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8월 9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선주민의 날(International Day of the World's Indigenous Peoples)입니다. 전 세계 선주민들에 대한 인식을 증진하고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1994년 유엔 총회에서 제정한 날인데요. 한국에서는 맥락에 따라 원주민, 토착민으로 불리기도 하는 선주민은 문자 그대로 '먼저 살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나중에 이주해 온 집단 혹은 식민 지배 세력과 대비하여 '앞서서' 어떤 곳에 뿌리내리고 있던 이들을 지칭합니다. 후에 온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권리를 침해당하고 비주류로 밀려난 맥락을 강조할 때 주로 '선주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죠.
선주민 권리 침해는 다양한 양상을 띱니다. 정착민 사회와의 관계에서 구조적 차별과 배제, 불평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개발 세력에 의해 삶터와 생명을 잃는 개발 피해의 사례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지난 2018년 7월 23일 발생한 라오스 세피안-세남노이 댐 붕괴 사고가 바로 그러한 경우죠. ‘세이프가딩’과 ‘권리 기반 접근(Rights‑based Approach)’이 국제개발협력 현장에서 점차 보편적인 언어로 자리잡아 가고 있지만, 한국 국제개발협력에서 권리의 중심에 선주민을 둔 논의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습니다. 정부 ODA가 국익 추구를 전면적 목적으로 내세우며 외교·통상의 수단으로 공고해져 가는 지금, 현장과 당사자 중심의 관점이 어느 때보다 더욱 강조되어야 할 시점입니다.
발전대안 피다는 세피안-세남노이 댐 붕괴 사고 7주기 그리고 세계 선주민의 날 31주년이 돌아오는 2025년 여름, 선주민과의 관계에서 국제개발협력을 성찰해 보는 기획 시리즈를 선보입니다. 그 첫 순서로, 발전대안 피다 전문위원이자 호주가톨릭대학교 글로벌윤리센터 리서치 펠로우인 노재은 박사가 소개하는 호주의 사례를 통해 식민주의적 개발 패러다임을 재구성하는 선주민 담론의 현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편집자 주: 통상 유엔 기념일과 선언문의 제목에서는 'Indigenous peoples'를 '원주민'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이 글에서는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권리 주체'로서의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모두 '선주민'으로 통일하여 표기합니다.)
선주민의 발전, 선주민에게서 배우는 발전
호주의 선주민
8월 9일은 세계 선주민의 날(International Day of the World’s Indigenous Peoples)이다. 1994년 유엔에서 제정한 이래 매년 기념되고 있지만, 사실 나는 이 날을 기념하는 그 어떤 행사도 참여한 기억이 없다. 대신 내가 거주하고 있는 호주에서는 7월 첫째 주에 NAIDOC(National Aborigines and Islanders Day Observance Committee, 전국 선주민 및 군도민의 날 기념위원회) 기간이라고 해서 선주민들의 역사, 문화, 업적을 기억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올해는 아래 포스터가 보여주듯이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앎과 삶을 토대로 공동의 비전을 이어가고 재창조하는 미래 세대를 강조했다.
(포스터 이미지 출처: NAIDOC 웹사이트 링크)
지난 20여 년간 나의 주요 화두는 인권과 발전이었다. 그렇지만 사실 선주민 권리는 오랫동안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주제였다. 그러다 호주에 와서 지내다 보니 아무래도 선주민들의 아픈 역사와 그 현재성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종종 있다. 무슨 행사든지 시작할 때 'Acknowledgement of Country*'라는 의례를 통해 선주민을 이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 지속성을 존중한다는 문구를 읽고, 외국인 참여자가 많거나 대규모의 행사에서는 'Welcome to Country*'라고 해서 그 해당 지역 출신 선주민이 춤, 노래, 이야기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환영하는 의례를 가진다. 2020년 호주 개발학 학회(Development Studies Association of Australia) 창립 컨퍼런스 자리에서 식민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개발학이라는 학문과 호주라는 터전에 대한 성찰이 학회 정체성의 핵심임을 확인하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 편집자 주: ‘Acknowledgement of Country’와 ‘Welcome to Country’에서 말하는 ‘Country’는 일반적인 영어 단어 ‘country’가 의미하는 ‘국가’나 ‘지역’과는 차별화되는 호주 선주민 전통의 핵심 개념이자 문화적 정체성의 근간이다. 이 개념은 선주민들이 살아가는 땅과 자연 환경뿐 아니라, 그 땅과 영적으로 깊이 연결된 선주민들의 관계, 세계관, 그리고 삶의 방식 전체를 포괄한다.

(사진: 2024년 태평양 지역 워크샵을 진행하면서 필자가 찍은 Welcome to Country 진행 장면 / © 2024 노재은)
그렇지만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습은 여전한 차별과 불평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땅, 자원, 아이를 빼앗겼던 식민주의 역사에서 비롯된 고질적인 불평등이 현재에도 여러 차이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를 줄여 가자는 노력의 일환이 2007년에 시작된 'Closing the Gap* 1↗' 캠페인이다. 그러나 여전히 선주민들은 다른 호주인에 비해 평균 수명이 짧고 영아 사망률이 높으며 고등 교육기관 진학률과 고용률도 낮다. 내가 퀸즐랜드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할 때, 토레스 해협 군도 선주민(Torres Strait Islander)**으로는 최초로 해당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노리타 모르수-디옵(Norrita Morseu-Diop)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는 당시 선주민 수감자 인권 문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녀의 연구에 따르면 브리즈번의 청소년 구금 센터(Youth Detention Centre) 수감자의 60% 이상이 선주민이며, 이들 대부분은 가족 중에 성인 수감자가 있었다. 이는 사회적, 구조적 요인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악순환을 보여준다. 내가 만난 또다른 선주민 학자인 앤젤리나 헐리(Angelina Hurley)는 애보리지널 아티스트로 유명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예술 작품, 코미디 영화 등을 통한 저항과 정체성을 이야기한다2↗. 이런저런 다양한 노력들로 선주민 권리의 회복과 향상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는가 싶었지만, 선주민이 호주 최초의 국민이었음을 인정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기구의 설립을 명시하려 했던 2023년 헌법 개정 국민투표는 부결되었다. 이처럼 불의의 역사를 다시 써 나가기 위한 ‘화해(reconciliation)’와 선주민의 ‘자주권(sovereignty)’은 여전히 실현되지 못한 구호로 남아 있다3↗.
* 편집자 주: 호주 선주민이 비선주민 호주인들과 대비하여 경험하는 건강 불평등과 사회적 격차(gap)를 줄이기 위해 호주 정부가 선주민 공동체들과 함께 추진하는 정책 전략이다. 2031년까지 건강, 교육, 고용, 경제, 주거, 사법, 안전, 복지, 문화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19가지 핵심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 편집자 주: 토레스 해협 군도는 호주 본토 최북단 케이프 요크(Cape York)와 파푸아뉴기니 사이의 해협에 위치한 약 274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군도로, 이곳의 선주민들은 호주 본토 선주민(Aboriginal Australians)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호주에서는 자국의 선주민들을 지칭할 때 'Aborigines and Torres Strait Islanders'라고 두 집단을 구분하여 말한다.
발전과 탈식민
전 세계적으로는 약 90개국에 4억 7천 6백만 명의 선주민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전 세계 인구의 6%도 안되지만 지구촌 빈곤 인구의 약 15%를 차지한다4↗.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7,000여 개, 문화는 5,000여 가지에 이를 만큼 다양하지만, 그 중 상당수가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 환경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삶도 위협받고 있다. 일례로 전기차 개발에 필요한 리튬 매장량이 남아메리카 볼리비아나 칠레에 집중되다 보니, 다국적 기업이 몰려들어 리튬을 채굴·분리하는 과정에서 주변 환경의 오염 및 사막화가 심해지면서 인근에 거주하는 선주민들이 심각한 물 부족과 생계 수단 부족의 문제를 겪고 있다5↗ 6↗. 1989년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169로 알려진 ‘선주민과 부족민에 관한 협약(Indigenous and Tribal Peoples Convention)’, 그리고 2007년에 유엔에서 채택된 ‘선주민 권리 선언(UN Declaration on Indigenous Peoples)’은 이들의 자결권, 문화 및 언어 보존권, 토지 및 자원 접근권, 의사 결정에의 참여권을 강조한다. 자신들의 필요와 문화에 적합한 발전을 추구할 권리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선주민 권리 선언 제 39조는 국제협력을 통해 재정적, 기술적 지원에 접근할 권리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과연 선주민들에게 국제협력, 그리고 발전의 의미는 무엇일까? 선주민들의 역사가 식민주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듯이, 발전의 역사 또한 그러하다. 고백하건대, 개발학 석사를 영국에서 하겠다 결정할 때는 이 점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내가 서섹스에서 공부하는 걸 선택했던 큰 이유였던 로버트 챔버스(Robert Chambers) 교수님이 한때 식민지 행정관(colonial administrator)으로 근무했던 사실을 알고 새삼 그 연결고리에 생각이 미쳤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호주에 살면서, 그리고 글로벌 연구팀에서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학자들과 함께 연구를 하면서 식민주의적 사고와 지식 생산 방식에 대한 도전을 끊임없이 받는다(Noh, 2024). 그간 소위 선진적이라는 공여국에서 '누가', '무슨 얘기'를 하나, '어떻게' 하고 있나에 레이더가 맞춰져 왔기 때문이다. 탈식민주의(decoloniality)는 식민 지배 시절의 경제적 착취 및 사회적, 문화적 지배가 현재도 뿌리 깊은 영향을 행사하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실천(praxis)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실천에서 중요한 요소가 바로 서구 위주의 지식 위계와 지식 생산 방식을 타파하고, 그 동안 변방부라고 소외되어 온 지식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Mignolo, 2020; Walsh, 2012).
선주민들에게서 배우는 발전
콜롬비아 출신 인류학자이자 탈발전 담론의 대표주자인 에스코바르(Arturo Escobar)는 일찍이 발전을 다시 새롭게 만들어가려면 — 그의 표현을 빌면 ‘발전 대안’(development alternatives)이 아닌, ‘발전 너머의 대안’(alternatives to development) — 발전의 조건이자 변화의 동력이 되는 로컬의 삶과 그 역사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Escobar, 1995). 이는 단순히 선주민이나 그들의 지식을 열등하다고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존중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주민의 지식과 존재론이 제시하는 대안적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Kothari & Klein, 2023). 선주민의 지식을 개발에 통합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특히 참여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그리고 농업 분야에서 지속가능한 농업을 이야기하면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주민의 지식을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하거나, 무조건 이상적으로만 보는 시각에는 한계가 있다(Briggs, 2008). 사실 그들의 지속가능한 농업 방식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태도, 자연을 내 존재의 일부로 여기는 세계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Kimmerer, 2017; Morris, 2017). 이는 인간을 개별적 주체로 보는 서구의 존재론과 다른다. 선주민들의 관계 중심 존재론에서는 나와 타인, 그리고 인간과 자연 간 관계를 서로를 구성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런 관계성이 바로 책무성의 근간이 되며, 그 책무성의 범주가 미래 세대, 동물, 지구 전체로 확대된다(Tong et al., 2023).
생산과 소비의 극대화, 기술 만능주의로 대표되는 현재의 체제에 잘 적응하도록 돕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역량 강화, 우리가 꿈꾸는 발전은 아닐 것이다. 세계 선주민의 날을 맞아 그들의 메시지에 귀 기울여 보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오래된 미래>에서 일찌감치 통찰했듯, 우리는 발전의 미래를 만들어갈 가치와 방법을 그 속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일 기록을 갱신하는 무더위 속에서 — 나는 추위 속에서 —, 지금 이 순간과 미래에 존재할 모든 생명체의 안녕을 생각한다.
글쓴이: 노재은
호주가톨릭대학교 글로벌윤리센터 리서치 펠로우
발전대안 피다 전문위원
참고문헌 및 자료 Briggs, J. (2008). Indigenous knowledge and development. In Desai, V., & Potter, R. B. The Companion to Development Studies. Routledge. (pp. 107-111). Escobar, A. (2011). Encountering development: The making and unmaking of the Third World. Princeton University Press. Kimmerer, R. W. (2017). Speaking of nature. Orion Magazine. Kothari, U. & Klein, E. (2023). Advanced introduction to critical global development. Edward Elgar Publishing. Mignolo, W. D. (2020). On decoloniality: Second thoughts. Postcolonial Studies, 23(4), 612–618. Morris, K. B. (2017). Decolonizing solidarity: cultivating relationships of discomfort. Settler Colonial Studies, 7(4), 456-473. Noh, J-E. (2025). Navigating research, development practice, and activism as a transnational pracademic. Development in Practice,35(2), 244-249. Tong, S., Samet, J. M., Steffen, W., Kinney, P. L., & Frumkin, H. (2023). Solidarity for the Anthropocene. Environmental Research, 235:116716. Walsh, C. (2012). ‘Other’ knowledges, ‘other’ critiques: Reflections on the politics and practices of philosophy and decoloniality in the ‘other’ America. Transmodernity, 1(3), 11–27. |
매년 8월 9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선주민의 날(International Day of the World's Indigenous Peoples)입니다. 전 세계 선주민들에 대한 인식을 증진하고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1994년 유엔 총회에서 제정한 날인데요. 한국에서는 맥락에 따라 원주민, 토착민으로 불리기도 하는 선주민은 문자 그대로 '먼저 살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나중에 이주해 온 집단 혹은 식민 지배 세력과 대비하여 '앞서서' 어떤 곳에 뿌리내리고 있던 이들을 지칭합니다. 후에 온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권리를 침해당하고 비주류로 밀려난 맥락을 강조할 때 주로 '선주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죠.
선주민 권리 침해는 다양한 양상을 띱니다. 정착민 사회와의 관계에서 구조적 차별과 배제, 불평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개발 세력에 의해 삶터와 생명을 잃는 개발 피해의 사례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지난 2018년 7월 23일 발생한 라오스 세피안-세남노이 댐 붕괴 사고가 바로 그러한 경우죠. ‘세이프가딩’과 ‘권리 기반 접근(Rights‑based Approach)’이 국제개발협력 현장에서 점차 보편적인 언어로 자리잡아 가고 있지만, 한국 국제개발협력에서 권리의 중심에 선주민을 둔 논의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습니다. 정부 ODA가 국익 추구를 전면적 목적으로 내세우며 외교·통상의 수단으로 공고해져 가는 지금, 현장과 당사자 중심의 관점이 어느 때보다 더욱 강조되어야 할 시점입니다.
발전대안 피다는 세피안-세남노이 댐 붕괴 사고 7주기 그리고 세계 선주민의 날 31주년이 돌아오는 2025년 여름, 선주민과의 관계에서 국제개발협력을 성찰해 보는 기획 시리즈를 선보입니다. 그 첫 순서로, 발전대안 피다 전문위원이자 호주가톨릭대학교 글로벌윤리센터 리서치 펠로우인 노재은 박사가 소개하는 호주의 사례를 통해 식민주의적 개발 패러다임을 재구성하는 선주민 담론의 현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편집자 주: 통상 유엔 기념일과 선언문의 제목에서는 'Indigenous peoples'를 '원주민'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이 글에서는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권리 주체'로서의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모두 '선주민'으로 통일하여 표기합니다.)
선주민의 발전, 선주민에게서 배우는 발전
호주의 선주민
8월 9일은 세계 선주민의 날(International Day of the World’s Indigenous Peoples)이다. 1994년 유엔에서 제정한 이래 매년 기념되고 있지만, 사실 나는 이 날을 기념하는 그 어떤 행사도 참여한 기억이 없다. 대신 내가 거주하고 있는 호주에서는 7월 첫째 주에 NAIDOC(National Aborigines and Islanders Day Observance Committee, 전국 선주민 및 군도민의 날 기념위원회) 기간이라고 해서 선주민들의 역사, 문화, 업적을 기억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올해는 아래 포스터가 보여주듯이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앎과 삶을 토대로 공동의 비전을 이어가고 재창조하는 미래 세대를 강조했다.
(포스터 이미지 출처: NAIDOC 웹사이트 링크)
지난 20여 년간 나의 주요 화두는 인권과 발전이었다. 그렇지만 사실 선주민 권리는 오랫동안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주제였다. 그러다 호주에 와서 지내다 보니 아무래도 선주민들의 아픈 역사와 그 현재성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종종 있다. 무슨 행사든지 시작할 때 'Acknowledgement of Country*'라는 의례를 통해 선주민을 이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 지속성을 존중한다는 문구를 읽고, 외국인 참여자가 많거나 대규모의 행사에서는 'Welcome to Country*'라고 해서 그 해당 지역 출신 선주민이 춤, 노래, 이야기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환영하는 의례를 가진다. 2020년 호주 개발학 학회(Development Studies Association of Australia) 창립 컨퍼런스 자리에서 식민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개발학이라는 학문과 호주라는 터전에 대한 성찰이 학회 정체성의 핵심임을 확인하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 편집자 주: ‘Acknowledgement of Country’와 ‘Welcome to Country’에서 말하는 ‘Country’는 일반적인 영어 단어 ‘country’가 의미하는 ‘국가’나 ‘지역’과는 차별화되는 호주 선주민 전통의 핵심 개념이자 문화적 정체성의 근간이다. 이 개념은 선주민들이 살아가는 땅과 자연 환경뿐 아니라, 그 땅과 영적으로 깊이 연결된 선주민들의 관계, 세계관, 그리고 삶의 방식 전체를 포괄한다.
(사진: 2024년 태평양 지역 워크샵을 진행하면서 필자가 찍은 Welcome to Country 진행 장면 / © 2024 노재은)
그렇지만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습은 여전한 차별과 불평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땅, 자원, 아이를 빼앗겼던 식민주의 역사에서 비롯된 고질적인 불평등이 현재에도 여러 차이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를 줄여 가자는 노력의 일환이 2007년에 시작된 'Closing the Gap* 1↗' 캠페인이다. 그러나 여전히 선주민들은 다른 호주인에 비해 평균 수명이 짧고 영아 사망률이 높으며 고등 교육기관 진학률과 고용률도 낮다. 내가 퀸즐랜드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할 때, 토레스 해협 군도 선주민(Torres Strait Islander)**으로는 최초로 해당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노리타 모르수-디옵(Norrita Morseu-Diop)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는 당시 선주민 수감자 인권 문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녀의 연구에 따르면 브리즈번의 청소년 구금 센터(Youth Detention Centre) 수감자의 60% 이상이 선주민이며, 이들 대부분은 가족 중에 성인 수감자가 있었다. 이는 사회적, 구조적 요인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악순환을 보여준다. 내가 만난 또다른 선주민 학자인 앤젤리나 헐리(Angelina Hurley)는 애보리지널 아티스트로 유명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예술 작품, 코미디 영화 등을 통한 저항과 정체성을 이야기한다2↗. 이런저런 다양한 노력들로 선주민 권리의 회복과 향상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는가 싶었지만, 선주민이 호주 최초의 국민이었음을 인정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기구의 설립을 명시하려 했던 2023년 헌법 개정 국민투표는 부결되었다. 이처럼 불의의 역사를 다시 써 나가기 위한 ‘화해(reconciliation)’와 선주민의 ‘자주권(sovereignty)’은 여전히 실현되지 못한 구호로 남아 있다3↗.
* 편집자 주: 호주 선주민이 비선주민 호주인들과 대비하여 경험하는 건강 불평등과 사회적 격차(gap)를 줄이기 위해 호주 정부가 선주민 공동체들과 함께 추진하는 정책 전략이다. 2031년까지 건강, 교육, 고용, 경제, 주거, 사법, 안전, 복지, 문화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19가지 핵심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 편집자 주: 토레스 해협 군도는 호주 본토 최북단 케이프 요크(Cape York)와 파푸아뉴기니 사이의 해협에 위치한 약 274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군도로, 이곳의 선주민들은 호주 본토 선주민(Aboriginal Australians)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호주에서는 자국의 선주민들을 지칭할 때 'Aborigines and Torres Strait Islanders'라고 두 집단을 구분하여 말한다.
발전과 탈식민
전 세계적으로는 약 90개국에 4억 7천 6백만 명의 선주민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전 세계 인구의 6%도 안되지만 지구촌 빈곤 인구의 약 15%를 차지한다4↗.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7,000여 개, 문화는 5,000여 가지에 이를 만큼 다양하지만, 그 중 상당수가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 환경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삶도 위협받고 있다. 일례로 전기차 개발에 필요한 리튬 매장량이 남아메리카 볼리비아나 칠레에 집중되다 보니, 다국적 기업이 몰려들어 리튬을 채굴·분리하는 과정에서 주변 환경의 오염 및 사막화가 심해지면서 인근에 거주하는 선주민들이 심각한 물 부족과 생계 수단 부족의 문제를 겪고 있다5↗ 6↗. 1989년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169로 알려진 ‘선주민과 부족민에 관한 협약(Indigenous and Tribal Peoples Convention)’, 그리고 2007년에 유엔에서 채택된 ‘선주민 권리 선언(UN Declaration on Indigenous Peoples)’은 이들의 자결권, 문화 및 언어 보존권, 토지 및 자원 접근권, 의사 결정에의 참여권을 강조한다. 자신들의 필요와 문화에 적합한 발전을 추구할 권리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선주민 권리 선언 제 39조는 국제협력을 통해 재정적, 기술적 지원에 접근할 권리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과연 선주민들에게 국제협력, 그리고 발전의 의미는 무엇일까? 선주민들의 역사가 식민주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듯이, 발전의 역사 또한 그러하다. 고백하건대, 개발학 석사를 영국에서 하겠다 결정할 때는 이 점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내가 서섹스에서 공부하는 걸 선택했던 큰 이유였던 로버트 챔버스(Robert Chambers) 교수님이 한때 식민지 행정관(colonial administrator)으로 근무했던 사실을 알고 새삼 그 연결고리에 생각이 미쳤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호주에 살면서, 그리고 글로벌 연구팀에서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학자들과 함께 연구를 하면서 식민주의적 사고와 지식 생산 방식에 대한 도전을 끊임없이 받는다(Noh, 2024). 그간 소위 선진적이라는 공여국에서 '누가', '무슨 얘기'를 하나, '어떻게' 하고 있나에 레이더가 맞춰져 왔기 때문이다. 탈식민주의(decoloniality)는 식민 지배 시절의 경제적 착취 및 사회적, 문화적 지배가 현재도 뿌리 깊은 영향을 행사하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실천(praxis)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실천에서 중요한 요소가 바로 서구 위주의 지식 위계와 지식 생산 방식을 타파하고, 그 동안 변방부라고 소외되어 온 지식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Mignolo, 2020; Walsh, 2012).
선주민들에게서 배우는 발전
콜롬비아 출신 인류학자이자 탈발전 담론의 대표주자인 에스코바르(Arturo Escobar)는 일찍이 발전을 다시 새롭게 만들어가려면 — 그의 표현을 빌면 ‘발전 대안’(development alternatives)이 아닌, ‘발전 너머의 대안’(alternatives to development) — 발전의 조건이자 변화의 동력이 되는 로컬의 삶과 그 역사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Escobar, 1995). 이는 단순히 선주민이나 그들의 지식을 열등하다고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존중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주민의 지식과 존재론이 제시하는 대안적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Kothari & Klein, 2023). 선주민의 지식을 개발에 통합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특히 참여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그리고 농업 분야에서 지속가능한 농업을 이야기하면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주민의 지식을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하거나, 무조건 이상적으로만 보는 시각에는 한계가 있다(Briggs, 2008). 사실 그들의 지속가능한 농업 방식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태도, 자연을 내 존재의 일부로 여기는 세계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Kimmerer, 2017; Morris, 2017). 이는 인간을 개별적 주체로 보는 서구의 존재론과 다른다. 선주민들의 관계 중심 존재론에서는 나와 타인, 그리고 인간과 자연 간 관계를 서로를 구성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런 관계성이 바로 책무성의 근간이 되며, 그 책무성의 범주가 미래 세대, 동물, 지구 전체로 확대된다(Tong et al., 2023).
생산과 소비의 극대화, 기술 만능주의로 대표되는 현재의 체제에 잘 적응하도록 돕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역량 강화, 우리가 꿈꾸는 발전은 아닐 것이다. 세계 선주민의 날을 맞아 그들의 메시지에 귀 기울여 보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오래된 미래>에서 일찌감치 통찰했듯, 우리는 발전의 미래를 만들어갈 가치와 방법을 그 속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일 기록을 갱신하는 무더위 속에서 — 나는 추위 속에서 —, 지금 이 순간과 미래에 존재할 모든 생명체의 안녕을 생각한다.
글쓴이: 노재은
호주가톨릭대학교 글로벌윤리센터 리서치 펠로우
발전대안 피다 전문위원
참고문헌 및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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