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과 사람들두 번의 쿠데타를 지나, 다시 생각해 보는 연대로서의 국제개발협력 - 미얀마 파견 활동가 인터뷰

2025-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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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쿠데타를 지나, 다시 생각해 보는 연대로서의 국제개발협력


- 미얀마 파견 활동가 A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위기 속 국제개발협력의 가치와 공동체의 의미


지난 2024년 12월 3일의 비상계엄 선포는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다행히 계엄 해제와 탄핵, 정권 교체까지 무사히 완수해 내며 회복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국회 앞에 장갑차가 등장하고 총기로 무장한 특수부대가 맨몸의 민간인들과 대치를 하던 장면은 시민들의 뇌리에 지울 수 없는 상흔처럼 남았다. 그런데 이 순간을 해외에서 지켜본 이들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특히 쿠데타와 군부 독재 아래의 일상을 현장에서 몸으로 겪어 온 이에게, 한국의 그날은 어떠한 기시감을 남겼을까?

 

2021년 미얀마 쿠데타를 현지에서 직접 경험하고, 지금도 미얀마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인 활동가 A를 만났다. 두 나라에서 일어난 민주주의의 위기를 모두 겪은 그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와 국제개발협력, 그리고 연대의 의미에 대해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활동가의 요청에 따라 신상 정보 보호를 위해 본 인터뷰 내용에서 활동가의 신원 특정에 활용될 수 있을 만한 정보는 모두 배제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피움 독자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자기 소개를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대학생 때 처음으로 미얀마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된 걸 계기로 지금까지 계속 미얀마와 인연을 맺고 있는 활동가 A입니다.

 

 

최근 몇 달간 미얀마와 관련한 가장 큰 이슈는 지난 3월 발생한 규모 7.7의 강진이었어요. 혹시 직접 지진을 경험하셨나요?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3월 28일 대지진이 있기 약 2주쯤 전에도 한 번 진동이 있어서 대피를 한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크게 흔들리는 걸 체감하지 못했는데, 3월 28일에는 완전히 제대로 느꼈죠. 사무실에 있는 물건들도 막 흔들렸고요. 사실 놀라긴 했지만 처음에는 큰 피해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대피해서 대기하던 중에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가족들과 통화를 하면서, 지진이 생각보다 되게 멀리서까지도 느껴질 정도로 크게 났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재난이 일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운 상황일 텐데, 군부 치하에서 정보 통제가 일상화된 환경이라 더욱 공포가 크지는 않으셨나요?

 

저는 쿠데타 이전에도 미얀마에 있었는데요. 이미 그 당시에도 미얀마는 오랜 내전으로 인해 일부 국경 지역에서는 통신 제약이 있었고, 불안정한 전력 상황 때문에도 전반적인 통신 사정이 썩 좋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지진이 난 당일에도 일을 하러 가려고 준비를 하는데 핸드폰이 잘 안 터지길래 그냥 '또 이러네' 하고 말았죠. 그래서 통신 때문에 무섭다는 생각은 딱히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지진 때보다는 작년 12월 3일이 저는 더 무서웠죠.

 

 

한국에서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때요.

 

네. 오히려 여기서는 그게 일상적이어서 별 문제가 아니었는데, 한국에도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하니까 '그럼 일단 통신을 끊겠네, ATM기 같은 것도 다 막겠네'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국의 가족에게 전화를 했어요. 지금 당장 다 집으로 빨리 들어가고, 현금 찾고 물 사야 된다고요. 사실 저도 쿠데타라는 건 책으로만 접했던 세대잖아요. 그런데 저희 현지인 직원이나 파트너들은 이게 벌써 몇 번째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2021년 2월 1일에 미얀마 쿠데타가 일어나니까 대처 방법을 하나 하나 가르쳐 주더라고요. 계좌에 있는 돈은 다 현금으로 인출해라. 그 다음에 최소 1, 2주 이상 버틸 수 있는 식자재와 물을 사 놔라. 선전물 제작에 쓰인다고 오해 받을 수 있으니 프린터기, 복사기는 다 없애라. 이런 얘기들이 생각이 나서 저도 한국에 있는 가족한테 알려 준 거죠.

 

 

해외에서 지켜보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특히 감정이 복잡하셨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미얀마 얘기인 줄 알았어요. 그날 야근을 하고 있었는데 PC 카카오톡에 '쿠데타', '계엄' 이런 메시지들이 뜨더라고요. 그래서 '미얀마에 또 쿠데타가 났구나' 생각하고, 이전에 2021년 2월에 현지 파트너들이 이야기해 준 내용을 떠올리면서 일단 컴퓨터를 끄고 곧장 집으로 갔죠. 집에 가서 메시지 내용을 자세히 보니까 미얀마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거예요. 국회에 헬기가 떴다느니 하는 얘기가 올라오니까 너무 걱정이 됐고, 어쩔 줄 몰라서 친구와 통화하면서 울기도 했어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믿음도 있었어요. '우리가 해 냈던 것들, 만들어 왔던 것들이 있는데' 하는 그런 믿음.

  

  

그 믿음은 어디에 뿌리를 둔 것이었을까요?

 

시민들을 믿었던 것 같아요. 헬기가 뜨고 장갑차가 돌아다닌다는데 그걸 무서워하지 않고 어떻게든 가서 모여서 그걸 막아 낸 분들이 있었잖아요. 피로 만들어 냈던 역사,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다'는 말의 증명을 믿지 않았나 싶어요. 계엄군의 국회 침탈을 막기 위해 모였던 시민들뿐만 아니라 광장에 모였던 활동가들, 본인이 잘못된 행동을 하나라도 했을 때 미칠 파장을 알고 있던 군인들, 그리고 과거 본인들이 직접 싸우면서 친구와 동료가 사망하는 것을 보기도 했을, 그래서 사태의 엄중함을 알고 있는 국회의원들. 이런 사람들이 모였기에 함께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작은 나라에서 굉장한 비극들이 있었잖아요. 그걸 극복하는 과정에서 다져진 공동체 의식이 이번에 잘 드러났다고 생각해요.

 

 

(사진 출처: Unsplash의 Sung Jin Cho)

      


위기를 견디는 민주시민들의 힘

 

 

2021년 미얀마 쿠데타도, 12.3 비상계엄 사태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겪으셨는데요. 내가 애정을 가진 나라가 정치적 위기에 빠지는 것을 안에서 지켜보는 것과, 나의 모국이 유사한 위기를 겪어내는 것을 밖에서 지켜보는 건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2021년 2월 쿠데타 이후 현지인 친구와 활동가들이 시위를 조직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일들이 많이 있었어요. 당시 극초반에 군부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흉악범들을 석방하는 거였거든요. 그래서 안전 문제 등으로 현지인 활동가들이 아예 제 집에서 같이 지냈었어요. 그러면서 그런 과정들을 가까이에서 보게 됐죠. 그래서인지 한국의 상황을 보면서 제가 지금 여의도로 나갈 수 없다는 게 너무 아쉽고, 화가 나고 부끄러웠어요.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도, 2016년 박근혜 탄핵 시위 때도 저는 외국에 있었거든요. 마음에 빚이 있는 셈이죠.


그 와중에, 자기들은 어디 숨어서 지내면서 저한테 연락을 해서 안부를 묻는 현지인 활동가들이 있었어요. 너무 미안한 마음이었죠. 한국에 있는 미얀마 분들도 시위에 많이 참여하셨거든요. '자국의 쿠데타를 피해 갔더니 한국에서도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올라오는 걸 보면서 슬프고 창피했어요.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한국이 민주주의나 경제 발전의 영역에서 선도적인 국가, 모범 국가로 여겨지는 게 있었으니까요. 이런 부채감과 부끄러움이 있는데 이걸 누구와 터놓고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답답했어요. 아무튼 우리는 결과적으로 아무 사건 사고 없이 잘 마무리가 되었는데, 아직 어려운 여건에 있는 미얀마 친구들을 붙잡고 속상하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거였으니까요. 

 

 

미얀마의 시민들은 정치적 위기에 더해 최근의 자연재해(지진)까지 함께 겪으며 이중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니, 조심스러우실 수밖에 없는 입장이 이해가 갑니다. 혹시 이런 복합 위기 상황에 있어 현지의 시민사회 또는 지역사회가 대응하는 방식을 어떻게 보셨나요?

 

사실 미얀마는 이번 지진이 닥치기 전에도 다수의 크고 작은 자연재해들이 발생했고, 쿠데타와 같은 인적 재난도 처음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회복 능력이 생긴 것 같아요. 이번 지진 피해 지역들 중에는 2023년과 2024년에 홍수를 겪은 곳들도 많아서, 재해에 대응하기 위한 위원회나 소규모 마을 공동체 조직들도 구축이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서로 도우면서 어떻게든 헤쳐나가는 분위기가 자리 잡혀 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반복되는 재난과 위기로 인해 전반적인 무력감과 우울감이 깔려 있는 느낌이기는 합니다. 대도시에서는 사람들이 활동적으로 생활하면서 모여서 술도 마시고 그러는데, 그 기저에 깔린 기묘한 우울감이 있어요. 그런 걸 보면 마음이 어렵죠.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서로 잘 도닥이면서 극복해 내려는 모습이에요. 이번 지진을 계기로 쿠데타 이후 해외로 피신했던 활동가들이 굉장히 많이 돌아오기도 했고요. 그런 모습들이 인상 깊었죠.

  

 

비록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미얀마에서도 민주주의를 경험한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가 현재의 상황에 반응하는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보시나요?

 

저는 그게 지금 미얀마 쿠데타 이후 민주화를 위한 싸움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미얀마에서 총 네 번*의 쿠데타가 있었거든요. 2011년 민주화에 이어 나라가 개방이 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 제가 처음 미얀마에 봉사활동을 하러 왔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현지에 가면 주민들과 정치 얘기 하지 말라고 교육을 받았거든요. 통신사도 국영 기업 하나뿐이고, 인터넷도 아주 제한적으로만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봉사활동을 마치고 나서 시간이 좀 흐른 뒤에 다시 갔더니 몇 년 사이에 모바일 통신 가입자 수가 전체 인구 수를 넘어섰을 정도로, 굉장히 단시간 내에 자유로운 소통의 문화가 확산된 거예요. 그리고 당시의 청소년과 청년들이 그 자유를 맛보게 된 거죠. 이전의 세 번의 쿠데타에서는 저항이 이렇게 오래가지 않았어요. 2021년에도 처음에는 다들 그랬어요, 두 달 안 갈 거라고. 왜냐하면 과거엔 양곤 같은 대도시 정도에서 조직되었던 대중 시위나 학생 시위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대대적으로 전국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적이 없었거든요. 민주화 시기에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 내가 하는 말 한 마디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갈 수 있다는 걸 체험한 세대가, 2021년 2월 1일부터 굉장히 빠른 속도로 전국적으로 각 지역을 연결하면서 시위를 조직하고 지금까지 저항을 지속하고 있는 거예요. 저는 그 청년들의 힘이 크다고 생각해요.

 

(*주: 일반적으로 미얀마의 주요 쿠데타는 1962년, 1988년, 2021년 세 차례로 분류되지만, 활동가 A는 1997년 군부 내 권력 재편까지 포함해 네 차례로 언급했다.)

 

 

(사진 출처: Unsplash의 Gayatri Malhotra)

 
 

민주주의와 국제개발협력, 그리고 연대의 교훈

 

 

공여국과 수원국 모두 민주주의의 위기를 겪을 수 있다는 걸 목격하셨는데, 이것이 국제개발협력에는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보시나요?

 

우리나라의 국제개발협력 정책은 5년 동안의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일관성 있게 추진이 되는 시스템이 있잖아요. 그런데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새로운 방향의 정책을 추진하게 되면 기존 정책들과의 일관성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불안해지는 거죠. 사실상 12월부터 시스템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당장 지진 대응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어요. 시스템이 있다는 건 예측을 할 수 있다는 거고, 어떤 상황이 와도 이 일은 돌아간다는 신뢰가 있는 거라고 저는 정의하거든요. 그런데 민주주의의 위기로 시스템이 흔들리니까, 현장에서는 우리가 이러한 계획 아래에서 이런 걸 하겠다고 해 놓은 것들을 할 수 없게 된 거죠.

 

수원국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정부 자체가 공여국에서 민주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군정이면 ODA를 다이렉트로 지원할 수가 없어요. 민주적이지 않은 정부에 지원을 하면 그 지원이 제대로 주민들에게 가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있는 거잖아요. 민간 지원을 하고 싶어도 NGO가 들어오기도 어려워요, 비자가 안 나오니까. 그리고 같은 재난을 겪어도 시스템이 어느 정도 갖춰진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요. 당장 미얀마에서 지진이 났을 때 공식적으로 발표한 사망자 수만 봐도 그래요. 시스템상 제대로 집계를 할 수 없는데 정확한 지원을 하기는 어려운 거죠.

 

 

효율적 시스템, 그리고 책무성과 투명성을 담보해 주는 게 민주적 체계인데 그 담보가 사라진 상태에서는 효과적인 협력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국제개발협력이 민주주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민주주의의 발전 자체를 타겟팅하는 사업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저는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는 투명하게 작동하는 시스템, 그리고 평등한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라고 생각해요. 법령 정보나 행정과 관련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민주주의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어요.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그건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와 권리에 따른 것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다면 민주시민 의식 제고에 도움이 되겠죠. 

 

미얀마에서도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투표라는 것의 개념 자체를 이해를 못 하실 정도로 민주주의에 대한 문해력이 낮은 분들도 계세요. 몇 년 전에 어느 마을에서 활동을 할 때는 초반에는 여성들은 회의 참석도 못 하고 아무 목소리를 내지 못했어요. 그런데 '내 목소리와 너의 목소리는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는 것도 민주주의의 원칙이잖아요. 활동을 통해서 여성과 청년의 참여를 촉진하고, 젊은 여성 활동가가 회의를 주재하고 강의를 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면서 '여성도 참여하고 발언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생기면 그 또한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한국과 미얀마에서 각각 나타난 민주주의의 위기를 지켜보시면서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로서의 역할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시게 된 것이 있나요?

 

연대와 연결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들이 다른 나라와는 잘 연대하고 연결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국내 시민사회와는 연결도, 연대도 잘 안 하더라고요. 저는 이게 되게 안타깝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사실 과거에는 국내의 이슈들에 관심을 별로 갖지 않았었는데요. 제가 국내에서 미얀마와 연대하는 시위에 참여할 때 수많은 국내 시민사회 활동가분들이 함께해 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우리 시민사회가 좀 더 촘촘하게 연결하고 연대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저희는 국제개발협력에서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현지에 귀화를 해서 살거나 하지 않는 이상 언제나 계속 타인이고 외국인이잖아요. 그럼 결국 공여국인 본국에 돌아왔을 때는 이 파트너국의 상황을 알리고, 옹호하고, 정책을 만들어 내고, 펀드를 확보하는 일을 하는 게 저희의 역할인데, 이때 목소리를 같이 내 줄 수 있는 건 그 누구도 아닌 같은 시민사회 활동가들일 거란 말이죠. 

 

최근 ILO(국제노동기구)에서 미얀마 군부의 노동 인권 탄압에 대하여 제재를 가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는데요. 지금 이 순간에도 파업으로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미얀마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건 개발 NGO들이 아니라 한국의 봉제 노조와 시민단체들이에요.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로서 내가 활동하는 나라의 문제를 한국에 알리고자 할 때, 나 자신부터가 국내 시민사회의 다른 분야와 연대한 적이 없다면 다른 누가 내 편이 되어 주겠어요? 

 

 

마지막으로, 아직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지나고 있는 미얀마에서 활동을 하고 계신 입장에서 한국에 있는 동료 시민과 활동가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더 성숙하고 더 남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내 주변의 약자를 배려하고 돌볼 수 있을 때 그 돌봄이 확장되어서 국제개발협력까지 닿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장갑차를 막아서고 추운 날 여의도에서, 광화문에서, 남태령에서 시위를 했던 건 우리가 만들어 낸 이 시스템과 공동체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분명한 목적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잖아요. 그런데 그 공동체에는 장애인도 있고, 노숙자도 있고, 난민도 있고, 미등록 체류자도 있고, 이루 다 헤아려 말하지 못할 만큼 수많은 취약계층이 있어요.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그 공동체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한번만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말씀이네요. 그것이야말로 광장이 남긴 연대의 교훈이겠지요.

 

이 사람이 나랑 같이 여기서 경찰벽을 막아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우리가 저지해 낼 수 있었던 거잖아요. 내가 이 사람 편이 되어 줄 때 언젠가 이 사람이 내 편이 되어 줄 수 있다는 믿음, 그게 우리가 공동체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고, 우리가 지켜야 할 민주주의 아닐까요.



인터뷰 진행·정리: 김향지

발전대안 피다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