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과 사람들[피다X라플] 쿠데타 이후 찾아올 봄, 내일의 미얀마를 준비합니다 (미얀마닷봄 활동가 4인 인터뷰)

2025-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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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이후 찾아올 봄, 

내일의 미얀마를 준비합니다


항상 '밖'을 향하는 것이 기본값인 국제개발협력의 시선을 '안'으로 돌려 볼 수는 없을까요?
발전대안 피다는 국제개발협력의 안팎과 활동가의 사이를 흐르는 콘텐츠를 만드는 비영리 스타트업 라운지플러스와 함께 이주민을 주제로 2부작 특별기획을 준비했습니다. 송금이나 귀환 같은 '현상'이 아닌, 우리와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삶'이 넓은 범주에서의 국제개발협력과 교차하는 지점을 포착해 보았습니다.
그 두 번째 순서로 미얀마-매솟-한국의 미얀마 청년 활동가들이 쿠데타 이후 미얀마 지역사회의 복원을 위해 힘을 합쳐 설립한 단체, 미얀마닷봄(MYANMAR.VOM)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사진 출처: 미얀마닷봄 홈페이지(링크)



"미얀마의 마을 복원은 시민의 삶을 공동체로 잇는 ‘MYAAMAR.VOM'

  - Wai Nwe Hnin Soe (공동대표)

‘미얀마 시민의 삶을 잇는 마을 복원’은 미얀마청년들이 결성한 MYANMAR.VOM의 지향이다. MYANMAR.VOM은 2024년 상담/기록활동가 교육, 국내-매솟-미얀마를 연결하는 청년 워크의 결과이다. 그 시간 안에서 청년들은 새로운 미얀마 사회를 상상하려고 애썼다. 미얀마의 진실 기록과 주민의 생존을 위해 그들은 마을 활동가로 성장해 보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각자가 가진 작은 기금을 모아 스스로의 단체를 설립했다. 청년들은 기록/상담/농업 그리고 리더십 훈련을 통해 훗날 본국으로 돌아가 각자의 고향에서 주민들과 시작하는 지역사회복원 활동을 꿈꾼다. 시작은 작고 미비할 것이다. 이 시작을 큰 걸음으로 만드는 일은 이제 시작되었다.



Q. 오는 길에 보니 부평역* 인근에  미얀마 식당, 미얀마 마트, 미얀마어로 안내문이 쓰인 병원이나 핸드폰 대리점 등이 많이 눈에 띄더라고요.
부평 지역에 미얀마분들이 많이 모여 사시는 건가요? (*미얀마닷봄은 수도권 전철 1호선 부평역 인근에 자리한다.)

 

 쬬산   1988년인가부터 미얀마 사람들이 부평에 많이 살기 시작했대요. 


 아웅   (한국 생활) 선배들에게 듣기로 처음 미얀마 마트가 부평 북부 쪽에 생겼고, 그 다음에 미얀마 식당도 처음으로 이곳에 생겼대요. 그러면서 미얀마 음식 먹고 싶거나 서로 교류를 하고 싶으면 부평으로 오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미얀마 식당들도 점점 많아졌다고 해요. 


 쬬산   지금은 다른 여러 지역에도 미얀마 식당들이 많이요. 경기도 광주에도 있고, 평택에도 많고, 수원에도 많고, 나름 많이 있어요. 부평에는 아마 30군데 정도 있는 것 같네요. 우리가 모르는 곳도 많아요.


 아웅   그래도 미얀마 사람들은 휴가나 명절 때 만나자고 하면 부평을 먼저 생각해요. 일단 여기서 모였다가 어디로든 가는 거예요. 예를 들어 여름에 바다 여행을 가잖아요? 그럼 강원도 어디나 부산을 가더라도 일단 부평에 와요. 와서 모여서 같이 가는 편이에요. 이게 문화가 된 것 같아요, 왠지 모르게. 여기는 식당하고 마트밖에 없는데도요. 그래서 명절 때마다 (미얀마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이 주변에 있는 숙박업소들이 꽉 차 있어요.

 

 

Q. 모두 한국에는 어떤 계기로 오셨나요? 그리고 현재는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Honey   저는 한국에 온 지 이제 2년 좀 넘었어요. 본래 한국어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한 한국 NGO의 미얀마 현지 매니저로 8년 넘게 일했었어요. 쿠데타 이후인 2023년까지도 일을 했었죠. NGO이지만 정부 관계자들과도 긴밀하게 소통하며 일을 했었는데요. 저는 쿠데타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시위도 나가고 시민 불복종 운동을 하는 분들도 응원했어요. 그런 제가, 저 스스로는 공무원이 아니지만 계속 이렇게 군부 밑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기가 어렵고 거부감이 들었어요. 일하기가 너무 불편하고, 스스로 창피한 거예요. 그래서 한국의 정부초청장학생 프로그램에 지원해 한국에 왔고, 석사를 수료했어요. 미얀마닷봄 창립멤버이고, 현재는 논문을 준비하면서 반상근으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미얀마닷봄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웅   제가 한국에 온 과정은 너무 평범해요. 저는 이주노동자로, 고용허가제 시스템을 통해 한국어를 배워서 2013년에 한국에 왔어요. 처음엔 이런 제도가 있는지도 몰랐었는데, 당시 친누나가 제안을 한 거예요. 너 이제 학교도 졸업했는데 누나한테 경제적으로 기대지 말고 해외에 가서 뭐라도 좀 하라고요. (웃음) 그땐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고, 일단 한국어 교육을 받고 합격을 하면 갈 수 있다고 해서 지원을 했어요. 

저와 같은 이주노동자는 최대 4년 10개월까지 한국에서 일을 할 수 있고, 그 기간이 지나면 본국에 돌아갔다가 재입국을 해야 해요. 그래서 저도 2018년쯤 갔다가 2019년 초에 다시 왔고요. 그때는 3년 정도만 있다가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코로나 영향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는 2021년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반군부 활동도 하고 시위도 나가고 그러다 보니 이제는 미얀마에 아예 못 가는 상황이에요. 지금은 군부독재타도위원회라는 단체에서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고, 미얀마닷봄에서도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쬬 산   저는 2016년에 한국에 왔어요. 미얀마를 지원하는 활동은 2017년부터 시작했는데요. 2017년부터 2020년까지 미얀마의 한 학교에 책도 보내 주고 돈이 없어 학교에 잘 못 가는 아이들에게 학용품과 학비도 조금씩 보내 주는 일을 고향의 친구들, 그리고 한국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에 있는 친구들과 같이 했었어요. 2020년에 코로나가 터지면서 학교들이 문을 닫았지만, 제가 당시 평택에서 일하고 있어서 평택미얀마공동체에서 활동하며 어려운 학생들을 계속 지원했고요. 2022년부터는 22개 단체의 연합체인 미얀마연방민주주의승리연합(MFDMC)에서도 활동하고 있고, 지금은 총무와 사무국장직을 수행하고 있어요.


 HM   저도 쿠데타 이전에 한국에 왔어요. 미얀마에서 한국어 전공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한 8년 정도 한국과 관련된 여러 직장을 다니다가 2018년 하반기에 한국으로 유학을 왔죠. 이것저것 활동을 하느라 졸업이 늦어져서 2023년에 졸업을 했고요. 미얀마닷봄이 생기기 전에는 해외주민운동연대(KOCO)의 활동을 많이 도와드렸습니다. 



Q. 한국 생활을 하시는 데에 있어 어려움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인가요? 

 

 쬬산   처음 왔을 때 제일 어려웠던 거는 언어랑 식사였어요. 한국어도 잘 못하고, 매운 음식도 못 먹으니까요. 

그리고 문화 차이도 있었는데, 미얀마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이 앞에 있으면 어린 사람이 팔짱을 껴요. 이게 윗사람에 대한 존경의 표시예요. 우리는 학교에서도 팔짱을 끼고 선생님께 "밍글라바" 하고 인사했어요. 그런데 한국에 와서 사장님한테 처음 인사하는데 제가 팔짱을 끼고 하니까 '야, 너 뭐야' 하고 화내고 욕하면서 때리더라고요. 

처음 6개월 정도는 매일 울 정도로 회사 일이 너무 힘들었어요. 당시에 경기도 광주 근처의 곤지암에서 일했거든요. 광주에 있는 한 교회에 가서 "한국어 가르쳐 주세요" 그랬어요. 한국어 못해서 너무 힘들다고. 그래서 거기서 한국어를 배웠어요. 한국어가 어느 정도 되니까 "때리지 마세요, 때리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 거죠. 그랬더니 깜짝 놀라면서 누가 가르쳐 줬냐고 그러더라고요. 말로 해도 되는데 배 때리고 머리 때리고 등 때리고. 정해진 출근 시간보다 일찍 와서 청소하게 시키고, 일 끝나고도 30분 정도 더 남아서 청소하라고 하고. 이런 것도 "그러면 안 되는 거다, 노동부에 신고하겠다" 하니까 그때부터는 안 때리더라고요.


 HM   제가 제일 힘들었던 건 학교를 졸업한 직후였던 것 같아요. D-2 비자로 온 유학생들은 졸업을 하면 2주 안에 비자가 D-10 구직 비자로 바뀌거든요. 말 그대로 구직 활동을 위한 비자인데, 한국 회사들에서는 이 비자를 가진 사람을 채용하고 싶어하지 않아요. 아마 행정 절차라든지 이것저것 서류를 만들어야 되는 게 많아서 번거로운가 봐요. 아무튼 그 구직 비자로는 소득이 잡히면 안 되는데 취직도 어려우니까 그 기간이 제일 어려웠던 것 같아요. 취직을 할 때도 외국인들이 오면 무조건 '너희 나라가 돈이 없어서 여기 일하러 온 거지?' 하는 마인드가 기본으로 깔려 있다 보니까 존중을 못 받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여기 강인남 대표님하고도 KOCO에서부터 지금까지 같이 해왔던 게, 인권을 기본으로 한 시민단체이기 때문에 사람으로서 존중받고, 제가 좋아하는 활동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보니 함께하게 되는 것 같아요.



Q. 이주민들에게는 비자 문제가 확실히 가장 골치아픈 일인 것 같아요.


 쬬산   저는 E-9 비자*로 한국에 왔어요. 그런데 회사를 다니다 허리를 다쳐서 일을 할 수가 없게 됐는데, E-9 비자를 가진 사람들은 한 회사를 그만두면 3개월 이내에 새로운 회사에 취업을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허리가 아파서 회사를 못 다니니까 '불법체류자'가 되었어요. 그 상태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군부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다 보니 얼굴도 알려지고 뉴스에도 나오면서 블랙리스트에도 오르고 체포 영장도 나오고. 그래서 미얀마에 못 들어가게 되어서 지금은 난민 비자를 신청한 상태예요.

'불법체류' 상태가 아니라면 인도적 체류 비자를 신청해 볼 수도 있는데, 저는 그럴 수가 없어요. 난민 비자밖에 방법이 없는데, 2022년 8월에 신청해서 벌써 3년이 넘었는데 아직 인정이 안 됐어요. 합법적으로 E-9 비자 상태에서 난민 신청을 하면 6개월 동안은 나라에서 한 달에 20~30만 원을 주는데, 저처럼 '불법체류' 상태에서 난민 비자를 신청하면 그것도 없고, 생계를 위한 활동도 못 해요.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게 확인되면 벌금을 물 수 있거든요. 월세도 내야 하고 생활비도 드는데,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어요. 그냥 살 수만 있게 허락을 한 건데, 정작 살기 위한 활동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웃기지 않나요? 

* E-9 비자: 고용허가제에 따라 비전문 취업을 위해 발급되는 외국인 근로자용 취업 비자


 아웅   지원금을 받더라도 20만 원, 30만 원 가지고 한국에서 어떻게 버티겠어요? 그러니까 그마저도 지원을 못 받은 사람은 물론이고 지원을 받는 사람들도 몰래 일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몰래 하다가 만약에 걸리면 벌금이 200만 원부터 나와요. 무슨 돈으로 저희가 그걸 낼 수 있겠어요?



Q. 쿠데타 이후 더 어려워진 상황도 있나요?


 HM   은행 업무를 볼 때 미얀마 국적이라 어려움이 많아요. 똑같은 외국인이어도 미얀마 국적이면 모든 경제적인 활동에 제재가 붙거든요.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에서 제재하는 나라가 전 세계에 단 3개국뿐인데, 이란, 북한, 그리고 미얀마예요. 그러다 보니 계좌 개설도 잘 안 해 주고요. 학교 등록금을 내기 위해 미얀마에서 돈을 받는 이 서류 저 서류 추가적으로 요구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서류가 다 갖춰져도 처리를 안 해주는 지점들도 많고요.


 Honey   저는 학교에서도 잘 챙겨 주고 주변에 좋은 사람들도 많아서 딱히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여기 친동생들도 있거든요. 남동생 둘이 한국에 와 있어요. 한 명은 2018년에 이주노동자로 들어왔고, 막내는 쿠데타 후에 미얀마 학교를 그만두고 여기서 다시 대학교를 다니고 있어요. 저는 서울에, 동생들은 전주와 보령에 각각 떨어져 살고 있죠. 

어려웠던 경험이라면 저도 은행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통장을 만들러 갔는데, 미얀마가 블랙리스트에 들어가서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실보다도 은행 직원의 태도 때문에 너무 서러웠어요. 학교에서도 담당자가 연락해서 '장학생이니까 이렇게 해 주세요' 하고 부탁을 했고, 저도 소명에 필요한 서류를 다 준비해 갔는데도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은 바로 처리해 주면서 저는 아무리 정부초청장학생이어도 안 된다면서 거칠게 말을 하더라고요. 결국 전 3개월이나 지나서 겨우 통장을 만들 수 있었어요. 물론 그 직원분도 그냥 자기 일을 했을 뿐이겠지만... 모르겠어요. 그때는 뭐가 그렇게 서운했는지, 은행 앞에서 눈물이 펑펑 나더라고요.



미얀마닷봄 사무실에 비치된 단체 소개 자료


Q. 미얀마닷봄은 처음에 어떻게 조직이 되었고, 어떤 미션을 가지고 있나요?

 

 HM   미얀마닷봄은 올해 2월 22일에 정식 출범해서 이제 1년차인데요. 2024년 여름에 진행된 8주 과정의 기록 교육과 상담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한국 내 미얀마인 활동가들이 연말쯤에 다시 모였었어요. 혁명도 장기전에 접어든 만큼 미얀마 사람들도 지쳐가고 있는데, 우리가 여기 한국에 있으면서 미얀마를 위해 뭘 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을 했죠. 지역사회 복원이 필요한데, 미얀마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니까 일단 농업이 들어갔고요. 그리고 또 하나는 기록이었어요. 한국에서는 모든 것의 기록이 잘 되어 있잖아요. 미얀마에서 이런 쿠데타가 발생했는데, 우리가 이 시기의 시민들의 역사와 증언을 기록으로 남겨서 나중에 정권이 바뀌었을 때 사회적 처벌이 이뤄질 수 있도록 증거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었어요. 이렇게 미얀마 지역사회 복원을 위해 농업과 기록이라는 두 가지 축을 세우게 된 거죠.



Q. 미얀마닷봄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은 어떤 분들이세요?


 HM   저희는 각자 미얀마를 위해 활동하는 소속 단체나 활동 단위가 있는 사람들이 미얀마닷봄의 창립위원으로 모였어요. 그러니까 그 소속 단체들이 미얀마닷봄의 멤버인 것이 아니라, 그 단체들에 소속된 개개인이 창립멤버가 된 거죠. 강인남 대표님까지 포함해서 총 11명의 창립멤버가 있어요. 여기에 각 창립멤버들이 저마다 데려온 운영위원들까지 포함해서 총 17명의 멤버들이 있어요. 

사무국에는 대표님과 Honey 활동가, 그리고 저 이렇게 세 명이 주 1회씩 출근을 하고 있고요. 영상 편집 같은 것을 도와주는 친구가 또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창립멤버들과 운영위원들이 함께 회의를 하는데요. 상황에 따라 비대면으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꼭 얼굴을 보자고 하고 있어요. 



Q. 미얀마닷봄이라는 이름이 독특하고 예쁘다고 느꼈는데요. 어떤 의미가 담겼나요?


 HM   미얀마닷봄이라는 이름은 공동의 아이디어로, 투표를 통해 결정됐어요. 사람들이 들었을 때 신선하다, 재미있다고 느낄 수 있는 이름을 만들고 싶었는데요. 미얀마, 그리고 닷은 풀 스톱(마침표)이에요. 뭔가 하나를 마무리할 때 풀 스톱을 쓰잖아요. 이전의 미얀마는 마무리하고 새로운 미얀마를 시작한다는 의미죠. 그리고 봄(VOM)은 Voice Of Myanmar, 즉 미얀마의 목소리, 또는 Village Organizing Movement, 마을 조직 운동이에요. 흩어지는 지역사회를 우리가 다시 조직해서 새로운 미얀마를 만들자는 의미로 미얀마닷봄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봄이라는 게 한국어로는 계절의 봄을 뜻하기도 하잖아요. 미얀마의 봄, 미얀마 봄의 혁명, 이런 의미도 내포돼 있어요.



Q. 구체적으로 하시는 활동은 어떤 것인가요?


 HM   반군부 활동 연대도 하고 있지만, 주로 교육, 특히 의식화 교육을 많이 하려고 해요. 미얀마 지역사회 복원을 위한 활동가들을 양성한다고 생각하시면 되는데요. 언어 교육도 하고 있고요. (미얀마 이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 회화, TOPIK 준비반, 사회통합 교육을 진행하고 있어요. 상반기에는 영어 교실도 운영했고요. 

기록 교육과 농업 교육은 내부 멤버들, 그리고 줌을 통해 미얀마 현지 활동가들이 참여해요.  그 외에도 외부 사람들도 함께할 수 있는 기행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고요. 광주, 제주 강정마을을 다녀왔고 최근에는 지리산에 갔어요. 활동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너무 힘들어지는 순간이 오잖아요. 함께 마음의 치유도 하고, 지리산이 자연농업으로 유명하니 농업도 배울 겸 기행을 다녀 왔습니다.

11월 말에는 농업팀이 치앙마이에 갈 예정이에요. 농업 기술을 배우는 것도 있지만, 농업 철학도 배우면서 미얀마의 농업을 어떻게 되살릴지 같이 고민하는 시간이 될 거예요.




Q. 한국 내에서 활동하는 미얀마인 당사자 조직 또는 미얀마 지원을 위한 단체는 여러 곳이 있는데요. 
미얀마닷봄의 활동이 갖는 차별점이나 특수성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HM   쿠데타 이전에도 한국에는 미얀마 단체들이 있었고 쿠데타 이후에 생긴 단체들도 많지만 미얀마닷봄의 경우에는 쿠데타 이후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차별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쿠데타 이후에 지역사회 복원을 어떻게 하느냐, 그런 걸 생각해서 활동을 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거든요. 기존 단체들 중에는 인권 단체나 이주노동자 지원 단체, 단순히 미얀마 내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단체들도 있고, 쿠데타 이후에는 피난미 지원 단체나 PDF*를 지원하는 단체도 생겼어요. 하지만 미얀마닷봄은 지금 시점을 활동의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쿠데타 이후에 정권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주민들이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다시 새로운 미얀마를 만들 때 무얼로 만들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기록과 농업으로 하자고 한 거죠. 

PDF(People's Defence Force): 2021년 쿠데타 이후 창설된 미얀마 민족통합정부의 군대로, 현 군부에 대한 저항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Q. 미얀마닷봄은 활동가의 마음건강에도 많이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아요.


 HM   저희가 미얀마닷봄 자체를 만든 것도 어떻게 보면 미얀마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따뜻한 집이었으면 좋겠다는 의미가 있는 거거든요. 어떻게든 여기에 찾아오면 정신적인 지지가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어요. 미얀마를 위해 활동하는 분들이 최대한 마음 편하게, 효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미얀마닷봄이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고, 그래서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미얀마 분들이 여기 와서 함께 머물 수 있는 그런 따뜻하고 포근한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서로 배려하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려고 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내가 내 할 일만 하다가 지쳐 갈 수 있는데, 사람이 금전적인 지원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지원이 없으면 오래 버티기 힘들잖아요. 저희끼리 그래서 비대면으로 줌 회의를 하는 것보다는 귀찮더라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얼굴을 보자고 하는 것도 그런 취지예요. 



Q. 덕분에 미얀마닷봄의 미션을 잘 이해할 수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앞으로 미얀마닷봄의 활동을 보게 될 한국의 시민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쬬산   미얀마와 한국 간에 교류할 수 있는 그런 중간 다리 역할로 미얀마닷봄을 기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웅   한국에는 쿠데타 이후에 미얀마를 알게 된 사람들도 있고, 올 봄에 지진이 났을 때 후원을 하고 싶은데 어디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꽤 많더라고요. 그런 분들께는 미얀마닷봄이 한국과 미얀마를 이어주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잘 모르는 분들이 미얀마 하면 미얀마닷봄을 떠올리면 좋겠어요. 여기엔 믿을 만한 사람들이 모여 있고, 미얀마 내부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후원을 하려면 어디로 연락을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미얀마를 돕고 싶을 때 미얀마닷봄이 있다는 걸 떠올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으로 보는 미얀마닷봄 활동과 창립 과정

▲ 2024년 5월~6월까지, 미얀마 청년들은 미얀마 시민의 희생을 기록하기 위해 스스로의 삶을 내어놓고 함께 대화하는 훈련을 진행했다.
▲ 한국의 청년들은 훈련을 마친 후 스스로 강사가 되어 미얀마와 매솟 청년들에게 기록에 대해 교육했다. 그리고 2025년 12월 12일-15일 태국과 미얀마 국경의 매솟에서 만나, '미얀마 마을공동체 복원'의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 1년여 교육과 준비를 마치고, 미얀마닷봄을 설립했다. 현장의 평화,민주주의, 농업과 마음수련을 하며, 지난 9월 26일에는 총회를 통해 직접 민주주의를 경험했다. 



온라인으로 미얀마닷봄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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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진행: 장예지 (라운지플러스 대표·발전대안 피다 운영위원)

정리: 김향지 (발전대안 피다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