리 국민들이 스스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기사 입력 일자: 2018-07-31


작성: 김경연 발전대안 피다 공동대표 / kaykim7070@gmail.com




[1] 표준국어대사전 '인도주의' 정의. 출처: http://stdweb2.korean.go.kr/search/List_dic.j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