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들[5호] 적극적 평화와 정의 사회로 가기 위한 길, 여성, 평화, 안보(Women, Peace, and Security) 아젠다

2018-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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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평화와 정의 사회로 가기 위한 길,
여성, 평화, 안보 (Women, Peace, and Security) 아젠다


지난 2016년 한국 사회를 지배한 담론 중 하나는 단연 페미니즘이었다. 여성 혐오를 이유로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이 더 적극적으로 연대하기 시작했으며, 시위를 통해 젠더 민주주의를 외치기도 했다. 다른 세계는 어떠한가. 지난 1월 21일 여성 인권 후퇴를 우려한 500만여 명이 전 세계 673곳에서 다 함께 여성 행진을 진행하였고, 3월 8일에는 ’Be Bold for Change(변화를 위해 대담해지라)’라는 주제로 국제 여성의 날 축하 행사 및 캠페인이 곳곳에서 벌어졌다.[1] 그로부터 이틀 뒤인 3월 10일, 한국에서는 열아홉 번의 대규모 촛불 집회를 끝으로 광장 민주주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루어냈다. 그야말로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 참여의 날들이었다.
 

평화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요한 갈퉁이 구분한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와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바로 정의의 실현(presence of justice)이다. 평화가 단순히 전쟁과 폭력의 부재 상태라면 이는 지속 가능하지 아니하며, 지속 가능한 평화를 위해서는 정의의 실현을 위한 적극적인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오늘까지 우리가 목격했던 연대와 참여야말로 갈퉁이 말한 적극적 평화 상태로 가는 과정일 것이다. 정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대두하고 있는 올봄, 젠더 이슈와 적극적 평화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여성, 평화, 안보(Women, Peace and Security, 이하 WPS) 아젠다를 소개하고자 한다.



WPS가 무엇인가?

WPS는 전쟁 및 무력충돌과 폭력 등이 남성과 여성에게 다른 영향을 미치고 젠더 불균형을 심화시킨다는 점에 착안하여 발전된 담론이다. 이 아젠다는 평화 구축 및 협상과 재건 과정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재확인하고, 여성이 적극적인 행위 주체로서 전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2010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WPS에 관한 유엔의 책임을 명시한 결의안 1325호(이하 UNSCR 1325)를 처음으로 채택하였고, 이는 남성들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전쟁과 평화 구축 분야의 기존 시각을 뒤집는 계기가 된 이는 지금까지도 WPS의 총 8개 결의안 중 대표 결의안으로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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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평화 및 안보 분야에서 성인지적 관점을 도입하는 데에 기여한 UNSCR 1325는 분쟁방지(prevention), 여성 참여(participation), 여성 인권 보호(protection), 구호 및 회복(relief and recovery) 등 네 가지 이슈를 핵심으로 한다. 첫째, 분쟁방지는 무력충돌 방지뿐만 아니라, 전쟁 및 전후 상황에서 여성과 소녀를 대상으로 하는 모든 형태의 폭력 예방을 주요 골자로 하며, 둘째, 여성 참여는 분쟁 방지와 해결 및 평화 구축 과정에서의 의사 결정에 있어 여성들의 역할 확대를 강조한다. 셋째, 여권 보호는 분쟁지역 및 분쟁 취약지역에서 여성 인권이 보호받고 신장 되어야 함을 지적하고, 넷째, 구호 및 회복은 전쟁 및 전후 상황에서 여성에게 필요한 지원이 적절하게 이루어지고, 또 직접 행위 주체로서 여성들의 역량이 강화되어야 함을 명시한다.

WPS는 여성을 전쟁의 피해자로만 인식하고 평화 관련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해왔던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고 평화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적극적인 행위 주체로서 인정하는 아젠다로, 분쟁에 영향을 받는 지역과 인구가 늘어나면서 지속해서 주목받고 있다. 특히 2015년에는 UNSCR 1325 채택 15주년을 기념하여 유엔과 국제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지금까지의 성취 및 도전과제 등을 돌아보는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다. 지난 15년간 WPS의 효과적인 이행을 위해 총 63개 국가는 UNSCR 1325에 대한 국가 행동계획을 수립하였고, 대한민국 정부 또한 총 10개 목표와 각 목표별 세부 과제로 구성된 UNSCR 1325 국가 행동계획을 2014년 유엔에 제출하였다. 한국의 행동계획에는 PKO 파병 전 교육 훈련 실시, 국제협력을 통한 성폭력 예방 시스템 구축, 국방×외교×통일 정책에 성인지 관점 도입, 개발원조를 통한 분쟁지역 여성 보호 및 자활 지원 등이 주요 내용으로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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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WPS를 이야기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WPS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로 ‘시의성’을 들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분쟁, 무력충돌 및 테러리즘 등의 위협이 늘어나고 있고,
[4] 이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 또한 계속해서 증가하는 추세이다. 현재 약 2억 명이 분쟁 취약 지역에서 살고 있고, 대한민국 인구수를 훌쩍 넘는 6천 5백만 명이 전쟁 및 기근을 이유로 국내외로 추방되거나 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반면, 최근 여러 국가가 오랜 전쟁을 뒤로하고 평화 협상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2016년 노벨평화상은 50년 이상 내전을 지속해 온 콜롬비아에서 평화 협상을 끌어낸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이 수상하였고, 미얀마도 70년 이상 지속해 온 무력 분쟁을 끝내고 평화 상태로 가기 위해 준비 중이며, 이 과정에서 남성들과는 다른 전쟁 경험을 가진 여성들의 역할과 참여가 중요시되고 있다.

둘째는 ‘필요성’이다. 현재 95%의 난민들이 소위 저개발 국가 출신이고, 2030년에는 세계 빈곤 인구의 절반이 분쟁 취약국에 거주할 것으로 예측되는 등 분쟁 취약도와 저개발은 높은 상관관계에 있다.
[5] 그뿐만 아니라, 여성 학대 및 성폭력이 전쟁의 무기로 이용되고 전후 복구 과정에서 여성이 소외 혹은 착취되는 등 전시 및 전후 상황에서 여성들의 인권 침해가 더욱 문제시 되고 있기 때문에, 해당 이슈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필요하다.

셋째, 다름 아닌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수없이 들어 이제는 진부해진 타이틀인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 대한민국은 1953년 평화 협정 없이 정전 협정만이 체결된 (엄밀히 말해) 전쟁 중 국가이고,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이 여성들을 상대로 저질렀던 전쟁 성범죄인 위안부 문제는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WPS 아젠다의 핵심인 젠더 평등과 여성 참여는 분쟁 취약국이나 소위 개발도상국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에 해당하는 이슈이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 인권, 여성 참여, 여성 리더 및 대표성의 문제는 어느 사회에서건 예외 없이 계속해서 대두하고 있다. 실제로, 개발도상국에만 국한되었던 새천년개발목표(MDGs)와는 달리 모든 국제사회 구성원들이 이행 의무를 지고 있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에서도 여성 참여 이슈가 구체적인 목표로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표 1> 여성 참여 관련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및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 [6]

▶ SDGs 16: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평화롭고 포용적인 사회 증진, 모두를 위한 정의에의 접근제공, 모든 수준에서 효과적이고 책임성 있고 포용적인 제도 구축(Promote peace and inclusive societies for sustainable development, provide access to justice for all and build effective, accountable and inclusive institutions at all levels.)


▶SDGs target 5.5: 정치, 경제, 공공부문 등 모든 차원의 의사결정 과정에 여성의 완전하고 효과적인 참여와 리더십에 대한 공평한 기회를 보장한다(Ensure women’s full and effective participation and equal opportunities for leadership at all levels of decision-making in political, economic and public life.)


▶CEDAW: 국가의 완전한 발전과 인류의 복지 및 평화를 위해서는 여성이 모든 분야에 남성과 평등한 조건으로 최대한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며[중략] ([…]the full and complete development of a country, the welfare of the world and the cause of peace require the maximum participation of women on equal terms with men in all fields.)




여성 참여와 정의, 그리고 적극적 평화
 
놀랍게도 1979년 채택된 여성차별금지 국제조약의 내용이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고, 1995년 선언되어 20년이 훌쩍넘은 베이징 선언 및 행동강령은, 젠더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회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고 근본적인 해결을 촉구하는 그 내용 때문에 오늘날에도 급진적이고 진보적으로 여겨진다. 아쉽게도 세계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를 누리고자 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의와 변화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동시에 소극적 평화 상태를 적극적 평화 상태로 이끌어 갈 기회이기도 하다. 정의 실현을 위한 연대,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한 참여, 지속 가능한 평화를 위한 구조와 제도의 변화 등 우리가 오늘날 드디어 목도하고 있는 것들이야말로 적극적 평화와 정의 사회로 가기 위한 길일 것이다.

한 예로, 한국의 경우 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3월 말 현재, 대선 주자들은 앞다투어 여성 관련 정책 등 성 평등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특히 공공분야의 여성 대표성을 확대할 수 있는 남녀 동수 내각 문제가 젠더 문제 관련 공약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이 현상이 과연 적극적 평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대선까지, 그리고 그 이후까지도 지속적 관심이 필요하겠다. 한편 지난해 진행됐던 콜롬비아 평화 협상 과정은 여성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성 참가자의 비율이 4-19%에 그쳤던 미얀마 협상 과정
[7]과는 달리 하바나에 마련됐던 콜롬비아 협상 테이블에서는 여성 참가자가 30%를 차지하였으며, 그 자리에 함께하며 목소리를 높인 관련 전문가와 전쟁 피해자 중 여성의 비율은 60%에 달했다.[8] 이는 WPS의 대표적인 본보기로, 또 희망적인 예시로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참고영상] 2012년부터 콜롬비아 평화 협정 테이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젠더 전문가Bibiana Peñaranda씨가 평화 협상에서의 여성 참여 과정과 긍정적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다(출처: UN Women).





여성 지도자가 항상 여성의 대표성을 띨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두 가지 생각해 볼 거리를 던지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째, 어떤 여성이 참여하고 여성 대표성을 가질 것인지의 문제다. 여성 지도자 및 참여자의 배경은 무시한 채 단순히 그들의 머릿수 만을 세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과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면 자연히 사회적으로도 여성 대표성을 띨 수 있다는 믿음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지난 4년간 우리는 두 눈으로 목격하고 몸소 체험했다. 이는 비단 한 사회만의 현상은 아니다. 많은 곳에서 여성 참여를 보여주기 위해, 또 형식상 필요하기 때문에 명목적인 역할의 여성 지도자를 선출하고 포함시키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한 예로, 미얀마 평화 협상 과정에서 해당 분야 전문성이 부족한 실무자급 인력을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형식적으로 협상 테이블에 포함시킴으로써 여성 참여의 본질을 흐리는 것은 물론, 여성 대표자의 능력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을 심화시키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여성 지도자가 항상 여성의 대표성을 갖고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킴으로써 성 평등에 기여한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여성 참여 확대의 중요성과 실질적인 여성 대표성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접근과 선택을 해야 할까.



왜 여성이 참여해야 하는가? 아니, 이 질문과 대답이 왜 필요한가?

둘째, 여성 참여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다. 여성 참여를 뒷받침하는 근거와 이유로 몇 가지 관점들이 주로 이야기되곤 한다. 예를 들면, 첫째, 여성은 모성애를 가진 존재로 남성보다 사회와 약자를 위해 더 헌신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관점; 둘째, 여성은 남성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화된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의 다양성을 위해 필요하다는 관점; 셋째, 여성이 여성들을 대표하고 젠더 문제에 있어 더 진보적이기에 성 평등에 기여할 수 있다는 관점 등이 그것이다. WPS 아젠다에서도 이러한 관점들이 존재하는데, 특히 WPS의 충실한 이행을 독려하기 위해 여성의 참여가 가져오는 긍정적인 변화와 영향이 강조되곤 한다.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의 언급이 대표적인 예로, 지난해 10월 안보리 회의에서 ‘여성이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평화 협정이 최소 15년 지속될 가능성이 35% 높아진다’며 구체적인 근거까지 내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 남성이 참여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들어보았는가. 남성의 참여는 이유가 전혀 불필요한 데 반해, 여성의 참여에는 왜 정당한 이유가 필요한가. 남성의 참여는 규범(norm)이나 당연한 질서로 받아들여지는 데 반해, 왜 여성의 참여에는 질문과 대답이 필요할까. 여성의 참여가 포괄적 개발과 긍정적 평화의 문제라면, 여성이 세계의 절반이므로 공평하게 절반의 자리를 차지하고 절반의 대표성을 갖는 것은 여성의 권리이자 정의가 아닐까.


“평화를 위해 왜 여성이 참여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혹은 답을 해야 할 지에 대한 결정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기도록 하겠다.



기사 입력 일자: 2017-03-31

작성: 정연주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 보조연구원* / yeonju.silvia@gmail.com


* 필자 정연주는 전쟁 및 지뢰 피해 장애인들과 함께 일하는 캄보디아 로컬 NGO에서 2년간 자원활동을 한 경험을 계기로 국제 개발 및 평화 연구 분야에서 계속 배우고 일하고 있다. 석사과정에서 사회인류학을 전공하였으며, 현재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 내 평화와 발전 프로그램(Peace and Development Programme) 연구원으로 분쟁 취약 지역 내 젠더 이슈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1] 같은 날 한국에서는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라는 슬로건으로 한국여성대회가 열렸다.
[2] WPS 8개 결의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UN Peacekeeping 홈페이지 참조

: http://www.un.org/en/peacekeeping/issues/women/wps.shtml
[3] 대한민국 외교부 공식 블로그  http://mofakr.blog.me/220008254388
[4] 최근 5년간(2012-2016) 무기거래량은 냉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고ㅜ (SIPRI, 2017, https://www.sipri.org/commentary/blog/2017/state-major-arms-transfers-8-graphics), 2012년 대비 현재 테러리즘은 120% 증가했다 (World Bank, 2016: http://www.worldbank.org/en/topic/fragilityconflictviolence/overview).

[5] World Bank, 2016 http://www.worldbank.org/en/topic/fragilityconflictviolence/overview
[6] The Conven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의 약자로, 1979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여성 인권 관련 국제 조약이다.
[7]‘Why so few women in peace talks, demand Myanmar
campaigners’, 가디언지  2016년 9월 20일 자 기사 

<https://www.theguardian.com/global-development/2016/sep/20/why-so-few-women-in-peace-talks-demand-myanmar-campaigners>
[8]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Report of the Secretary-General on women and peace and security, S/2016/822, 29 Sep. 2016, p.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