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과 사람들[5호] 미얀마 ‘띨라와 경제특구(Thilawa Special Economic Zone)’와 이주민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2018-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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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띨라와 경제특구(Thilawa Special Economic Zone)’와 

이주민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대학원에서 동남아시아학(지역학)을 공부하고 있는 필자는 논문 연구를 위해 지난 1월 초부터 2월 말까지 총 두 달간 미얀마 양곤으로 현지조사를 다녀왔다. 필자는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새 정부 출범 후 미얀마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 문화적 변화에 관심을 가져왔는데, 그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해외직접투자(FDI, Foreign Direct Investment) 유치의 확대와 그로 인한 급속한 경제 성장이었다. 2011년 취임한 떼인 세인(Thein Sein) 정부가 이미 반부패, 환율, 외환 투자법 및 관세 등에 대한 개혁을 시작했고, 2009-2011년 3억 달러 규모였던 해외투자가 2010-2011년에는 200억 달러로 엄청난 경제성장을 거두었다.[1] 또한 향후 2030년까지 미얀마의 경제성장 규모는 4배 이상 될 것이라고 기대[2]되고 있다.


▲ 미얀마 띨리와 경제특구 정문 ⓒ송유림


그러나 위와 같은 이유로 미얀마를 ‘기회의 땅’으로 보는 시선과 더불어 등장한 것이 그 기회의 땅에서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미얀마 경제성장의 첨병이라고 볼 수 있는 경제특구 건설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그 대표적 예인데, 도로, 철도, 항만 등 각종 인프라와 공장 건설로 인해 강제이주하게 된 경우가 다수였다. 미얀마는 현재 양곤 인근 띨라와(Thilawa), 서부 해안 짜욱퓨(Kyauk Phyu), 남부 해안 다웨이(Dawei)에 총 세 개의 경제특구를 건설하고 있다. 이 중 띨라와 경제특구는 이미 지난 2016년 10월 개관식을 하고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강제이주 후 변화된 환경에서 녹록지 않은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 이주민과 곧 이주 예정인 주민들의 우려가 이미 많은 매체를 통해 알려져 있다. 때문에 필자는 미얀마와 일본 정부의 합작 투자로 건설하고 있는 띨라와 경제특구(Thilawa Special Economic Zone, TSEZ)의 이주민들을 직접 만나 이주 과정과 이주 후의 삶에 대해 들어보며, 급속한 경제성장의 이면을 알리고자 했다. 본 사례는 미얀마 최초의 경제특구라는 점에서 나머지 두 개의 경제특구 또는 미얀마의 경제개발 프로젝트 전체를 비춰보기 좋은 사례라고 생각하며, 거대 자본의 힘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고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1. 띨라와 경제특구에 대하여


영국 식민시대에 원유를 추출하는 곳이었던 이 지역에는 총 6개의 마을(Thilawa, Phayagone, Alwan Sut, Tatyargone, Thida Myaing, Phalam)이 있지만 띨라와 항구 건설로 가장 유명해진 이름인 ‘띨라와’로 불린다.


띨라와 경제특구는 양곤시로부터 남동쪽으로 23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경제특구 인근에 미얀마 수출입 물동량의 85%를 차지하는 띨라와 항구가 위치해 있다. 띨라와가 이렇게 특별경제구역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지경학적(Geoeconomics) 특수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지경학이란 지구화된 시장 논리, 관국가적(transnational) 행위자들(기업, 비영리 단체, 국가) 그리고 자본, 상품, 인간 흐름의 네트워크 지리에 의한 국제적 공간의 재교정을 강조[3]하는 것이다. 즉 미얀마 자체가 중국, 인도, 태국을 삼각 구도로 끼고 있는 형상이고, 띨라와는 인도양과 합쳐지는 양곤강 하류에 위치하는 데다가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의 이동이 용이하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시장이 원하는 곳’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 띨라와 경제특구의 위치 ⓒThilawa Resettlement


띨라와 경제특구는 2013년 10월 29일 미얀마와 일본 간의 JV 협약(51:49)에 따라 공식적으로 사업이 시작됐으며, 2014년 1월 2400ha의 부지에 착공했고, 2015년 중순경 Area A 지역(396 ha/ <그림 1> 참조) 1단계 공사가 마무리돼 공장 가동을 예상했으나 공사가 지연되면서 2016년 10월 문을 열었다. Area A 지역은 다시 224ha의 1단계 사업 지역과 172ha의 2단계 사업 지역으로 구분되며, 1단계 사업 지역은 다시 189ha의 산업공단 지역과 35ha의 거주 및 상업지역으로 구분된다.


띨라와 경제특구 개발사인 Myanmar Japan Thilawa Development ltd(이하 MJTD)의 지분은 띨라와 경제특구의 투자자 일본과 미얀마가 공동으로 갖고 있으며 구조는 아래와 같다. 일본은 띨라와 경제특구 이후 현재 미얀마 서남부 해안에 조성중인 다웨이 경제특구(Dawei Special Economic Zone)에도 3년간 7천 500엔(한화 약6조 8천억) 규모의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밝혀 미얀마 최대의 해외 투자자로 불리고 있다. 띨라와 경제특구의 투자 규모 상 일본과 미얀마는 각각 51%와 49%의 거의 비슷한 지분을 갖고 있지만, 이주·정착 문제에 관해서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반영해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은 JICA 전문가팀(expert team)이 전담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 측의 결정 사항이 주민들의 일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표 1> 띨라와 SEZ 개발사 MJTD 의 지분구조

 *출처: 고성민, “미얀마, 띨라와 경제특구 최근 동향”, 코트라 양곤무역관, 2014.11.05


2. 띨라와에서 먀잉따야로


이 지역에는 총 6개의 마을이 있는데 이 중 Area A에 속하는 일부 마을을 제외하고 모든 지역의 이주가 확정되었다. Area A에는 경제특구뿐만 아니라 불탑과 사원 등 종교 시설이 있는 곳이 포함되어 일종의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처음 이 지역을 방문했을 당시에도 삭막한 공사현장 인근에 금색 불탑이 솟아있던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각 마을 주민들이 6명씩 참여해 이주 관련 이슈에 대응하고자 만든 단체 TSDG(Thilawa Social Development Group) 활동가 예카잉윈(Aye Khaing Wi)에 따르면, 현재 알루완 수(Alwan Sut) 마을과 띨라와(Thilawa) 마을 일부 총 81가구가 이주 대상이었으며 이 중 68가구는 2013년 11월 현 정착 지역인 먀잉따야 마을(Myaing Thar Yar Village)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는 구역을 사업상 용어로 Zone A라고 부른다. 시기는 미정이나 나머지 마을도 Zone A 뒤쪽에 현재 집터를 닦고 있는 Zone B로 곧 옮길 예정이다.


<표 2> 현재까지의 이주 가구 현황


TSDG 대표인 우 먀 흘라잉(U Mya Hlaing)은 지역 정부가 사전에 주민들과의 합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이주 통보를 했으며, 이주하지 않을 경우 연행하겠다고 협박했다는 사실을 들려주었다. 이미 이주를 마친 Zone A 주민들의 경우 보상에 관한 두 가지 종류의 선택지를 받았다. 위의 <표 2>와 같이 하나는 토지와 가옥에 대한 보상을, 다른 하나는 토지와 현금(정착금 2백 5십만짯, 약 $1,836)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모든 이주민에게 같은 면적의 토지(25*50ft)를 주었고 이전에 소유하고 있던 토지가 넓다면 현금으로 5만짯(약 $37)을 더 주었다. 이주하기 전 기르던 가축이나 재배 작물에 대한 보상은 없었다.


Zone A 뒤쪽으로는 곧 이주해 올 띨라와 주민들을 위한 Zone B 공사가 한창인데 아직 이주 전인 주민들의 보상에도 문제가 많다. 이주 예정인 팔람(Palam) 마을 주민 우윈쪼(U Win Zaw, 가명) 는 난감한 경우에 속했는데, 논은 이주 지역에 속하고 집은 이주 지역이 아니라서 이주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논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필자와의 인터뷰 중 논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 적이 있냐고 질문하자 그는 아래와 같이 답했다.


“1996 년에 이 지역에 말레이시아가 공단을 짓는다고 해서 그때도 논을 뺏겼어요. 그때는 군부 독재 시절이었으니까 주는 돈만 받고 아무 말도 못 했죠. 땅값도 안 주고 논값도 안 줬어요. (내가 가진) 땅의 총면적과 관계없이 집 한 채와 그 집터만큼만 보상했어요. 그리고 이사 비용으로 5천 짯(약 $3.6)을 줬을 뿐이에요. 땅도 에이커당 2만 짯을 보상으로 받았어요. 그래 놓고 그때 보상을 받았다고 이제 못 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1996년 미얀마 정부가 말레이시아 공장이 들어온다는 이유로 주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일부 주민들을 이주하도록 했지만 공단 조성이 지연되자 이들은 다시 돌아와 원래 살던 곳에 살기 시작했다. 약 20년이 흘러 조성된 띨라와 경제특구는 말레이시아 공단과는 사실상 아무 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1996년에 보상했던 구역인 Area 3(그림 1 참조)은 보상하지 않겠다는 계획을 밝힌 것이다.


일본국제협력단(JICA)은 환경 및 사회적 고려 사항에 관한 지침 안에 이주, 정착과 관련한 규정[4]을 마련해두고 있다. 항목 중에는 ‘보상과 지원은 이주 이전에 제공되어야 한다.’, ‘수혜자의 요건에는 프로젝트의 영향을 받은 사람 중 토지에 대한 공식적인 법적 권리(법적으로 인정된 전통적, 관습적 토지소유 권리)를 가진 자, 조사할 때는 공식적 토지 소유 권한이 없었지만, 토지나 자산 소유를 주장하는 자, 증명할 수 있는 법적 권리는 없지만 거주하는 사람을 포함한다.’와 같은 규정이 나열되어 있다. 사실상 프로젝트로 인해 이주하게 된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이주하기 전 토지에 관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이주와 정착과정에서 토지와 가옥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주민들이 이전에 가졌던 삶의 양식을 유지하기에 충분했는지, 그리고 그러한 보상만으로 이주 후 삶을 온전하게 영위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의문이 생겨 주민들과의 만남을 통해 이를 알아보고자 했다.



3. 이주민의 소득은 회복됐을까?


주민들은 보상을 받고 먀잉따야 마을로 이주했지만, 이는 단순히 거주공간만을 제공한 것으로 지속적인 생계유지 대책이 될 수 없었다. 보상받은 땅은 집터와 농지 두가지 목적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족했고, 따라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그들은 새로운 생계 수단이 필요했다..


“농사를 짓고 살면 가장 좋지만 공장에서 일할 수밖에 없어요…. 띨라와에 있을 때는 강이 가까워서 항상 생선도 많았고 버섯이나 죽순이 충분했어요. 생활비가 예전에는 하루에 2,000짯 정도 들었는데 요새는 5,000짯 정도가 들어요. 애들도 아프고 누가 결혼이라도 하면 축의금이 들어가는데 남편도 일용직이라 수입이 많지 않네요.”


5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마딴에이(Ma Than Ei, 가명)에게 이주 후에 가장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자 위와 같이 답했다. 이주 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한참 설명하고 나서 필자에게 “다 얘기해서 속이 시원하다.”는 감상을 털어놓기도 했다. 마딴에이와 마찬가지로 부쩍 올라간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주민들은 외부에서 임금 노동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주민 대다수가 농업 이외의 직업에 종사해 본 경험이 없거나 일용직에 종사하는 저임금 노동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고학력 기술자를 원하는 띨라와 경제특구 내 공장에 취업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이주 후 1년 정도는 돈을 빌리거나, 가진 재산을 처분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빚이 많아 생존 자체가 어려워진 주민들은 생계 문제를 해결하고자 쉐마운(Shwe Hmaw Wun) 이라는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MJTD(Myanmar-Japan Thilawa Development)측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다. 2008년 사이클론 나르기스 피해지역 복구활동을 하다 띨라와 지역과 주민들을 알게 된 쉐마운은 주민들의 요구를 MJTD측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주민들의 현실을 알리고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하자 MJTD는 주민들에게 소득 회복 프로그램, 일명 IRP(Income Restoration Program)를 제공하기로 했다.


IRP는 일종의 원조로 프로젝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Project Affected Persons, PAPs)의 소득 안정과 회복을 위해 진행된다.[5] 주민들은 원하는 분야를 직접 제안하거나 쉐마운 활동가와 상의해 생계에 도움이 될 만한 교육을 받았다. 주민들이 참여한 IRP는 버섯 재배, 재봉, 전기기술, 운전교육 등이 있었고,MJTD 가 강사료나 재료비, 교통비 등을 제공했다. 이주민 우나잉우(U Naing Oo, 가명)는 버섯을 재배해 매일 근처 시장에서 판매하는데 네 식구가 살기에 충분한 일당을 벌고 있다고 했다.


▲ U Naing Oo 의 버섯 농장 ⓒ송유림


그러나 버섯 재배 교육을 받은 주민 2가구를 제외하면 IRP를 통해 습득한 기술로 생계를 해결하는 주민들의 수는 매우 적었으며, 띨라와 경제특구에 취업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루 일당이 필요한 주민들이 수입이 없는 긴 교육 기간을 견디지 못해 수료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둘째, IRP에서는 주로 초급 수준의 교육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중급 이상의 교육이 필요한 기술은 주민들이 알아서 비용을 부담하고 강사를 찾아야 해서 진행이 어렵기 때문이다. 재봉 교육에 참여한 마딴에이(Ma Than Ei)의 경우를 보면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세 달 코스인 교육에 끝까지 참여하고 싶었는데 아이가 5명이고 갓난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두 달 만에 그만두었어요. 재봉틀도 없으니까 배운 내용을 연습할 수도 없고.. 남편도 전기 설비 교육을 받았는데 중급 과정이 개설되지 않아서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어요. 막내가 2살이 되면 경제특구에 있는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싶어요.”


이렇듯 소득회복 프로그램은 주민들의 고용과 지속적인 생계 해결로 이어지지 못했다. 집에서 버섯을 재배하게 된 주민도 재배하는 방법만 배웠을 뿐 판로와 판매 전략은 스스로 찾아야 했다. 운전교육을 받은 주민은 교육을 받은 후 면허취득비용이 없어 면허를 못 따고 버스 안내원으로 일하게 됐다고도 한다.



4. 이주민에 대한 생계 지원 방식의 근본적 문제


먀잉따야 마을의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생계 지원 방식의 근본적인 문제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IRP 시작 시점이 너무 늦었다. 주민들의 이주는 2014년 11월에 이루어졌는데 IRP는 1년 후인 2015년부터 시작되었다. 농사를 짓는 것이 불가능해진 주민들은 그동안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집과 땅을 담보로 돈을 빌리다가 거주지를 잃는 경우도 다수 발생했다. 게다가 IRP를 시작하고 나서도 강좌를 수료하고 빚을 갚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결국 생계에 도움이 되는 비용을 벌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됐던 것이다.이주 후의 안정된 생계를 지원할 요량이었다면 이주 전부터 이에 대비해야 했다.


둘째. 애초에 이주민들은 띨라와 경제특구에 고용될 수 없는 구조였다. MJTD 측은 주민들을 IRP에 참여시킴으로써 경제특구의 노동자로 고용하겠다고 설명했으나 그렇게 하기엔 교육의 내용이 너무 비전문적이었다. 물론 모든 주민이 경제특구 안에서 일 하려고 IRP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주민들에 따르면 처음 시작할 때 이 교육은 주민들이 경제특구에서 일할 수 있도록 기술을 향상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 농부였던 사람들이 단기간 교육을 통해 공장 노동자가 되기는 어려우며 공장에서도 경력직에 고학력 직원을 원했기 때문에 취업으로 연계되지 않았다.


종합해보면 IRP라는 생계지원 프로그램은 주민들의 삶의 변화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단순히 생계수단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이전의 삶의 양식을 유지하지 못하고 새로운 주거와 노동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주민들의 생활 전체가 바뀌었음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띨라와 경제특구 이주민의 사례는 외부 자본으로 이루어지는 경제특구로 인해 노동력마저 외부에서 조달되고 지역사회 주민들은 오히려 소외된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이런 현상을 방지하고자 시도한 IRP 역시 대안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지속적인 생계 수단이 되지 않았다는 점도 깊이 고찰해야 할 문제이다.



5. 개발과 이주는 불가분의 관계일까?


처음 이 사례를 학술 세미나에서 발표했을 때 누군가 필자에게 “그런데 이런 일 하나 없이 경제성장을 어떻게 하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모두가 이런 문제에 공감할 것이라고 믿었던 필자는 당황한 나머지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솔직히 아직 명확하게 답변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이렇게 한번 되물어보고 싶다.


“개발과 이주는 불가분의 관계일까? 개발을 하려면 이주를 해야 하고, 이주를 하지 않으면 개발을 할 수 없을까?”


무언가를 짓기 위해 누군가를 쫓아내는 일, 그리고 그 누군가가 분개해서 항변하는 일은 매우 흔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런 장면을 너무 많이 봐서 정말 그렇지 않고선 개발을 할 수 없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은 지난 반백 년 동안 초고속 성장으로 선진국의 지위와 명예를 얻는 데에 온 힘을 쏟았고 그로 인해 선진국 궤도에 진입했다. 이 시대를 보내며 성장의 동력이 된 세대라면 개발로 인한 강제이주 문제에 익숙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가 시작되고도 17년이 지났다. 그동안 경제가 성장한 만큼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에 대한 우리의 의식도 함께 성장했는데 똑같은 질문과 똑같은 답을 내놓아도 괜찮을까. 띨라와의 일본처럼 한국도 원조 공여국이자 투자자의 입장이 된 지금 말이다.


“우리는 경제특구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에요. 단지 규정을 좀 지켜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먀잉따야 마을에 살고 있는 한 이주민이 위와 같이 한 말을 듣고 누군가에게는 일상이 될 이주와 정착에 관한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명목상 마련해 둔 글 몇 줄로 여겨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주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삶이 총체적으로 변화를 맞이하는 과정이다. 이주가 개발로 인해 생기는 당연한 부작용이 아닌 협의 과정을 거쳐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이해가 선행되었으면 좋겠다.



[참고] 2016년 12월 Earth Right International이 제작한 영상을 통해 TSDG(Thilawa Social Development Group)의 멤버 예카잉윈(Aye Khaing Win)이 설명하는 띨라와 이주민의 현실을 들어볼 수 있다.

https://www.facebook.com/pg/EarthRightsIntl/videos/



기사 입력 일자: 2017-03-31


작성: 송유림 피움 편집위원, 서강대학교 동남아시아학협동과정

/ salamatpo710@gmail.com




[1] Joseph Allchin, “Taste of democracy sends Burma’s fragile economy into freefall”, INDEPENDENT, 19 September, 2011.

[2] Justin Calderon, “Myanmar’s Economy To Quadruple By 2030”, investine, 30 May, 2013.

[3] 데보라 코웬, 2017, 『로지스틱스』. 권범철 역, 갈무리. P.23

[4] Yangon Region Government, “Resettlement Work Plan(RWP) for Development of Phase 1 Area, Thilawa Special Economic Zone(SEZ)” November 2013

[5] 앞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