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금광고 너머, 우리가 듣지 않던 목소리들을 찾아서
1981년, 덴마크의 국제개발 활동가 요르겐 리스너(Jørgen Lissner)는 영국의 독립 시사지 <뉴 인터내셔널리스트(New Internationalist)>에 'Merchants of Misery(비참함의 상인들)'라는 글을 기고했다. 글에서 리스너는 원조 단체들이 굶주린 아이의 이미지를 모금 광고에 활용하는 행위가 '사회적 포르노그래피'에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고통이란 성(sexuality)만큼이나 섬세하고 깊이 개인적인 것인데, 사람들의 신체, 고통과 슬픔, 두려움을 마치 망원렌즈로 보듯 세세하고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라는 것이었다*. 이 글은 이후 '빈곤포르노(poverty pornography)'라는 용어의 기원이 되었다.
약 45년이 흐른 지금, 한국의 미디어에서는 80년대 리스너가 비판했던 장면들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2014년 KCOC가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한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발표했지만 구속력은 없었고, 2022년에는 대통령 영부인이 캄보디아에서 심장병 소년을 품에 안고 찍은 사진이 '빈곤포르노' 논란의 한가운데에 서면서 이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동안 자정 노력이 있는 듯했으나, 빈곤과 고통을 단순화하고 말초적으로 재현하는 내러티브를 담은 모금 광고는 여전히 TV나 유튜브, SNS 등 여러 채널들에서 발견되고 있다.
* Lissner, "Merchants of Misery," New Internationalist, June 1981. https://newint.org/features/1981/06/01/merchants-of-misery (접속일: 2026. 3. 3.).

이미지 출처: New Internationalist 웹사이트 (리스너의 글이 실린 1981년 6월호 표지)
발전대안 피다에게 이 문제는 어제오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전신인 ODA Watch 시절부터 '빈곤포르노' 이슈를 꾸준히 다뤄 왔다. 2011년에는 청년활동가 그룹의 주도로 '기부 플러스 알파 운동'을 펼쳐 기부자의 책무성을 주창했고, 2015년부터 2017년까지는 시민현장감시단을 꾸려 캄보디아, 르완다, 네팔의 개발협력 사업 현장을 방문하면서 현지 주민들이 한국의 모금 광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직접 청취했다. 2018년에는 토크콘서트를 통해 개발 NGO 모금 담당자 및 기자와 함께 대안적 홍보 방향을 논의했고, 2021년에는 전·현직 모금 실무자들이 '인권과 모금 사이'의 딜레마를 토의하는 자리를 열었다. 같은 해 열린 사진전 '삶이 흐르는 강 MEKONG'에서는 개발도상국 주민을 바라보는 수평적 시선의 가능성을 시각적으로 제시했다. 2023년에는 국제개발협력 청년 활동가 커뮤니티 공적인사적모임의 빈곤포르노 대응 유닛 '빈포선셋'과 공동으로 '빈곤포르노' 이슈를 토론하는 포럼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처럼 오랜 기간 이 의제를 다뤄 온 피다는, 단발성 문제 제기의 방식으로는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2024년부터 2026년까지의 3개년에 걸쳐 진행되는 '국제개발협력 NGO 인간존엄 모금문화 확산' 프로젝트를 설계했다. (재)바보의나눔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는 이 사업은 1차년도에 모금 광고의 현황 분석과 제작 생태계 조사를, 2차년도에 당사자 인터뷰와 다큐멘터리 제작을, 3차년도에 인간존엄 모금광고 가이드라인을 개발하고 공모전을 추진하는 구조로 짜여졌다.
왜 아프리카였나
본래 이 프로젝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을 골고루 포함할 계획이었다. 2023년 사업 구상 단계에서는 아프리카 3개국, 아시아 2개국 정도를 포함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2024년 1차년도 연구를 통해 2022년에서 2023년 사이 방영된 국제개발협력 NGO의 TV 모금 광고 60여 편을 분석한 결과, 아시아는 긴급구호가 아닌 이상 모금 광고에서 지원 대상 지역으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아프리카가 글로벌 빈곤의 얼굴로 고착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2차년도 인터뷰에서는 아프리카에 집중하기로 방향을 수정했다.

이미지 출처: <모금의 안과 밖, 그리고 사이: 한국 국제개발협력 NGO의 TV 모금 캠페인 연구> (발전대안 피다, 2024, p.34)
11개국 30명의 목소리를 찾아서
2025년 7월부터 9월까지 진행된 인터뷰에는 총 30명이 참여했다. 국내에 거주하는 아프리카 출신 이주민 22명과 아프리카 현지 주민 8명이었다. 참여자들의 출신 국가는 가나, 나이지리아, 르완다, 부룬디, 부르키나파소, 에티오피아, 우간다, 카메룬, 케냐, 코트디부아르, 탄자니아 등 11개국이었다.
섭외 과정에서는 동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의 균형, 성별 균형, 직업과 배경의 다양성 등을 고려했다. 국내 참여자들의 경우 서울뿐 아니라 경기, 인천, 대전, 대구, 부산, 강원도 춘천과 평창까지 전국 각지를 방문하여 인터뷰를 진행했다. 비대면을 선호하는 참여자들은 화상 회의로 만났다. 성별 비율은 12대 18로 남성이 다소 많았지만, 영상 편집 과정에서 분량을 조절하여 균형을 맞추려 했다.
현지 인터뷰는 피다가 직접 방문하는 대신, 현지의 사정을 잘 아는 한국인 활동가들이 코디네이터로 참여하는 방식을 택했다. 르완다, 탄자니아, 나이지리아, 우간다 등 네 곳에서 대면 인터뷰가 진행되었고, 코트디부아르에서는 비대면으로 한 명이 참여했다. 이러한 방식은 예산의 한계를 고려한 것이기도 했지만, 어느 한 나라만 방문하면 그 나라가 아프리카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선택이기도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들
인터뷰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예상했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피다는 TV 모금 광고 또는 온라인 모금 광고를 상정하고 질문지를 구성했으나, 국내 참여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거리 모금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버스를 타러 가다가 거리 모금 캠페이너가 다가와 아프리카를 돕기 위한 모금을 하고 있다며 자료를 보여 줬다는 이야기, 사는 동네의 시장에 갔다가 굶주려 보이는 아이의 사진에 스티커를 붙이게 하는 캠페인을 보았다는 이야기 등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의 편견에 관한 이야기도 쏟아졌다. 출신 국가를 말하면 물이 있는지, 전기가 있는지, 인터넷이 있는지 묻는 질문부터, 길에 사자가 돌아다니느냐는 말까지. 한 참여자는 대학교 교수에게 '고향에서 하루에 밥을 몇 번 먹었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했다. 다른 나라의 식문화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 아닌, '그 나라 사람은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질문이었다.
모금 광고에 대한 이야기가 메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가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가 종합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반복되던 키워드, 존엄과 균형
흥미롭게도, 사업의 제목은 '인간 존엄'을 명시하고 있었지만, '존엄'이라는 단어 자체는 질문지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인터뷰이들이 먼저 이 단어를 꺼냈다. 존엄이 필요하다, 존엄이 중요하다, 핵심은 존엄이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 키워드를 계기로, 피다는 존엄의 정의를 묻기 시작했다. 참여자들이 말하는 존엄의 의미는 다양했지만, 공통적으로 '존중'이 가장 많이 언급되었다.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를 인용한 이도 있었고, 정체성의 관점에서 접근한 이도 있었다.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것, 내가 나로서 마땅하게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맥락의 이야기들이 나왔다.
대안에 대해서도 참여자들은 각자의 생각을 내놓았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해법이 있었다면 이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을 것이라는 인식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최소한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겠다'는 제안들이 이어졌다. 여러 참여자에게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키워드는 '균형'이었다.
영상에는 영상으로
피다가 이 프로젝트에서 영상이라는 도구를 선택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문제 삼고 있는 모금 광고 자체가 비주얼 콘텐츠인 만큼, 그에 대한 응답 역시 비주얼 콘텐츠로 구현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정된 예산으로 전문 촬영팀을 고용할 수는 없어, 국내에서는 사업 담당자가 태블릿과 스마트폰으로, 현지에서는 각국 코디네이터들이 각자 가진 스마트폰이나 카메라를 사용해 직접 인터뷰 촬영을 진행했다. 국내에서 진행한 인터뷰는 건당 최소 1시간 반에서 최대 2시간에 이르렀고, 국내와 현지 인터뷰를 합산하면 전체 소스 분량은 40~50시간에 달했다. 이를 텍스트로 전사하고, 활용 가능한 부분을 선별하고, 타임스탬프를 맞추고, 서사 구조를 설계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올해 피다 활동회원 중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진 세 명이 활동팀으로 참여했는데, 프로젝트 초반 인터뷰 질문지 기획부터 소스 정리, 영상 스크립트 구성 등 전반적인 과정에서 작업을 분담했다.
참여자들의 초상과 음성 활용 범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을 따랐다. 얼굴과 목소리를 모두 공개하는 것부터 음성만 녹음하는 것까지 다양한 수준의 동의가 이루어졌다. 카메라를 켜지 않기로 한 참여자, 처음에는 동의했으나 현장에서 카메라 앞이 불편하다고 하여 음성만 녹음한 참여자도 있었다. 영상인데 화면이 없는 구간을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는 제작 과정에서 가장 큰 고민 중 하나였다. 일러스트나 추상적 시각 요소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며 참여자의 동의 범위를 존중하면서도 시각적으로 지루하지 않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70분의 다큐멘터리, 그리고 인터뷰집
이렇게 완성된 다큐멘터리 <Africa Is Not This: 재현과 존엄을 말하는 11개국 30명의 목소리>는 70분이 넘는 분량이 되었다. 2025년 12월 18일 서울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에서 첫 공개 상영회가 열렸고, 이틀 뒤인 20일에는 부산에서 지역 대학생들과 함께하는 상영회가 이어졌다.
영상과 함께 인터뷰집 <그런 곳이라는 시선 너머>도 제작되었다. 현실적인 제약으로 70분의 영상에도 담기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인터뷰집은 영상이 시각적 장면과 서사 구조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면, 그 과정에서 미처 담지 못한 발언과 맥락을 글로 기록하기 위해 엮은 결과물이었다.
이 두 기록은 하나의 결론을 제시하지 않았다. 무엇이 옳은 모금 광고인지, 어떤 표현이 정답인지 말하지 않았다. 서로 닮은 경험이 있어도 같은 장면을 두고 각자가 붙이는 이름과 의미는 달랐다. 그 차이를 피다는 정리의 부족이 아닌, '삶은 본래 하나의 서사로 묶이지 않는다'는 사실의 확인으로 남겨두었다.
대안의 가능성을 확인할 3차년도를 향해
피다의 인간존엄 모금문화 애드보커시 프로젝트는 2026년 3차년도에 진입한다. 1차년도에 현황을 파악하고, 2차년도에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3차년도에는 대안의 실천을 구체화하는 단계다. 인간존엄을 지키는 모금 콘텐츠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실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인간존엄 모금 광고 가이드라인 개발 및 모금 광고 스토리보드 공모전이 예정되어 있다.
이 프로젝트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모금 광고의 외형적 개선이나 절차적 정의에 머무르지 않는다. 모금의 방식이 기부금을 모으는 기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타인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지를 드러내는 지표이기도 하다는 것. 그리고 그 관계의 양태는 한 사회가 '발전'을 무엇으로 정의하는지, 공동체로서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와도 맞닿아 있다는 것. 2025년 피다가 찾아 나섰던 30명의 목소리는 바로 그 물음 앞에 한국의 시민들과 NGO들을 다시 세운다.
글쓴이: 김향지
발전대안 피다 사무국장
▪︎ 애드보커시 필름 <Africa Is Not This: 재현과 존엄을 말하는 11개국 30명의 목소리> 유튜브 링크 ▪︎ 인터뷰집 <그런 곳이라는 시선 너머> 다운로드 링크 |
모금광고 너머, 우리가 듣지 않던 목소리들을 찾아서
1981년, 덴마크의 국제개발 활동가 요르겐 리스너(Jørgen Lissner)는 영국의 독립 시사지 <뉴 인터내셔널리스트(New Internationalist)>에 'Merchants of Misery(비참함의 상인들)'라는 글을 기고했다. 글에서 리스너는 원조 단체들이 굶주린 아이의 이미지를 모금 광고에 활용하는 행위가 '사회적 포르노그래피'에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고통이란 성(sexuality)만큼이나 섬세하고 깊이 개인적인 것인데, 사람들의 신체, 고통과 슬픔, 두려움을 마치 망원렌즈로 보듯 세세하고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라는 것이었다*. 이 글은 이후 '빈곤포르노(poverty pornography)'라는 용어의 기원이 되었다.
약 45년이 흐른 지금, 한국의 미디어에서는 80년대 리스너가 비판했던 장면들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2014년 KCOC가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한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발표했지만 구속력은 없었고, 2022년에는 대통령 영부인이 캄보디아에서 심장병 소년을 품에 안고 찍은 사진이 '빈곤포르노' 논란의 한가운데에 서면서 이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동안 자정 노력이 있는 듯했으나, 빈곤과 고통을 단순화하고 말초적으로 재현하는 내러티브를 담은 모금 광고는 여전히 TV나 유튜브, SNS 등 여러 채널들에서 발견되고 있다.
* Lissner, "Merchants of Misery," New Internationalist, June 1981. https://newint.org/features/1981/06/01/merchants-of-misery (접속일: 2026. 3. 3.).
이미지 출처: New Internationalist 웹사이트 (리스너의 글이 실린 1981년 6월호 표지)
발전대안 피다에게 이 문제는 어제오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전신인 ODA Watch 시절부터 '빈곤포르노' 이슈를 꾸준히 다뤄 왔다. 2011년에는 청년활동가 그룹의 주도로 '기부 플러스 알파 운동'을 펼쳐 기부자의 책무성을 주창했고, 2015년부터 2017년까지는 시민현장감시단을 꾸려 캄보디아, 르완다, 네팔의 개발협력 사업 현장을 방문하면서 현지 주민들이 한국의 모금 광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직접 청취했다. 2018년에는 토크콘서트를 통해 개발 NGO 모금 담당자 및 기자와 함께 대안적 홍보 방향을 논의했고, 2021년에는 전·현직 모금 실무자들이 '인권과 모금 사이'의 딜레마를 토의하는 자리를 열었다. 같은 해 열린 사진전 '삶이 흐르는 강 MEKONG'에서는 개발도상국 주민을 바라보는 수평적 시선의 가능성을 시각적으로 제시했다. 2023년에는 국제개발협력 청년 활동가 커뮤니티 공적인사적모임의 빈곤포르노 대응 유닛 '빈포선셋'과 공동으로 '빈곤포르노' 이슈를 토론하는 포럼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처럼 오랜 기간 이 의제를 다뤄 온 피다는, 단발성 문제 제기의 방식으로는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2024년부터 2026년까지의 3개년에 걸쳐 진행되는 '국제개발협력 NGO 인간존엄 모금문화 확산' 프로젝트를 설계했다. (재)바보의나눔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는 이 사업은 1차년도에 모금 광고의 현황 분석과 제작 생태계 조사를, 2차년도에 당사자 인터뷰와 다큐멘터리 제작을, 3차년도에 인간존엄 모금광고 가이드라인을 개발하고 공모전을 추진하는 구조로 짜여졌다.
왜 아프리카였나
본래 이 프로젝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을 골고루 포함할 계획이었다. 2023년 사업 구상 단계에서는 아프리카 3개국, 아시아 2개국 정도를 포함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2024년 1차년도 연구를 통해 2022년에서 2023년 사이 방영된 국제개발협력 NGO의 TV 모금 광고 60여 편을 분석한 결과, 아시아는 긴급구호가 아닌 이상 모금 광고에서 지원 대상 지역으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아프리카가 글로벌 빈곤의 얼굴로 고착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2차년도 인터뷰에서는 아프리카에 집중하기로 방향을 수정했다.
이미지 출처: <모금의 안과 밖, 그리고 사이: 한국 국제개발협력 NGO의 TV 모금 캠페인 연구> (발전대안 피다, 2024, p.34)
11개국 30명의 목소리를 찾아서
2025년 7월부터 9월까지 진행된 인터뷰에는 총 30명이 참여했다. 국내에 거주하는 아프리카 출신 이주민 22명과 아프리카 현지 주민 8명이었다. 참여자들의 출신 국가는 가나, 나이지리아, 르완다, 부룬디, 부르키나파소, 에티오피아, 우간다, 카메룬, 케냐, 코트디부아르, 탄자니아 등 11개국이었다.
섭외 과정에서는 동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의 균형, 성별 균형, 직업과 배경의 다양성 등을 고려했다. 국내 참여자들의 경우 서울뿐 아니라 경기, 인천, 대전, 대구, 부산, 강원도 춘천과 평창까지 전국 각지를 방문하여 인터뷰를 진행했다. 비대면을 선호하는 참여자들은 화상 회의로 만났다. 성별 비율은 12대 18로 남성이 다소 많았지만, 영상 편집 과정에서 분량을 조절하여 균형을 맞추려 했다.
현지 인터뷰는 피다가 직접 방문하는 대신, 현지의 사정을 잘 아는 한국인 활동가들이 코디네이터로 참여하는 방식을 택했다. 르완다, 탄자니아, 나이지리아, 우간다 등 네 곳에서 대면 인터뷰가 진행되었고, 코트디부아르에서는 비대면으로 한 명이 참여했다. 이러한 방식은 예산의 한계를 고려한 것이기도 했지만, 어느 한 나라만 방문하면 그 나라가 아프리카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선택이기도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들
인터뷰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예상했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피다는 TV 모금 광고 또는 온라인 모금 광고를 상정하고 질문지를 구성했으나, 국내 참여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거리 모금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버스를 타러 가다가 거리 모금 캠페이너가 다가와 아프리카를 돕기 위한 모금을 하고 있다며 자료를 보여 줬다는 이야기, 사는 동네의 시장에 갔다가 굶주려 보이는 아이의 사진에 스티커를 붙이게 하는 캠페인을 보았다는 이야기 등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의 편견에 관한 이야기도 쏟아졌다. 출신 국가를 말하면 물이 있는지, 전기가 있는지, 인터넷이 있는지 묻는 질문부터, 길에 사자가 돌아다니느냐는 말까지. 한 참여자는 대학교 교수에게 '고향에서 하루에 밥을 몇 번 먹었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했다. 다른 나라의 식문화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 아닌, '그 나라 사람은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질문이었다.
모금 광고에 대한 이야기가 메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가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가 종합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반복되던 키워드, 존엄과 균형
흥미롭게도, 사업의 제목은 '인간 존엄'을 명시하고 있었지만, '존엄'이라는 단어 자체는 질문지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인터뷰이들이 먼저 이 단어를 꺼냈다. 존엄이 필요하다, 존엄이 중요하다, 핵심은 존엄이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 키워드를 계기로, 피다는 존엄의 정의를 묻기 시작했다. 참여자들이 말하는 존엄의 의미는 다양했지만, 공통적으로 '존중'이 가장 많이 언급되었다.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를 인용한 이도 있었고, 정체성의 관점에서 접근한 이도 있었다.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것, 내가 나로서 마땅하게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맥락의 이야기들이 나왔다.
대안에 대해서도 참여자들은 각자의 생각을 내놓았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해법이 있었다면 이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을 것이라는 인식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최소한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겠다'는 제안들이 이어졌다. 여러 참여자에게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키워드는 '균형'이었다.
영상에는 영상으로
피다가 이 프로젝트에서 영상이라는 도구를 선택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문제 삼고 있는 모금 광고 자체가 비주얼 콘텐츠인 만큼, 그에 대한 응답 역시 비주얼 콘텐츠로 구현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정된 예산으로 전문 촬영팀을 고용할 수는 없어, 국내에서는 사업 담당자가 태블릿과 스마트폰으로, 현지에서는 각국 코디네이터들이 각자 가진 스마트폰이나 카메라를 사용해 직접 인터뷰 촬영을 진행했다. 국내에서 진행한 인터뷰는 건당 최소 1시간 반에서 최대 2시간에 이르렀고, 국내와 현지 인터뷰를 합산하면 전체 소스 분량은 40~50시간에 달했다. 이를 텍스트로 전사하고, 활용 가능한 부분을 선별하고, 타임스탬프를 맞추고, 서사 구조를 설계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올해 피다 활동회원 중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진 세 명이 활동팀으로 참여했는데, 프로젝트 초반 인터뷰 질문지 기획부터 소스 정리, 영상 스크립트 구성 등 전반적인 과정에서 작업을 분담했다.
참여자들의 초상과 음성 활용 범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을 따랐다. 얼굴과 목소리를 모두 공개하는 것부터 음성만 녹음하는 것까지 다양한 수준의 동의가 이루어졌다. 카메라를 켜지 않기로 한 참여자, 처음에는 동의했으나 현장에서 카메라 앞이 불편하다고 하여 음성만 녹음한 참여자도 있었다. 영상인데 화면이 없는 구간을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는 제작 과정에서 가장 큰 고민 중 하나였다. 일러스트나 추상적 시각 요소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며 참여자의 동의 범위를 존중하면서도 시각적으로 지루하지 않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70분의 다큐멘터리, 그리고 인터뷰집
이렇게 완성된 다큐멘터리 <Africa Is Not This: 재현과 존엄을 말하는 11개국 30명의 목소리>는 70분이 넘는 분량이 되었다. 2025년 12월 18일 서울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에서 첫 공개 상영회가 열렸고, 이틀 뒤인 20일에는 부산에서 지역 대학생들과 함께하는 상영회가 이어졌다.
영상과 함께 인터뷰집 <그런 곳이라는 시선 너머>도 제작되었다. 현실적인 제약으로 70분의 영상에도 담기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인터뷰집은 영상이 시각적 장면과 서사 구조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면, 그 과정에서 미처 담지 못한 발언과 맥락을 글로 기록하기 위해 엮은 결과물이었다.
이 두 기록은 하나의 결론을 제시하지 않았다. 무엇이 옳은 모금 광고인지, 어떤 표현이 정답인지 말하지 않았다. 서로 닮은 경험이 있어도 같은 장면을 두고 각자가 붙이는 이름과 의미는 달랐다. 그 차이를 피다는 정리의 부족이 아닌, '삶은 본래 하나의 서사로 묶이지 않는다'는 사실의 확인으로 남겨두었다.
대안의 가능성을 확인할 3차년도를 향해
피다의 인간존엄 모금문화 애드보커시 프로젝트는 2026년 3차년도에 진입한다. 1차년도에 현황을 파악하고, 2차년도에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3차년도에는 대안의 실천을 구체화하는 단계다. 인간존엄을 지키는 모금 콘텐츠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실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인간존엄 모금 광고 가이드라인 개발 및 모금 광고 스토리보드 공모전이 예정되어 있다.
이 프로젝트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모금 광고의 외형적 개선이나 절차적 정의에 머무르지 않는다. 모금의 방식이 기부금을 모으는 기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타인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지를 드러내는 지표이기도 하다는 것. 그리고 그 관계의 양태는 한 사회가 '발전'을 무엇으로 정의하는지, 공동체로서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와도 맞닿아 있다는 것. 2025년 피다가 찾아 나섰던 30명의 목소리는 바로 그 물음 앞에 한국의 시민들과 NGO들을 다시 세운다.
글쓴이: 김향지
발전대안 피다 사무국장
▪︎ 인터뷰집 <그런 곳이라는 시선 너머> 다운로드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