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다뷰대격변의 시대, 한국 국제개발협력은 약자를 위한 글로벌 정의를 선택해야 한다

2025-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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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격변의 시대, 한국 국제개발협력은 

약자를 위한 글로벌 정의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혼란한 시대에 서 있다. 평화롭고 안정적인 시대는 드물었지만,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어지러운 시기가 있었던가 싶다. 4월 4일 대통령 탄핵이 최종 결정되면서 큰 고비는 지났지만, 12월 초 비상계엄 이후 극명하게 두 동강 난 한국 사회는 이제 여전한 긴장과 혼란 속에서 대선을 맞이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월 취임한 이래 거침없이 파괴적 행보를 이어 가고 있다. 그에 따른 국제사회의 불안정성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바야흐로 대격변의 시대, 한국 국제개발협력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보편적 가치 추구의 축소와 단기적 국익 실현의 증대 가속화


먼저 국제사회의 변화를 바라보자. 트럼프 대통령은 1월 취임 이후 빠르게 USAID 해체 작업을 추진했다. USAID가 진행하던 프로그램의 83%가 중지됐다. “이 프로그램들은 미국의 핵심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마르코 루비오(Marco Antonio Rubio) 국무장관이 제시한 이유다. 


2023년 규모 면에서 세계 4위 공여국인 영국의 애널리스 도즈(Anneliese Dodds) 국제개발 담당 장관은 지난 3월 19일 집권 노동당 총리 키어 스타머(Keir Starmer)를 비판하며 사임했다. 총리가 방위비 증가를 이유로 2027년부터 현재 국민소득(GNI) 대비 0.5%대인 원조를 0.3%대로 삭감할 것이라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도즈는 “결국 이러한 삭감은 절박한 사람들로부터 음식과 보건의료를 빼앗아 영국의 평판을 크게 해칠 것”이라고 비판했다. 


앞서 올해 2월 20일 네덜란드의 레이네트 클레버(Reinette Klever) 대외무역개발원조부 장관은 ‘네덜란드 우선주의(Netherlands-first approach)’ 방식의 개발원조를 천명했다. 장관은 개발원조 규모를 삭감할 것이며 네덜란드의 국익에 직접 기여하지 않는 프로그램은 중단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향후 원조는 네덜란드의 안보와 경제 그리고 이민 정책에 유리하게 작용할 지역에만 집중할 것을 밝혔다. 


스웨덴은 이미 2023년부터 이 같은 변화를 보였다. 2022년 권력을 잡은 우파 정부는 2023년 12월 ‘새로운 시대를 위한 개발 지원 - 자유, 임파워먼트 및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이름의 전략을 제시하며 국제개발협력 정책의 변화를 나타냈다. 정책의 초점은 이민 이슈 해결과 스웨덴 기업 이익 추구에 맞췄다. 전통적으로 중요시해 왔던 최빈곤 국가와 분쟁 국가에 대한 우선 지원, 다자 기구에 대한 지원은 후순위로 밀려났고, 변경된 시민사회 파트너십 정책 기조는 퇴보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같은 유럽 국가들의 정책 변화는 올해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과는 관계없이 이미 수 년 전부터 이어져 왔다. 개발협력 전문 언론인 체이스-루비츠(Jesse Chase-Lubitz)는 지난 수 년간 진행된 유럽 공여국들의 국제개발협력 정책 변화의 원인을 경제 침체, 국경에서의 안보 위협, 그리고 국수주의자들의 반체제 정서(anti-establishment nationalist sentiments)의 증가 등 세 가지로 설명한다. 좌파는 원조 증대, 우파는 원조 감소라는 전통적 경향성은 당분간은 의미가 없다. 이런 맥락 가운데 공여국 중 미국, 영국, 핀란드,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스위스, 독일 등은 향후 ODA 예산을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실제 OECD DAC의 주요 회원국 18개국 중 2023년 대비 2025년 ODA 예산이 늘어난 것은 한국, 일본, 이탈리아 3개국뿐이다. 향후 공여국들의 국방비 증가, 기업 지원 연계 증대, 최빈국 지원 감소, 국내 난민 지원 증가 등이 ODA 예산 축소와 연계하여 보아야 할 대목들이다.


공여국들의 정책 변화는 ‘보편적 가치 추구의 축소와 단기적 국익 실현의 증대’로 요약된다. 이런 현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공여국 내 경제적 어려움과 원조 피로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가운데, 공여국 정부들은 원조를 통한 국익 추구를 더욱 명확히 정책에 반영했다. 그럼에도 공여국들은 SDGs와 같은 보편적 국제 규범 준수라는 명분과 국익 추구 간 균형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올 1월 트럼프가 단행한 USAID 해체는 노골적 국익 추구를 위한 ‘장사꾼 원조’가 다시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등장했음을 보여 준다. 그 결과 당장 원조 자금이 끊겨 생명에 위협을 받는 전 세계의 어려운 이웃들이 존재한다. 과거 식민지 시대 권력 관계의 연장과 냉전 체제 유지 무기로 사용됐던 원조가 보편적 가치 실현이라는 한쪽 얼굴을 가리고, 국익 실현을 위한 전사들의 무기라는 다른 얼굴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보편주의의 혜택을 보았던 글로벌 사회의 어려운 이들은 재부상하는 국익 실현 우선의 논리로 인해 다시금 소외될 것이다.



탄핵 이후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정체성


드디어 윤석열이 파면됐다. 계엄 이후 백일이 넘도록 잠 못 이루게 하던 큰 걸림돌은 일단 걷어졌다. 기쁘지만, 진짜 개혁은 이제 시작이다. 국제개발협력 분야는 어떤 일들이 있을까? 2025년에는 향후 수 년간의 한국 국제개발협력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칠 두 가지 일이 진행된다. 첫째는 정부의 중기 전략 문서인 ‘제4차 국제개발협력 종합기본계획’ 작성이다. 현재 정부는 2026년부터 2030년까지 5년간의 한국 국제개발협력 정책의 방향과 내용을 규정하는 정책 문서를 연구 용역 방식으로 작성하고 있다. 둘째는 6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다. 이번에 선출될 대통령은 2030년 5월까지 5년간의 임기를 보낸다. 대통령 선거에서 제시된 공약은 이후 국정 과제로 구체화되고, 제4차 국제개발협력 종합기본계획과 긴밀히 연계될 것이다. 다른 주요 공여국들이 노골적으로 단기적 국익 추구를 기본 전제로 내세우고, 기업과의 연계를 강조하며 ODA 규모 축소를 공표하는 가운데, 한국의 주요 정당들과 정부 당국은 국제개발협력 대선 정책 공약과 제4차 국제개발협력 종합기본계획을 구성할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할까?


최우선 순위는 미국과 유럽 국가 그리고 일본의 정책 변화일 것이다. 다른 주요 고려 사항들인 이전 정책 성격의 계승, 다양한 주체들의 의견, 국제 규범의 준수보다 다른 공여국들이 어떻게 정책을 변경하는지 보고,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길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한 표가 시급한 대선 국면에서 정당들은 무엇을 국제개발협력 공약으로 제시할까? 그리고 정부 당국은 세계 10위권의 ODA 양적 규모를 목표로 하는 국제개발협력 정책의 지향점을 무엇으로 설정할까? 대략 두 가지 선택이 있을 것이다. 먼저 그동안 자랑하던 ODA 규모 증가율을 대세에 따라 축소하고, 안보와 경제적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가는 쉬운 길이 있다. 다른 선택은 모두가 지극히 협소한 국익 추구의 현실주의 정책을 추구할 때, 전략적으로 보편적 가치의 실현에 집중하고 약자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 같은 선택들은 국제개발협력 정책 자체보다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가지는 정체성과 연결된 문제다. 미국과 같은 강대국의 정책 방향 전환에 대해 충실한 종속변수로서 6조 원이 넘는 자금을 단기적 국익 실현을 위해 사용하는 한국. 그리고 위기의 시대에 정치적 난관을 뚫고 민주주의의 꽃을 다시 피워 내듯이, 옳은 일을 위한 길을 선택한 한국. 곧 드러날 국제개발협력 정책을 통해 확인될, 국제사회 구성원 한국의 두 가지 정체성이다.



새로운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정책 방향 설정


발전대안 피다는 격변하는 국내외 시대적 상황에서 구성되는 새로운 한국 국제개발협력 정책에 대해 다음의 두 가지 내용을 강조한다. 첫째, 정책 방향이다. ‘단기적 국익 실현의 수단’이 아닌 ‘평화와 인도주의를 추구하는, 약자를 위한 글로벌 정의의 실현’이 한국의 향후 5년의 국제개발협력 정책의 방향이어야 한다. 정당들은 곧 제시할 대선 공약과 이후 작성될 국정 과제에, 그리고 정부 당국은 하반기 확정할 제4차 국제개발협력 종합기본계획에 이 방향을 반영해야 한다.


한국은 다른 주요 공여국들과 같이 제국주의적 식민 지배 권력 관계의 연장 수단으로 원조를 활용해 온 경험은 없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냉전 체제와 강대국 중심으로 구성되고 운영되어 온 세계 경제 체제에서 혜택을 본 것은 분명하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 제공된 막대한 ODA 자금은 단순히 전쟁 피해 최빈국의 재건만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공산화 확대를 막기 위한 냉전의 최전방에 대한 투자였다. 그리고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를 거쳐 중심부에 가까이 간 한국의 경제 성장은 실제 한국 사회 구성원의 피나는 노력 외에도 강대국 중심의 세계 경제 체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과거 한국은 현실주의적 원조 정책의 수혜자였다. 그러나 우리가 혜택을 받았다고 해서, 정치 및 경제적 목적을 가지고 다른 누군가로부터 단기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국제개발협력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더 큰 길을 가야 한다. 인류 보편적인 평화와 인도주의적 가치가 실현되는, 약자에게 더 초점을 둔 정의로운 글로벌 사회가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 기여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도 선택하지 않은 길을 왜 우리가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표할 수 있다. 그러나 혼란한 시대에 더 가난하고 더 큰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한국의 전략적 선택이어야 한다. 그것이 국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대격변의 시대에 한국 사회 구성원들에게도 앞으로 가야 할 미래의 지향점을 제시해 줄 것이다. 국제개발협력 정책의 지향점은 한국 사회의 성숙과 유리될 수 없다.


둘째, 작성 과정이다. 특별히 두 그룹에게 촉구한다. 먼저, 제4차 국제개발협력 종합기본계획 작성을 책임지는 국무조정실 국제개발협력본부 및 외교부, 기획재정부 관계자들이다. 역사적으로 한국 국제개발협력 정책의 발전은 항상 관료들이 주도해 왔다. 정책 주도권을 둘러싸고 정부 부처 간 갈등은 있었지만, 결국 국제개발협력을 제도화하고 도전 과제 해결을 이끌어 온 것도 관료들이었다. 그러나 관료들만이 국제개발협력 정책의 주인은 아니다. 제4차 국제개발협력 종합기본계획 작성, 그리고 이후에 진행될 다양한 정책 및 부속 문서들의 작성 과정에서 학계나 시민사회, 그리고 각 분야 전문가들을 그저 의견 청취 대상이나 정책 실행 과정에서의 사업 수행 계약 이행자로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정책의 공동 형성자로 대하며, 보다 적극적으로 다양한 주요 주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두 번째 그룹으로, 정당과 국회의 국제개발협력 정책 담당자들이다. 다가오는 대선에서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국제개발협력 정책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 글로벌 연대에 대한 시민의 관심은 한껏 높아졌다. 더 이상 국제개발협력 정책을 구색 맞추기 정도로 인식하고, 이전의 정책을 마치 ‘복사-붙여넣기’하듯 해서는 안 된다. 대선 과정에서 시민의 요구에 호응하고 정당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국제개발협력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특별히 더불어민주당에 제안한다. 대표가 중도보수를 표방했지만, 한국 사회에서 상대적 진보의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기업의 시장 진출을 위한 지원 수단과 같은 상업적 국익 추구를 노골적인 정책 기조로 설정하지 않아야 한다. 평화, 인권과 같은 보편적 인도주의적 가치 실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대북 정책과 사회복지 정책에서 그러했듯이, 국제개발협력 정책에서도 보수 정당과는 차별화된 접근을 보여 줘야 할 것이다.



역사의 반복과 소신 있는 한국 국제개발협력 정책


발전대안 피다는 국제개발협력이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기울면서 지구촌 약자들을 위한 협력은 줄어드는 현 시대의 경향은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 과거 지속적으로 늘던 공여국들의 ODA 규모는 1991년 냉전 종식 이후 1993년부터 1997년까지 급격히 축소된 바 있다. 서구 국가들의 공산주의 확산 억제 수단으로 사용되던 ODA가 냉전 종식으로 인해 그 용도를 상실하고, 선진국의 경기가 침체를 맞았으며, 원조 효과성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원조 피로 현상이 대두된 것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21세기를 앞두고 1996년 OECD DAC가 제시한 새로운 원조 정책 문서(Shaping the 21st Century: The Contribution of Development Co-operation)와 그에 따른 새천년개발목표(MDGs) 채택 준비 과정, 구 공산권 국가들의 체제 전환을 위한 원조 제공 증대, 보스니아 내전과 같은 냉전 이후의 분쟁에 따른 인도주의 원조 증대 등의 영향으로 1998년부터 ODA 규모는 다시 급증했다. 이러한 경향은 2001년 MDGs, 2016년 SDGs 등의 영향으로 오랜 기간 지속됐다.


2025년 현재 국제사회는 30여 년 전과 유사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구체적으로는 공여국들이 처한 정치적 측면의 안보 이슈(냉전 해체와 신냉전), 경제적 측면의 경기 침체, 그리고 사회적 측면의 공여국 내 정서적 반대(원조 피로도와 난민 이슈) 등이 유사하다. 그러나 우리는 국제사회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보편주의와 다자주의를 채택한 경험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한다. 트럼프와 트럼피즘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유럽의 위기는 해소될 것이다.


발전대안 피다는 한국 정당과 정부가 강대국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지 말고, 약자를 위한 글로벌 정의를 추구하기 위한 연대로서의 국제개발협력 정책을 수립하고 소신 있게 추진해 나갈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바로 억압의 시대를 이겨내고 민주주의를 성취해 낸 시민들의 뜻이다.



글쓴이: 한재광

발전대안 피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