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과 사람들[11호] '뺄셈의 현장활동'을 위하여 -'제2회 피다데이: 라오 청년 힘 기르기' 참가후기

2018-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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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뺄셈의 현장활동'을 위하여
-'제2회 피다데이: 라오 청년 힘 기르기' 참가후기



현장에서의 삶은 대개 결핍의 연속이다. 한국 사회의 풍요에 익숙해져 있다면 적응이 다소 힘들 수 있다. 처음 아프리카 대륙으로 해외 봉사를 나갔을 때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보내줄게”라는 친구의 말에 “편의점 하나만 보내줘”라고 답했던 적이 있다. 한국에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현지에서, 몸으로 부딪치고 견디며 버리는 연습을 했었다. ‘개발도상국에서 OO없이 살기’ – 고추장, 인터넷과 같은 고급(?) 요소뿐 아니라 전기, 물과 같은 필수 요소에 이르기까지 OO에 대입할 수 있는 단어는 수없이 많다. 어느 정도의 현장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활동의 영역에서는 어떠한가? 오히려 ‘물질적인 결핍이 많을수록 할 일이 많은’ 경우가 다수 아닐까? 우리는 굉장히 쉽게 현장을 재단한다. 한국 사회와 비교해 없는 것들, 부족한 것들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해야 할 일들과 채워야 할 것들을 써나간다. 계획과 실행, 점검의 모든 과정이 빽빽한 체크리스트의 연속이다. 좋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겠다고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겠다고 검토해야 할 것들과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더하는 데도 원하는 목표는 쉽사리 달성되지 않는다. 애초에 ‘사업이 무어란 말인가?’, ‘목표는 문서에만 존재할 뿐 허상에 불과한 건가?’ 회의감에 빠지기도 한다.
 
‘털보쌤’으로 통하는 이선재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건 ‘피움’의 전신인 ‘OWL’을 통해서였다. 지금도 피움에 연재를 하는 중이지만, 수년 전 라오에서의 활동에 대해 쓴 OWL 연재 글에서 드러나는 개발과 현장,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생각들에 공감이 가서 꼬박꼬박 글을 찾아 읽곤 했었다. 이후 종종 강연이나 대화 자리가 있었지만, 번번이 다른 일과 겹쳐 갈 기회가 없었다가 이번에 마침 피다데이 소식을 접하고 얼른 신청했더랬다.

털보쌤은 15년 전부터 라오를 오가며 활동을 해오다가 5년 전부터는 아예 마을에 들어가 살고 있다. 현장을 대하는 태도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개인적으로는, 현장에 대한 활동가의 애정이 궁극에 달해야만 이를 수 있는 경지라고 생각한다. 밖에서 제3자로 볼 때의 현장과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갈 때의 현장은 어떻게 다를까, 15년간의 ‘청년 힘 기르기’는 과연 성공적으로 진행 중일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피다데이를 찾았다.


▲ 제2회 피다데이에서 발제하는 털보쌤 ©발전대안 피다



강연의 주요 줄기는 푸딘댕 마을 청년들의 힘 기르기
[1]에 대한 이야기였다. 15년 전 처음 라오에 방문했을 때의 활동들과 이후 어떻게 사업이 변해갔는지, 그동안 어린이가 청년으로 성장하고, 그 청년들이 센터의 주인으로 활동하게 된 이야기까지 단숨에 쏟아졌다. 단 한 두 장의 슬라이드 안에 초등학교 4~5학년 남짓의 어린이들이 애 아버지가 되어 나타났다. 불과 한 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어찌 15년의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었겠느냐마는, 몇 마디 말, 몇 장의 사진만으로도 참여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들이 있었다.

큰 차이 중 하나는 이런 것이었다. 보통의 성과 보고회나 활동 발표회에 가면 어떤 활동을 했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를 말해준다. 털보쌤은 달랐다. 푸딘댕청소년센터에서 무엇을 하지 않는지, 그리고 무엇이 없는지를 이야기했다. 센터에는 위계질서가 없고, 휴가를 승인 받아야 하는 등의 내부 규정이 없고, 정기 후원이 없다. 이것이 현재의 모습이고, 따지자면 활동의 중간 결과다. 어쩌면 다른 조직이나 활동가들은 이런 부분을 ‘문제’로 진단하고 바꾸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털보쌤은 의지를 가지고 이 부분을 지키려 한다. 여기에 대해 많은 질문이 쏟아지기도 했다. 세대 간의 갈등은 없는지, 청년들의 성취욕은 없는지, 푸딘댕 센터에는 없는 일들(후원 유치 등)을 하는 다른 기관들은 그것을 멈춰야 하는지 등등… 이들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정리하자면 이랬다.


첫 번째, 라오 사회가 가진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라오는 농업을 기반으로 한 모계 중심 사회이고, 가족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다. 사회가 변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많은 청년이 고향에서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을 행복한 삶으로 여긴다. 한국 청년의 가치관으로 봤을 때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이것은 그저 다른 것이다.

두 번째, 라오 사회는 또한 세대별, 성별 역할 구분이 뚜렷한 사회이기도 하다. 각 구성원이 가진 역할이 명확하고 서로를 존중한다. 푸딘댕 센터는 청년들을 주축으로 운영되지만, 필요한 부분에서는 마을 어른들과도 상의하고, 결정된 바를 따른다. 여기에는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

세 번째, 푸딘댕 센터의 활동은 하나의 길일 뿐이다. 모두가 같은 길을 갈 이유는 없다. 하나의 길만이 옳은 것도 아니다. 신념과 활동의 즐거움에 따라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할 뿐이다. 활동의 방향과 내용도 그 안에서 결정되는 것이고,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규칙 만들기를 좋아한다. 현장 활동에서도 매뉴얼을 만들고, 이에 따라 순서대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활동을 해나가는 것이 ‘정석’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정석을 따른다고 현장이 모범답안과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활동가는 고민한다. 공식을 따랐는데 왜 결과는 정답과 같지 않은 걸까. 다시 공식을 파고든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우리는 방법론에 갇히고, 이론에 속는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못하고 머리로 판단한 것을 자꾸 기준으로 삼으려는 태도가 현장 활동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자꾸 ‘해야 할 일’, ‘거쳐야 하는 과정’, ‘이루어내야 할 결과’를 얹어가는 덧셈의 개발은 대개 현장에서 잡음을 만들고 혼란을 야기하지 않던가.


▲ 발제가 끝나고 질의하는 필자(엄소희) ©발전대안 피다



경험담 중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와 닿았고 새롭게 생각하게 된 부분은 “굳이 무언가 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애쓰는 사이에 우리는 자꾸 현장이 가진 강점을 놓치고, 그들만의 특성을 무시하게 된다. 삶에서는 ‘없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활동에서는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활동가들의 특성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의 과한 사명감이, ‘그저 사는 과정’을 견디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현장의 삶에서 ‘전기가 없는 밤’을 받아들이듯이, 활동에서 역시 ‘조직도가 없는 조직’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털보쌤의 말대로 그의 삶과 활동이 모든 사람에게 모델이 될 필요는 없다. (자신은 ‘난 라오에 살기 위해 간 사람’이라는 걸 강조했다.) 하지만 푸딘댕의 사례를 잘 들여다볼 필요는 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식대로 하지 않아도, 푸딘댕에는 센터가 세워지고 청년들이 주인이 되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과연 현장에서 주민들의 ‘힘 기르기’를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다시 개발협력 활동으로 돌아가, 지역에서의 활동을 구상할 때, ‘해야 할 일’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먼저 생각해보고, 우리가 함께 이룰 결과물에 ‘갖추어야 할 것’보다 ‘없어야 할 것’을 함께 구상하는 과정을 상상해본다. 묘한 짜릿함이 있다. 비우고, 덜어내고, 그 자리에는 주민들에 대한 믿음을 채우는 거다. 그리고 나머지는 함께 해 나가면 된다. 머리가 가벼워진 만큼 마음도 가볍다. 우리가 고민하는 대안발전이, 이렇게 가볍게도 해 볼 수 있는 것이라니. “청년의 힘 기르기는 비어 라오와 함께”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좀 더 즐거운 마음으로 해볼 수 있을 것만 같다.



기사 입력 일자: 2017-11-22

작성: 엄소희 파울러스
[2] 프로젝트 매니저 / baram.sophie@gmail.com



[1] 우리는 이런 활동을 ‘역량개발’ 프로그램이라 부른다. 하지만 털보쌤은 ‘역량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현재의 활동은 ‘힘 기르기’라 명명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하고 이렇게 소개하였다. 이 글에서도 ‘힘 기르기’라는 단어를 그대로 쓰기로 한다.


[2] 파울러스는 국제개발협력 미디어 소셜벤처입니다. 미디어 역량개발 등 C4D(Communication for Development) 사업과 국제개발협력 분야 미디어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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