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는 철학이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의 국제개발협력 정책에 대한 시민사회의 제안> 토론회-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40여 일이 넘었다. 본격적인 인사청문회가 시작되면서 난항을 겪긴 했지만, 여전히 국정 운영 지지도는 80% 내외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역할을 하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도 조만간 국정과제 작업을 마무리하고 다음 달 초 발표할 예정이다. 그러한 가운데, 한국 국제개발협력 시민사회는 지난 6월 13일 국회에서 ‘문재인 정부의 국제개발협력 정책에 대한 시민사회의 제안’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새 정부의 개혁적인 행보에 거는 기대와 그에 반해 다소 ‘덜 혁신적인’ 공약에 대한 우려를 안고 시민사회와 학계, 언론, 청년 당사자 등이 문재인 정부 국제개발협력의 방향성을 제안하는 자리였다. 기대와 우려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졌지만, 열띤 토론이 오갔던 몇 가지 핵심적인 쟁점들을 추려 소개한다.

▲ 토론회 발제, 토론 패널들의 모습 ©국제개발협력시민사회포럼(KoFID)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철학과 이념은 무엇이어야 하나?
이번 토론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룬 주제는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철학과 이념이었다. 단순히 철학이 필요하다는 선언적 주장에 그치기보다는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역사적 흐름에서 이 논의가 왜 중요한지, 다른 국가들은 이념적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또 한국은 어떤 ‘가치’를 담아야 하는지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논의가 오갔다. 먼저 문재인 정부의 국제개발협력 정책공약 평가를 발제한 한재광 발전대안 피다 대표는 발표 말미에 이번 정부의 주요 과제로 ‘철학과 이념 정립’을 제시하면서 배경적 필요성을 소개했다. 한재광 대표는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간 한국 국제개발협력이 공여국 사회에 참여해 국제규범을 내재화하고, 법과 제도적 측면에서 기본적 틀을 갖추는 시기였지만, 동시에 ODA/GNI 비율과 같은 국제사회 공약도 지키지 못했을뿐더러 ‘분절화’ 문제도 극복하지 못했고, 자원외교, 코리아에이드 등의 부작용을 남겼다고 비판했다. 특히 ‘우리가 왜 원조를 해야 하는지’, ‘한국 국제개발협력이 국익추구를 위한 것인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위한 것인지’와 같은 근본적인 논의는 하지 못한 채, 외형적으로만 성장해왔다는 점을 중요하게 지적했다. 그러면서 실용성을 우선시하는 보수정부를 지나 근본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민주정부가 들어선 지금이 이 논의를 시작할 적기라고 강조했다.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철학과 이념에 대한 제안’ 발제를 맡은 김태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는 철학과 이념을 둘러싼 국내외 논의들을 한층 더 자세하게 소개했다. 김태균 교수는 2010년 제정된 국제개발협력기본법의 기본정신을 근거로 한국 원조의 철학과 이념이 부재하다고 단언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속가능한 발전〮인도주의 실현’과 ‘경제협력 추진’으로 나뉘어 있는 현재의 기본정신이 ODA 정책과 집행의 지침서로 작동하기보다는 무상과 유상으로 이분화된 추진체계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보았다. 또, 다른 공여국의 사례로 외교ž안보 중심의 미국과 영국, 경제ž상업 중심의 일본과 독일, 프랑스, 인도주의 중심의 북유럽 국가, 남남협력 중심의 BRICs 국가를 소개했다. 특이한 점은 북유럽 국가들이 인도주의를 주요 이념으로 채택한 배경이 순수한 인도주의 정신 때문이라기보다는 독특한 외교ž안보환경에서 철저한 전략적 결과라는 것이다. 북유럽은 식민지를 경영한 제국주의적 경험이 없는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데다 인도주의를 강조함으로써 규범이나 패러다임 측면에서 국제사회를 선도하고 다른 공여국들과의 차별성을 만들어왔다. 김태균 교수는 한국도 제국주의 경험이 없는 국가로 북유럽의 사례처럼 동아시아에서 일본, 중국과 차별성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국가 중심으로 발전해 온 경제개발 경험을 토대로 유상원조와 양자원조, 구속성 원조 각각의 비율이 높다는 공통성이 있는데, 한국이 무상원조 중심의 인도주의로 가는 것이 전략적으로도 차별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토론자들은 철학과 이념의 토대가 되어야 할 가치들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토론자로 참여한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과 장대업 교수는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개인과 공동체를 희생하는 방식의 ‘개발주의’에서 탈피하고, 이러한 우리의 발전 경험에 대한 성찰을 국제개발협력에도 동일하게 적용해 ‘좋은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개발 과정에서 희생된 여성, 노동, 환경 등이 주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토론자인 부산 YMCA 송진호 사무총장은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의 16번 목표인 민주주의, 평화, 인권, 거버넌스 정신을 적극적으로 한국 국제개발협력 맥락과 연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깊이 논의되지는 못했지만, ‘철학’과 ‘이념’을 결정하는 데 있어 어떤 관점으로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만큼이나, 과연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갈 것인가도 중요한 지점이다. 지금처럼 정부 관료 중심의 일방적인 논의가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동등하게 논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국제개발협력은 외교정책의 일환인가, 독립된 정책인가?
문재인 대통령의 제19대 대선 정책공약집에는 ‘국익우선 협력외교’ 항목 하위에 ‘공공외교의 전략적 강화’가 명시되어 있고, 그 하위수단으로 국제개발협력 공약들이 나열된다. 즉, 국제개발협력을 외교정책의 하나이자 그중에서도 공공외교의 한 수단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외교정책으로 추진되는 국제개발협력과 그로 인한 ‘국익 추구’에 대해서는 패널마다 의견이 엇갈렸다. 한재광 대표는 한국의 외교ž안보 정책은 현재 중국과 미국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며, 국제개발협력은 직접적인 연관성이 떨어지는 이러한 외교ž안보 정책의 수단이 아닌 한국과 국제사회의 관계를 규정하는 독립적인 단위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진호 총장은 이러한 주장에 동감하면서도 과거 ODA가 자원외교의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새마을ODA와 같이 정권의 입맛에 따라 이용되는 현상을 겪으면서 국민들이 인도주의 정신, 세계평화, 지구촌 빈곤퇴치 등의 문구에 얼마나 동의할지 반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선거 국면에서 정책 공약으로 ‘국익우선 협력외교’와 ‘공공외교’의 틀 안에서 국제개발협력 의제를 설정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김태균 교수도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 대부분이 외교부가 ODA를 관장하는 추진체계이고,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국제개발협력을 국익과 연계하고 있다면서 ODA는 근본적으로 국가 대 국가가 행하는 외교적 행위라고 주장했다. 특히 양자원조는 더욱 외교정책 프레임에서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외교부 산하로 ODA가 통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반면 장대업 교수는 한국의 외교정책은 분단, 북핵 위기, 미국의 지속적인 개입 등으로 ‘상대적 보수성’을 가져왔고, 국제개발협력이 이러한 현실외교와 연관된다면 ‘국익 우선’의 프레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외교부 산하로 통합되는 것은 오히려 ‘개발협력청’과 같은 독립적인 추진체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면서 즉각적인 국익을 대변하는 실질외교로부터 국제개발협력이 가능한 한 빨리 독립되고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공외교 수단으로서의 국제개발협력, 한계인가 기회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강조한 ‘공공외교’가 ODA와 어떻게 연계될 것인가도 주요한 논란거리이다. 한재광 대표는 공공외교 수단으로서의 국제개발협력이 정책 일관성 측면에서는 일견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분명한 한계도 존재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아프리카 지역 주민들에게 한식과 한류 영상을 제공해 논란이 된 ‘코리아에이드’ 프로그램도 공공외교의 한 모습이며, 이처럼 협력대상국 국민들의 호감을 얻기 위한 공공외교가 우선순위가 되면 ‘코리아에이드’와 같은 홍보성 프로그램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장대업 교수는 ‘공공외교의 수단’으로서의 국제개발협력과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국제개발협력 간의 근본적인 모순을 지적했다. 공약에 명시된 문재인 정부의 정책은 한편으로는 국제개발협력을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치를 강화할 공공외교의 ‘수단’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일자리 창출, 기업활동 촉진 등 국내의 성장과제와 ‘연동’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공공외교의 성과가 장기적이고 질적 과제인 반면, 국가 경제에의 기여는 즉각적으로 지표화가 가능한 양적 과제이므로 결국 장기적인 목표가 단기 목표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대업 교수는 결과적으로 공공외교가 실종된 채 국제개발협력이 기업 퍼주기와 원조산업에 청년의 희생을 강요하는 봉사단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공공외교를 일종의 ‘기회’로 긍정적으로 보는 주장도 있었다. 송진호 총장은 코리아에이드의 경우 공공외교 자체가 문제였다기보다는 범부처의 컨트롤 타워가 부재한 상황에서 국정농단 세력이 개입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오히려 정권의 ODA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국제개발협력 정책을 공공외교의 개념틀 속에서 정립하고, 정부 부처의 벽을 뛰어넘는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공공외교는 정부 간 소통과 협상을 일컫는 전통적인 의미의 정무외교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다양한 소프트파워 기재를 활용하여 외국 대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개념이기 때문에 시민사회가 국제개발협력 정책과 현장에 참여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공공외교’ 개념은 이전 정부에서도 계속 사용해왔지만, ODA를 공공외교와 본격적으로 연계해서 추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을 아직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과연 공공외교가 국제개발협력의 의미를 축소하는 것인지,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심층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청년 당사자가 말하는 국제개발협력, 사람을 위한 일이지만 정작 ‘사람’이 없다
이날 토론회에는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인턴, 봉사단 등을 경험한 청년 당사자가 토론 패널로 참여해 특히 주목을 받았다. 패널 이아희 씨는 국제개발협력이 사람을 위한 일이지만, 정작 그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우는 낮다며 새 정부의 국제개발협력 정책은 ‘사람 중심’의 가치를 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 열정을 품고 애쓰는 청년들의 처우 개선과 역량 강화를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몇몇 기관들이 활동가들의 전문적인 교육을 지원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국제개발협력 인력 양성을 위해 초기 단계에서부터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자리 문제도 단순한 일자리 창출이 아닌 양질의 일자리를 위한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는 한국국제협력단(이하 코이카)의 청년인턴 ‘YP(Young Professional)’ 제도에 대한 문제 제기도 이어졌다. YP 제도는 코이카가 국제개발협력 사업현장 실무경험을 통해 전문성을 제고하고 청년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다는 취지로 2011년도부터 시행하고 있지만, 사업목적에 부합해 효과적인 성과를 이루었는지는 의문이라고 보았다. 사업수행기관과 인턴 간의 이해관계 상충으로 갈등이 발생해도 코이카의 개입이 미진해 인턴들이 중간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하는 예도 있고, 최저임금을 적용해 활동비가 지급되더라도 기관에 따라 급여가 매월 지급되지 않거나 중간에서 기관이 가로채는 등 코이카의 관리ž감독이 부실하다는 점과 활동 기간 이후의 취업연계가 쉽지 않다는 점도 문제로 꼽았다. 토론회에 참석한 코이카 인턴 사업수행기관의 한 실무자는 이러한 문제 제기에 공감하며, 지난해 인턴 채용 전과 후 코이카의 지원 내용이 달라져 인턴들이 출장비 등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사례를 언급했다. 당시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여러 기관에 문의하고 의견을 구했지만, 코이카의 눈치를 보는 곳이 많았고, 언론에서도 관심을 두지 않아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적은 월급에 월세, 공과금, 생활비를 감당하기 빠듯했던 경험이나 인턴, 해외 봉사 등 다양한 경로를 거쳤지만, 여전히 구직해야 하는 상황 등 이아희 씨의 개인적인 경험은 비단 한 사람의 특수한 이야기는 아니며, 아마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청년들이 겪는 공통적인 현실일 것이다. 어쩌면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지만, 청년 당사자가 담담하면서도 울컥하며 고백했던 한 마디 한 마디는 큰 울림이 있었다. 국제개발협력 분야의 청년 문제는 이제 더는 “늘 그래왔다”라거나 “현실적으로어쩔 수 없다”라는 태도로 어영부영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부기관 뿐 아니라 많은 비영리단체들도 ‘인턴’과 같은 비정규직으로 정규직 일자리를 대체하고 있고, 청년들이 국제개발 분야에 취직하기 위해 해외봉사, 대학원, 인턴십 등 소위 ‘스펙’을 갖추어도 열악하고 질 낮은 일자리를 선택해야만 하는 처지이다. 운이 좋아 정규직 일자리에 취업한다고 해도, 이들을 역량있는 전문가로 양성하기 위한 제도적 체계나 환경은 거의 전무하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진입하는 청년들만큼이나 떠나는 청년들이 많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자리 문제를 계속 묵인한다면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미래를 이끌어 갈 세대는 없을 것이다. 또한, 분노하고 이야기해도 들어주는 곳이 없었다던 참가자의 말처럼, 부당한 일에 나 자신부터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목소리 내는 것이 필요하다.
변화는 우리의 지향점을 확인하는 데서 출발
철학이나 이념, 가치를 이야기할 때면 ‘순진하다’라거나 ‘이상적이다’라는 비아냥거림이 따라붙으면서 언제부턴가 ‘현실적이지 않은’ 것이 됐다. 하지만 결국 그 철학과 이념, 가치들이 모여 전략과 정책, 사업을 구성하는 단단한 토대가 된다.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고질적인 문제인 ‘분절화’를 해결하려는 방안이 추진체계를 개편하는 것이라면, 그 추진체계는 어떤 철학과 이념을 토대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고민해야 한다.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철학과 이념은 무엇인지”,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국익 추구’와 ‘공공외교’는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와 같이 이번 토론회에서 오갔던 물음들을 계속 가져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국제개발협력’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도 제대로 논의하지 못한 채, 성장하기에만 급급했던 것이 아닐까. 결국, 변화는 우리의 지향점을 확인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 있다.
기사 입력 일자: 2017-06-30
작성: 이유정 발전대안 피다 간사 / daralee0123@gmail.com
지금, 우리에게는 철학이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의 국제개발협력 정책에 대한 시민사회의 제안> 토론회-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40여 일이 넘었다. 본격적인 인사청문회가 시작되면서 난항을 겪긴 했지만, 여전히 국정 운영 지지도는 80% 내외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역할을 하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도 조만간 국정과제 작업을 마무리하고 다음 달 초 발표할 예정이다. 그러한 가운데, 한국 국제개발협력 시민사회는 지난 6월 13일 국회에서 ‘문재인 정부의 국제개발협력 정책에 대한 시민사회의 제안’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새 정부의 개혁적인 행보에 거는 기대와 그에 반해 다소 ‘덜 혁신적인’ 공약에 대한 우려를 안고 시민사회와 학계, 언론, 청년 당사자 등이 문재인 정부 국제개발협력의 방향성을 제안하는 자리였다. 기대와 우려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졌지만, 열띤 토론이 오갔던 몇 가지 핵심적인 쟁점들을 추려 소개한다.
▲ 토론회 발제, 토론 패널들의 모습 ©국제개발협력시민사회포럼(KoFID)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철학과 이념은 무엇이어야 하나?
이번 토론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룬 주제는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철학과 이념이었다. 단순히 철학이 필요하다는 선언적 주장에 그치기보다는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역사적 흐름에서 이 논의가 왜 중요한지, 다른 국가들은 이념적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또 한국은 어떤 ‘가치’를 담아야 하는지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논의가 오갔다. 먼저 문재인 정부의 국제개발협력 정책공약 평가를 발제한 한재광 발전대안 피다 대표는 발표 말미에 이번 정부의 주요 과제로 ‘철학과 이념 정립’을 제시하면서 배경적 필요성을 소개했다. 한재광 대표는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간 한국 국제개발협력이 공여국 사회에 참여해 국제규범을 내재화하고, 법과 제도적 측면에서 기본적 틀을 갖추는 시기였지만, 동시에 ODA/GNI 비율과 같은 국제사회 공약도 지키지 못했을뿐더러 ‘분절화’ 문제도 극복하지 못했고, 자원외교, 코리아에이드 등의 부작용을 남겼다고 비판했다. 특히 ‘우리가 왜 원조를 해야 하는지’, ‘한국 국제개발협력이 국익추구를 위한 것인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위한 것인지’와 같은 근본적인 논의는 하지 못한 채, 외형적으로만 성장해왔다는 점을 중요하게 지적했다. 그러면서 실용성을 우선시하는 보수정부를 지나 근본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민주정부가 들어선 지금이 이 논의를 시작할 적기라고 강조했다.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철학과 이념에 대한 제안’ 발제를 맡은 김태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는 철학과 이념을 둘러싼 국내외 논의들을 한층 더 자세하게 소개했다. 김태균 교수는 2010년 제정된 국제개발협력기본법의 기본정신을 근거로 한국 원조의 철학과 이념이 부재하다고 단언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속가능한 발전〮인도주의 실현’과 ‘경제협력 추진’으로 나뉘어 있는 현재의 기본정신이 ODA 정책과 집행의 지침서로 작동하기보다는 무상과 유상으로 이분화된 추진체계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보았다. 또, 다른 공여국의 사례로 외교ž안보 중심의 미국과 영국, 경제ž상업 중심의 일본과 독일, 프랑스, 인도주의 중심의 북유럽 국가, 남남협력 중심의 BRICs 국가를 소개했다. 특이한 점은 북유럽 국가들이 인도주의를 주요 이념으로 채택한 배경이 순수한 인도주의 정신 때문이라기보다는 독특한 외교ž안보환경에서 철저한 전략적 결과라는 것이다. 북유럽은 식민지를 경영한 제국주의적 경험이 없는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데다 인도주의를 강조함으로써 규범이나 패러다임 측면에서 국제사회를 선도하고 다른 공여국들과의 차별성을 만들어왔다. 김태균 교수는 한국도 제국주의 경험이 없는 국가로 북유럽의 사례처럼 동아시아에서 일본, 중국과 차별성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국가 중심으로 발전해 온 경제개발 경험을 토대로 유상원조와 양자원조, 구속성 원조 각각의 비율이 높다는 공통성이 있는데, 한국이 무상원조 중심의 인도주의로 가는 것이 전략적으로도 차별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토론자들은 철학과 이념의 토대가 되어야 할 가치들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토론자로 참여한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과 장대업 교수는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개인과 공동체를 희생하는 방식의 ‘개발주의’에서 탈피하고, 이러한 우리의 발전 경험에 대한 성찰을 국제개발협력에도 동일하게 적용해 ‘좋은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개발 과정에서 희생된 여성, 노동, 환경 등이 주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토론자인 부산 YMCA 송진호 사무총장은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의 16번 목표인 민주주의, 평화, 인권, 거버넌스 정신을 적극적으로 한국 국제개발협력 맥락과 연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깊이 논의되지는 못했지만, ‘철학’과 ‘이념’을 결정하는 데 있어 어떤 관점으로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만큼이나, 과연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갈 것인가도 중요한 지점이다. 지금처럼 정부 관료 중심의 일방적인 논의가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동등하게 논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국제개발협력은 외교정책의 일환인가, 독립된 정책인가?
문재인 대통령의 제19대 대선 정책공약집에는 ‘국익우선 협력외교’ 항목 하위에 ‘공공외교의 전략적 강화’가 명시되어 있고, 그 하위수단으로 국제개발협력 공약들이 나열된다. 즉, 국제개발협력을 외교정책의 하나이자 그중에서도 공공외교의 한 수단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외교정책으로 추진되는 국제개발협력과 그로 인한 ‘국익 추구’에 대해서는 패널마다 의견이 엇갈렸다. 한재광 대표는 한국의 외교ž안보 정책은 현재 중국과 미국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며, 국제개발협력은 직접적인 연관성이 떨어지는 이러한 외교ž안보 정책의 수단이 아닌 한국과 국제사회의 관계를 규정하는 독립적인 단위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진호 총장은 이러한 주장에 동감하면서도 과거 ODA가 자원외교의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새마을ODA와 같이 정권의 입맛에 따라 이용되는 현상을 겪으면서 국민들이 인도주의 정신, 세계평화, 지구촌 빈곤퇴치 등의 문구에 얼마나 동의할지 반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선거 국면에서 정책 공약으로 ‘국익우선 협력외교’와 ‘공공외교’의 틀 안에서 국제개발협력 의제를 설정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김태균 교수도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 대부분이 외교부가 ODA를 관장하는 추진체계이고,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국제개발협력을 국익과 연계하고 있다면서 ODA는 근본적으로 국가 대 국가가 행하는 외교적 행위라고 주장했다. 특히 양자원조는 더욱 외교정책 프레임에서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외교부 산하로 ODA가 통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반면 장대업 교수는 한국의 외교정책은 분단, 북핵 위기, 미국의 지속적인 개입 등으로 ‘상대적 보수성’을 가져왔고, 국제개발협력이 이러한 현실외교와 연관된다면 ‘국익 우선’의 프레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외교부 산하로 통합되는 것은 오히려 ‘개발협력청’과 같은 독립적인 추진체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면서 즉각적인 국익을 대변하는 실질외교로부터 국제개발협력이 가능한 한 빨리 독립되고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공외교 수단으로서의 국제개발협력, 한계인가 기회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강조한 ‘공공외교’가 ODA와 어떻게 연계될 것인가도 주요한 논란거리이다. 한재광 대표는 공공외교 수단으로서의 국제개발협력이 정책 일관성 측면에서는 일견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분명한 한계도 존재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아프리카 지역 주민들에게 한식과 한류 영상을 제공해 논란이 된 ‘코리아에이드’ 프로그램도 공공외교의 한 모습이며, 이처럼 협력대상국 국민들의 호감을 얻기 위한 공공외교가 우선순위가 되면 ‘코리아에이드’와 같은 홍보성 프로그램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장대업 교수는 ‘공공외교의 수단’으로서의 국제개발협력과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국제개발협력 간의 근본적인 모순을 지적했다. 공약에 명시된 문재인 정부의 정책은 한편으로는 국제개발협력을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치를 강화할 공공외교의 ‘수단’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일자리 창출, 기업활동 촉진 등 국내의 성장과제와 ‘연동’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공공외교의 성과가 장기적이고 질적 과제인 반면, 국가 경제에의 기여는 즉각적으로 지표화가 가능한 양적 과제이므로 결국 장기적인 목표가 단기 목표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대업 교수는 결과적으로 공공외교가 실종된 채 국제개발협력이 기업 퍼주기와 원조산업에 청년의 희생을 강요하는 봉사단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공공외교를 일종의 ‘기회’로 긍정적으로 보는 주장도 있었다. 송진호 총장은 코리아에이드의 경우 공공외교 자체가 문제였다기보다는 범부처의 컨트롤 타워가 부재한 상황에서 국정농단 세력이 개입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오히려 정권의 ODA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국제개발협력 정책을 공공외교의 개념틀 속에서 정립하고, 정부 부처의 벽을 뛰어넘는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공공외교는 정부 간 소통과 협상을 일컫는 전통적인 의미의 정무외교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다양한 소프트파워 기재를 활용하여 외국 대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개념이기 때문에 시민사회가 국제개발협력 정책과 현장에 참여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공공외교’ 개념은 이전 정부에서도 계속 사용해왔지만, ODA를 공공외교와 본격적으로 연계해서 추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을 아직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과연 공공외교가 국제개발협력의 의미를 축소하는 것인지,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심층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청년 당사자가 말하는 국제개발협력, 사람을 위한 일이지만 정작 ‘사람’이 없다
이날 토론회에는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인턴, 봉사단 등을 경험한 청년 당사자가 토론 패널로 참여해 특히 주목을 받았다. 패널 이아희 씨는 국제개발협력이 사람을 위한 일이지만, 정작 그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우는 낮다며 새 정부의 국제개발협력 정책은 ‘사람 중심’의 가치를 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 열정을 품고 애쓰는 청년들의 처우 개선과 역량 강화를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몇몇 기관들이 활동가들의 전문적인 교육을 지원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국제개발협력 인력 양성을 위해 초기 단계에서부터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자리 문제도 단순한 일자리 창출이 아닌 양질의 일자리를 위한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는 한국국제협력단(이하 코이카)의 청년인턴 ‘YP(Young Professional)’ 제도에 대한 문제 제기도 이어졌다. YP 제도는 코이카가 국제개발협력 사업현장 실무경험을 통해 전문성을 제고하고 청년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다는 취지로 2011년도부터 시행하고 있지만, 사업목적에 부합해 효과적인 성과를 이루었는지는 의문이라고 보았다. 사업수행기관과 인턴 간의 이해관계 상충으로 갈등이 발생해도 코이카의 개입이 미진해 인턴들이 중간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하는 예도 있고, 최저임금을 적용해 활동비가 지급되더라도 기관에 따라 급여가 매월 지급되지 않거나 중간에서 기관이 가로채는 등 코이카의 관리ž감독이 부실하다는 점과 활동 기간 이후의 취업연계가 쉽지 않다는 점도 문제로 꼽았다. 토론회에 참석한 코이카 인턴 사업수행기관의 한 실무자는 이러한 문제 제기에 공감하며, 지난해 인턴 채용 전과 후 코이카의 지원 내용이 달라져 인턴들이 출장비 등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사례를 언급했다. 당시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여러 기관에 문의하고 의견을 구했지만, 코이카의 눈치를 보는 곳이 많았고, 언론에서도 관심을 두지 않아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적은 월급에 월세, 공과금, 생활비를 감당하기 빠듯했던 경험이나 인턴, 해외 봉사 등 다양한 경로를 거쳤지만, 여전히 구직해야 하는 상황 등 이아희 씨의 개인적인 경험은 비단 한 사람의 특수한 이야기는 아니며, 아마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청년들이 겪는 공통적인 현실일 것이다. 어쩌면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지만, 청년 당사자가 담담하면서도 울컥하며 고백했던 한 마디 한 마디는 큰 울림이 있었다. 국제개발협력 분야의 청년 문제는 이제 더는 “늘 그래왔다”라거나 “현실적으로어쩔 수 없다”라는 태도로 어영부영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부기관 뿐 아니라 많은 비영리단체들도 ‘인턴’과 같은 비정규직으로 정규직 일자리를 대체하고 있고, 청년들이 국제개발 분야에 취직하기 위해 해외봉사, 대학원, 인턴십 등 소위 ‘스펙’을 갖추어도 열악하고 질 낮은 일자리를 선택해야만 하는 처지이다. 운이 좋아 정규직 일자리에 취업한다고 해도, 이들을 역량있는 전문가로 양성하기 위한 제도적 체계나 환경은 거의 전무하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진입하는 청년들만큼이나 떠나는 청년들이 많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자리 문제를 계속 묵인한다면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미래를 이끌어 갈 세대는 없을 것이다. 또한, 분노하고 이야기해도 들어주는 곳이 없었다던 참가자의 말처럼, 부당한 일에 나 자신부터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목소리 내는 것이 필요하다.
변화는 우리의 지향점을 확인하는 데서 출발
철학이나 이념, 가치를 이야기할 때면 ‘순진하다’라거나 ‘이상적이다’라는 비아냥거림이 따라붙으면서 언제부턴가 ‘현실적이지 않은’ 것이 됐다. 하지만 결국 그 철학과 이념, 가치들이 모여 전략과 정책, 사업을 구성하는 단단한 토대가 된다.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고질적인 문제인 ‘분절화’를 해결하려는 방안이 추진체계를 개편하는 것이라면, 그 추진체계는 어떤 철학과 이념을 토대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고민해야 한다.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철학과 이념은 무엇인지”,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국익 추구’와 ‘공공외교’는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와 같이 이번 토론회에서 오갔던 물음들을 계속 가져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국제개발협력’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도 제대로 논의하지 못한 채, 성장하기에만 급급했던 것이 아닐까. 결국, 변화는 우리의 지향점을 확인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 있다.
기사 입력 일자: 2017-06-30
작성: 이유정 발전대안 피다 간사 / daralee012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