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꽃피는 발전, 그 꽃말은 '다양성'
'발전'이란 무엇인가. 국제개발협력에 몸담고 있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떠올려 보았을 질문이다. 국제개발협력의 역사에서 발전은 오랫동안 GDP나 HDI(인간개발지수) 같은 수치로 측정되어 왔지만, 아마티아 센은 1999년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발전을 '자유의 확장', 곧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을 선택하고 살아갈 실질적 자유를 넓혀가는 과정으로 정의했다. 도로가 놓이고 병원이 세워지는 것 자체가 발전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들에게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줄 때 비로소 발전이 된다는 것이다.
이 정의가 중요한 이유는 발전의 주어를 바꾸기 때문이다. 발전의 주체가 국가나 기관이 아니라 '사람'이 될 때, 발전은 외부에서 투입하고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피어나는 것이 된다. 발전대안 피다가 말하는 '사람이 꽃피는 발전'도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발전대안 피다가 정의하는 '사람이 꽃피는 발전'의 6대 요소
한국의 국제개발협력 NGO(이하 개발 NGO)들은 모금을 위해 TV, SNS, 유튜브 등 다양한 채널에서 광고를 집행한다. 이중 가장 '전통적인' 모금 채널이라고 할 수 있는 TV에 송출되는 모금광고를 살펴보면, 서로 대체로 비슷한 문법을 갖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주로 어두운 피부색의 아이가 등장하고, 무기력하고 슬픈 모습으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상태에 처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이미지들은 시청자의 감정을 단번에 끌어당기고, 후원 전화를 울리게 하는 데 효과적이다.
이런 광고가 전제하는 발전상은 명확하다. '저 사람들'은 (물질적) 결핍 속에 있고, '우리'가 도와야 한다. 발전은 '우리'로부터 '저들'에게로 흘러가는 것이며, 그 흐름의 정당성은 결핍과 비참함의 이미지가 보증한다. 그리고 그 결핍은 외부의 개입으로만 해소될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이때 결핍의 당사자로 묘사되는 이들은 자기 삶을 말하는 '발전의 주체'가 아니라, 발전이 아직 닿지 못한 장소의 '증거물'이 된다. 발전을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로 본다면, 사람을 그 변화의 주체가 아닌 상황의 부속물로 만드는 재현은 발전을 돕기는커녕 발전의 전제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025년, 발전대안 피다는 <국제개발협력 시민사회 인간존엄 모금문화 확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한 가지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모금광고에서 재현되는 사람들과 같은 나라, 같은 대륙에서 온 이들은 이 광고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한국의 국제개발협력에서 이 질문은 주되게 논의되지 않았다. 광고를 만드는 사람, 광고를 보는 사람, 광고를 분석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광고에 담기는 사람의 목소리는 부재했다. 피다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아프리카인 30명을 인터뷰하여 이 공백을 메우고자 했다.
한 사람, 한 공동체로서 존엄하게 재현된다는 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화들은 필연적으로 과연 무엇이 발전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누군가를 결핍의 증거물로 그린 이미지는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발전상을 전제하고 있다. 무엇이 모자란 상태인지를 판정하려면 무엇이 채워진 상태인지에 대한 기준이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존엄한 재현을 묻는 일은 무엇을 발전이라 부를지, 그리고 그것을 누가 정할지를 다시 묻지 않고는 완결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피다가 인터뷰에서 "당신에게 발전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것은, 발전을 정의하는 자리를 당사자에게 되돌리려는 시도였다. 그렇게 마이크가 건네졌을 때, 돌아온 것은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저마다의 자리에서 길어 올린 서로 다른 발전'들'이었다. 그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발전은 남과 비교하거나 좇는 일이 아니다
벤(가나)은 발전을 "매우 주관적인 것"이라고 규정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일정한 기간 안에 무엇을 원하는지를 스스로 정하고 그것을 이뤄내면 발전한 것이지, 굳이 다른 나라와 견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가나에 지진도 쓰나미도 없다는 점을 들며, "한국이 쓰나미 방어 시설을 지었으니 우리도 지어야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우선순위를 잘못 짚은 것"이라고 말했다.
란드리(부룬디)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서구의 방식을 보편으로 여기는 시선 자체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부룬디가 '세계 최빈국'으로 불리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며, "1인당 GDP가 가장 낮다는 이유로 한 나라를 가난하다고 부르는 것은 이상한 관점"이라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서구의 방식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았다. 고향에는 인터넷이나 전기, 텔레비전이 없어도 더없이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서구화된 세계는 그런 것이 없으면 비참하고 가난한 것이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는 발전을 매슬로의 욕구 단계처럼 한 계단씩 올라가는 과정으로 보면서도, 다른 문화를 자기 문화에 그대로 베껴 오는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어떤 것들은 발전의 길을 망가뜨리기도 한다"며 선을 그었다.
물론 모두가 같은 생각은 아니었다. 나비(가명, 탄자니아)는 "세상은 점점 더 발전할 것이고, 뒤처질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다만 단서를 달았다. 사람들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야 하며, 발전의 결과로 "사람들이 저마다 방 안에 홀로 갇히게"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발전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법을 잊는 부작용이 생기지 않도록 맞서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발전은 스스로 꿈꿀 수 있는 자유와 기회다
발전을 물자나 제도가 아니라 '할 수 있음'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들도 있었다.
아드리엘(르완다)에게 발전이란 다른 무엇보다도 '기회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 기회란 자기 삶에서 하고 싶은 것을 좇을 수 있다는 뜻이고, 그래서 그가 꼽은 핵심은 '꿈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기본적인 것조차 없는 곳에서 태어나면 늘 눈앞의 문제만 보여 꿈꾸기가 어렵지만, 그 사회의 아이들이 먹고살 걱정에 짓눌리지 않고 한가로이 큰 꿈을 꿀 수 있다면 그건 발전이 왔다는 신호"라고 말했다.
마이클(나이지리아)도 발전의 핵심을 '기회'에서 찾았다. 그는 "발전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며, 교육과 일과 존엄을 통해 충만한 삶을 살 기회를 열어 주지 못한다면 그건 발전이 아니라고 했다. "돈을 줘도 기회를 창출하지 못하면 그 돈은 곧 바닥난다"고도 덧붙였다.
스태니(부룬디)는 그 '할 수 있음'을 자율의 언어로 풀었다. 그는 발전이란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을 어떻게 살지 스스로 정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있는 수단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멋진 건물과 도로, 좋은 병원이 있어도 사람들이 자기 삶을 자율적으로 살 수 없다면 거기엔 발전이 없다"는 것이다.
일라이자(케냐)는 자율의 범위를 정치의 영역까지 넓혔다. 그는 발전의 의미를 생물학에서 설명하는 성장(growth)과 발달(development)의 구분에 비유했다. 성장은 크기와 형태가 커지는 양적 변화이고, 발달은 구조와 기능이 정교해지고 복잡해지는 질적 변화이다. 그는 이 구조적·질적 변화라는 정의를 사람과 사회의 단위로 그대로 옮겨, 발전 역시 경제와 사회는 물론 정치적 차원의 구조까지 가로지르는 변화라고 보았다. 내 나라의 일에 참여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투표할 수 있는 것, 나아가 "온라인에 뭔가를 올렸다고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잡아가려 하지 않는 것"까지가 그에게는 발전이었다.
발전은 비물질적 성장도 동반해야 한다
발전을 경제 지표 바깥에서 정의하려는 시도도 많았다.
장 루이(르완다)는 "많은 사람이 발전을 경제 성장이나 인프라, 돈으로만 이해한다"는 데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에게 발전은 삶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총체적으로 나아가는 일이었다. 그는 "사회적 삶, 경제적 삶, 인권, 그리고 서로의 존엄을 지키며 사는 것"까지를 발전의 범주에 넣었다.
한나(에티오피아)와 베테루얀(에티오피아) 역시 발전의 총체성에 주목했다. 사람들이 경제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지적·심리적 측면에서도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테루얀은 "한 사람이 경제적으로 발전하더라도 여전히 다른 어려움들을 겪는다면 발전의 가치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나는 이렇게 "사회를 이루는 여러 부분 중 어느 하나도 배제되지 않는" 총체적 발전이 이뤄진다는 것은 "공감할 줄 알고, 더 나은 내일을 꿈꿀 희망을 갖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L(가명, 코트디부아르)은 발전을 한국 생활에서 느낀 대비 속에서 풀어냈다. 고향에서는 가족만이 아니라 이웃끼리도 스스럼없이 돕고 또 도움을 청했는데, 한국에서는 길을 물어도 "시간 없어요"라는 답이 돌아오곤 했다는 것이다. 그는 누구나 감정이 있고 언젠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더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가 바라는 발전은 도시가 커지고 경제가 성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 같은 것도 함께 발전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물질적 토대를 향한 바람이 가벼이 여겨진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발전의 출발점은 여전히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도나시앙(르완다)은 자신이 자란 마을을 떠올리며, 농부들이 기계화된 방식으로 농사를 더 크게 지어 "많이 생산하고 팔아서 아이들을 키우고 가족이 행복하게 살 만큼" 벌 수 있는 모습이 곧 발전이라고 말했다.

AI 생성 이미지 (Canva AI)
발전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단단하게 반복된 생각은 발전은 바깥에서 완성된 형태로 건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데릭(우간다)은 발전을 "사람들이 자기 삶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바꿔 나가도록 힘을 실어 주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시간이 지나도 스스로 이어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가 거듭 강조한 원칙은 "발전은 우리가 가진 것에서 시작해야 하며, 당신이 가진 것에서 시작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목격했던 해외의 단체들은 현지 사람들이 무엇을 가졌고 무엇을 원하는지가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것과 자기들 생각을 들고 온다고 꼬집었다. "지속할 수 없는 큰일을 벌이기보다, 작아도 계속 이어 갈 수 있는 일을 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 그의 충고였다.
저스틴(부르키나파소)도 같은 지점을 가리켰다. 그는 "발전은 돈을 받아 음식을 사서 나눠 주는 게 아니"라며, 그 자리에 활동과 일자리를 만들어 사람들이 함께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인프라 하나도 비전을 갖고 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길 하나를 놓더라도 그것이 사람들의 수입과 사회적 삶을 어떻게 키워 줄 것인지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야닉(르완다)은 이 차이를 '도움'과 '협력'이라는 두 단어로 구분했다. 그는 "도움은 의존을 만들지만, 협력은 스스로 발전할 역량을 만든다"고 말했다. 협력의 목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고도 일어설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그는 외부 단체가 떠난 뒤에도 현지 단체가 그 일을 이어 갈 수 있도록, 돈뿐만 아니라 그 역량까지 함께 전달되어야 한다고 짚었다.
존(우간다)은 이 생각을 가장 멀리까지 밀고 갔다. 그에게 발전이란 "한 나라가 외부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설 수 있는 상태"였고, 개인의 발전 역시 외부 도움 없이 공동체와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가 그리는 '지속가능한 삶'은 소박했다. 이웃과 평화롭게 협력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건강하고, 먹을 것이 충분하며, 나아가 남까지 도울 수 있는 삶이 그것이었다. 그는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내게 충분하고 이웃과 나눌 수 있을 만큼이면 된다"고 했다.
한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건넸을 뿐인데, 돌아온 정의는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했다. 비슷한 관점에서 연결되는 것들도 있었지만, 더러는 서로 정면으로 어긋나기도 했다. 누군가는 물질적 토대를 말했고, 누군가는 그 너머의 존엄과 균형을 말했다. 누군가는 "남과 비교하지 말라"고 했고, 누군가는 "그래도 뒤처질 수는 없다"고 했다.
이 어긋남은 정리되어야 할 혼란이 아니다. 오히려 발전이라는 말이 애초에 하나의 정답으로 수렴될 수 없다는 증거에 가깝다. 모금광고는 '발전 = 결핍의 해소'라는 단일한 그림을 전제하지만, 정작 그 그림이 대유하고자 하는 대륙의 사람들은 발전을 훨씬 풍부하게 상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다양한 정의들에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의 공통된 기저가 있었다. 발전을 무엇이라 부르든, 사람들은 자신을 발전이 도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발전을 일구는 '주체'의 자리에 놓고 있었다. 꿈꿀 수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진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 사람은 발전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것. 발전과 존엄이 끝내 떼어질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사람이 꽃피는 발전'은 어쩌면 그 지점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어떤 발전이 옳은지를 누군가가 대신 정해 주는 데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저마다 그리는 발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끌어안는 데에서 말이다. 피다가 2025년에 만난 사람들은, 그 다양함이야말로 가장 먼저 존중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피움 구독자 설문 이벤트 🍀 사람이 꽃피는 발전을 위해 감시하고 연대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발전대안 피다는 '피움 매거진'을 통해 '발전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고민할 수 있는 다양한 글들을 약 4천 명의 구독자들과 나누어 왔습니다. 발전대안 피다가 첫 움직임을 시작한 지 스무 해가 된 지금, 구독자 여러분이 생각하는 발전은 무엇인지 의견을 들어보고, 모인 생각들을 후속 콘텐츠로 연결해 보려고 합니다. 참여해 주신 분들 중 선착순 50분께는 커피 기프티콘을 드리는 이벤트도 진행하니, 많이 참여해 주세요 ☕️ 설문 참여하기 |
글쓴이: 김향지
발전대안 피다 사무국장
사람이 꽃피는 발전, 그 꽃말은 '다양성'
'발전'이란 무엇인가. 국제개발협력에 몸담고 있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떠올려 보았을 질문이다. 국제개발협력의 역사에서 발전은 오랫동안 GDP나 HDI(인간개발지수) 같은 수치로 측정되어 왔지만, 아마티아 센은 1999년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발전을 '자유의 확장', 곧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을 선택하고 살아갈 실질적 자유를 넓혀가는 과정으로 정의했다. 도로가 놓이고 병원이 세워지는 것 자체가 발전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들에게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줄 때 비로소 발전이 된다는 것이다.
이 정의가 중요한 이유는 발전의 주어를 바꾸기 때문이다. 발전의 주체가 국가나 기관이 아니라 '사람'이 될 때, 발전은 외부에서 투입하고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피어나는 것이 된다. 발전대안 피다가 말하는 '사람이 꽃피는 발전'도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발전대안 피다가 정의하는 '사람이 꽃피는 발전'의 6대 요소
한국의 국제개발협력 NGO(이하 개발 NGO)들은 모금을 위해 TV, SNS, 유튜브 등 다양한 채널에서 광고를 집행한다. 이중 가장 '전통적인' 모금 채널이라고 할 수 있는 TV에 송출되는 모금광고를 살펴보면, 서로 대체로 비슷한 문법을 갖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주로 어두운 피부색의 아이가 등장하고, 무기력하고 슬픈 모습으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상태에 처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이미지들은 시청자의 감정을 단번에 끌어당기고, 후원 전화를 울리게 하는 데 효과적이다.
이런 광고가 전제하는 발전상은 명확하다. '저 사람들'은 (물질적) 결핍 속에 있고, '우리'가 도와야 한다. 발전은 '우리'로부터 '저들'에게로 흘러가는 것이며, 그 흐름의 정당성은 결핍과 비참함의 이미지가 보증한다. 그리고 그 결핍은 외부의 개입으로만 해소될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이때 결핍의 당사자로 묘사되는 이들은 자기 삶을 말하는 '발전의 주체'가 아니라, 발전이 아직 닿지 못한 장소의 '증거물'이 된다. 발전을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로 본다면, 사람을 그 변화의 주체가 아닌 상황의 부속물로 만드는 재현은 발전을 돕기는커녕 발전의 전제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025년, 발전대안 피다는 <국제개발협력 시민사회 인간존엄 모금문화 확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한 가지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모금광고에서 재현되는 사람들과 같은 나라, 같은 대륙에서 온 이들은 이 광고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한국의 국제개발협력에서 이 질문은 주되게 논의되지 않았다. 광고를 만드는 사람, 광고를 보는 사람, 광고를 분석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광고에 담기는 사람의 목소리는 부재했다. 피다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아프리카인 30명을 인터뷰하여 이 공백을 메우고자 했다.
한 사람, 한 공동체로서 존엄하게 재현된다는 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화들은 필연적으로 과연 무엇이 발전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누군가를 결핍의 증거물로 그린 이미지는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발전상을 전제하고 있다. 무엇이 모자란 상태인지를 판정하려면 무엇이 채워진 상태인지에 대한 기준이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존엄한 재현을 묻는 일은 무엇을 발전이라 부를지, 그리고 그것을 누가 정할지를 다시 묻지 않고는 완결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피다가 인터뷰에서 "당신에게 발전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것은, 발전을 정의하는 자리를 당사자에게 되돌리려는 시도였다. 그렇게 마이크가 건네졌을 때, 돌아온 것은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저마다의 자리에서 길어 올린 서로 다른 발전'들'이었다. 그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발전은 남과 비교하거나 좇는 일이 아니다
벤(가나)은 발전을 "매우 주관적인 것"이라고 규정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일정한 기간 안에 무엇을 원하는지를 스스로 정하고 그것을 이뤄내면 발전한 것이지, 굳이 다른 나라와 견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가나에 지진도 쓰나미도 없다는 점을 들며, "한국이 쓰나미 방어 시설을 지었으니 우리도 지어야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우선순위를 잘못 짚은 것"이라고 말했다.
란드리(부룬디)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서구의 방식을 보편으로 여기는 시선 자체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부룬디가 '세계 최빈국'으로 불리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며, "1인당 GDP가 가장 낮다는 이유로 한 나라를 가난하다고 부르는 것은 이상한 관점"이라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서구의 방식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았다. 고향에는 인터넷이나 전기, 텔레비전이 없어도 더없이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서구화된 세계는 그런 것이 없으면 비참하고 가난한 것이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는 발전을 매슬로의 욕구 단계처럼 한 계단씩 올라가는 과정으로 보면서도, 다른 문화를 자기 문화에 그대로 베껴 오는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어떤 것들은 발전의 길을 망가뜨리기도 한다"며 선을 그었다.
물론 모두가 같은 생각은 아니었다. 나비(가명, 탄자니아)는 "세상은 점점 더 발전할 것이고, 뒤처질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다만 단서를 달았다. 사람들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야 하며, 발전의 결과로 "사람들이 저마다 방 안에 홀로 갇히게"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발전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법을 잊는 부작용이 생기지 않도록 맞서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발전은 스스로 꿈꿀 수 있는 자유와 기회다
발전을 물자나 제도가 아니라 '할 수 있음'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들도 있었다.
아드리엘(르완다)에게 발전이란 다른 무엇보다도 '기회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 기회란 자기 삶에서 하고 싶은 것을 좇을 수 있다는 뜻이고, 그래서 그가 꼽은 핵심은 '꿈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기본적인 것조차 없는 곳에서 태어나면 늘 눈앞의 문제만 보여 꿈꾸기가 어렵지만, 그 사회의 아이들이 먹고살 걱정에 짓눌리지 않고 한가로이 큰 꿈을 꿀 수 있다면 그건 발전이 왔다는 신호"라고 말했다.
마이클(나이지리아)도 발전의 핵심을 '기회'에서 찾았다. 그는 "발전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며, 교육과 일과 존엄을 통해 충만한 삶을 살 기회를 열어 주지 못한다면 그건 발전이 아니라고 했다. "돈을 줘도 기회를 창출하지 못하면 그 돈은 곧 바닥난다"고도 덧붙였다.
스태니(부룬디)는 그 '할 수 있음'을 자율의 언어로 풀었다. 그는 발전이란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을 어떻게 살지 스스로 정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있는 수단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멋진 건물과 도로, 좋은 병원이 있어도 사람들이 자기 삶을 자율적으로 살 수 없다면 거기엔 발전이 없다"는 것이다.
일라이자(케냐)는 자율의 범위를 정치의 영역까지 넓혔다. 그는 발전의 의미를 생물학에서 설명하는 성장(growth)과 발달(development)의 구분에 비유했다. 성장은 크기와 형태가 커지는 양적 변화이고, 발달은 구조와 기능이 정교해지고 복잡해지는 질적 변화이다. 그는 이 구조적·질적 변화라는 정의를 사람과 사회의 단위로 그대로 옮겨, 발전 역시 경제와 사회는 물론 정치적 차원의 구조까지 가로지르는 변화라고 보았다. 내 나라의 일에 참여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투표할 수 있는 것, 나아가 "온라인에 뭔가를 올렸다고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잡아가려 하지 않는 것"까지가 그에게는 발전이었다.
발전은 비물질적 성장도 동반해야 한다
발전을 경제 지표 바깥에서 정의하려는 시도도 많았다.
장 루이(르완다)는 "많은 사람이 발전을 경제 성장이나 인프라, 돈으로만 이해한다"는 데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에게 발전은 삶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총체적으로 나아가는 일이었다. 그는 "사회적 삶, 경제적 삶, 인권, 그리고 서로의 존엄을 지키며 사는 것"까지를 발전의 범주에 넣었다.
한나(에티오피아)와 베테루얀(에티오피아) 역시 발전의 총체성에 주목했다. 사람들이 경제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지적·심리적 측면에서도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테루얀은 "한 사람이 경제적으로 발전하더라도 여전히 다른 어려움들을 겪는다면 발전의 가치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나는 이렇게 "사회를 이루는 여러 부분 중 어느 하나도 배제되지 않는" 총체적 발전이 이뤄진다는 것은 "공감할 줄 알고, 더 나은 내일을 꿈꿀 희망을 갖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L(가명, 코트디부아르)은 발전을 한국 생활에서 느낀 대비 속에서 풀어냈다. 고향에서는 가족만이 아니라 이웃끼리도 스스럼없이 돕고 또 도움을 청했는데, 한국에서는 길을 물어도 "시간 없어요"라는 답이 돌아오곤 했다는 것이다. 그는 누구나 감정이 있고 언젠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더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가 바라는 발전은 도시가 커지고 경제가 성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 같은 것도 함께 발전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물질적 토대를 향한 바람이 가벼이 여겨진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발전의 출발점은 여전히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도나시앙(르완다)은 자신이 자란 마을을 떠올리며, 농부들이 기계화된 방식으로 농사를 더 크게 지어 "많이 생산하고 팔아서 아이들을 키우고 가족이 행복하게 살 만큼" 벌 수 있는 모습이 곧 발전이라고 말했다.
AI 생성 이미지 (Canva AI)
발전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단단하게 반복된 생각은 발전은 바깥에서 완성된 형태로 건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데릭(우간다)은 발전을 "사람들이 자기 삶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바꿔 나가도록 힘을 실어 주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시간이 지나도 스스로 이어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가 거듭 강조한 원칙은 "발전은 우리가 가진 것에서 시작해야 하며, 당신이 가진 것에서 시작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목격했던 해외의 단체들은 현지 사람들이 무엇을 가졌고 무엇을 원하는지가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것과 자기들 생각을 들고 온다고 꼬집었다. "지속할 수 없는 큰일을 벌이기보다, 작아도 계속 이어 갈 수 있는 일을 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 그의 충고였다.
저스틴(부르키나파소)도 같은 지점을 가리켰다. 그는 "발전은 돈을 받아 음식을 사서 나눠 주는 게 아니"라며, 그 자리에 활동과 일자리를 만들어 사람들이 함께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인프라 하나도 비전을 갖고 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길 하나를 놓더라도 그것이 사람들의 수입과 사회적 삶을 어떻게 키워 줄 것인지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야닉(르완다)은 이 차이를 '도움'과 '협력'이라는 두 단어로 구분했다. 그는 "도움은 의존을 만들지만, 협력은 스스로 발전할 역량을 만든다"고 말했다. 협력의 목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고도 일어설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그는 외부 단체가 떠난 뒤에도 현지 단체가 그 일을 이어 갈 수 있도록, 돈뿐만 아니라 그 역량까지 함께 전달되어야 한다고 짚었다.
존(우간다)은 이 생각을 가장 멀리까지 밀고 갔다. 그에게 발전이란 "한 나라가 외부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설 수 있는 상태"였고, 개인의 발전 역시 외부 도움 없이 공동체와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가 그리는 '지속가능한 삶'은 소박했다. 이웃과 평화롭게 협력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건강하고, 먹을 것이 충분하며, 나아가 남까지 도울 수 있는 삶이 그것이었다. 그는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내게 충분하고 이웃과 나눌 수 있을 만큼이면 된다"고 했다.
한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건넸을 뿐인데, 돌아온 정의는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했다. 비슷한 관점에서 연결되는 것들도 있었지만, 더러는 서로 정면으로 어긋나기도 했다. 누군가는 물질적 토대를 말했고, 누군가는 그 너머의 존엄과 균형을 말했다. 누군가는 "남과 비교하지 말라"고 했고, 누군가는 "그래도 뒤처질 수는 없다"고 했다.
이 어긋남은 정리되어야 할 혼란이 아니다. 오히려 발전이라는 말이 애초에 하나의 정답으로 수렴될 수 없다는 증거에 가깝다. 모금광고는 '발전 = 결핍의 해소'라는 단일한 그림을 전제하지만, 정작 그 그림이 대유하고자 하는 대륙의 사람들은 발전을 훨씬 풍부하게 상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다양한 정의들에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의 공통된 기저가 있었다. 발전을 무엇이라 부르든, 사람들은 자신을 발전이 도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발전을 일구는 '주체'의 자리에 놓고 있었다. 꿈꿀 수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진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 사람은 발전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것. 발전과 존엄이 끝내 떼어질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사람이 꽃피는 발전'은 어쩌면 그 지점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어떤 발전이 옳은지를 누군가가 대신 정해 주는 데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저마다 그리는 발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끌어안는 데에서 말이다. 피다가 2025년에 만난 사람들은, 그 다양함이야말로 가장 먼저 존중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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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향지
발전대안 피다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