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빈곤의 복잡한 배치 속에서 스스로 다양한 연결을 만들고 감각하기를 바라요"
- <빈곤 과정> 저자 조문영 교수 인터뷰
목련과 개나리, 벚꽃이 기후 위기의 화려한 증명으로 한꺼번에 피어나 흐드러지던 3월의 어느 날. 날씨는 초여름을 방불케 했으나 캠퍼스를 누비는 학생들의 모습만큼은 새봄 그 자체였던 연세대학교를 찾았다. 출간되자마자 화제를 모았던 책 <빈곤 과정>의 저자 조문영 교수와 만나기 위해서였다. <빈곤 과정>은 개념으로서의 빈곤이 구성되는 지점을 인류학자의 시선으로 포착하고, 그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로 표현되는 빈자들의 실존을 가시화한다. 빈곤 의제를 떠올릴 때 흔히 당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게 되는 이들, 즉 국제개발협력 활동을 통해 글로벌 빈곤 산업에 참여하는 청년들에게도 아홉 챕터 중 두 챕터가 할애된다. 청년과 국제개발협력, 피다의 레이더를 피해 갈 수 없는 주제어다. 연희관 연구실에서 조문영 교수를 만나 책의 내용과 오늘날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양상에 대한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문영 교수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서 <빈곤 과정>의 주요 내용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이 책을 통해 한국 사회에 꼭 전하고자 하셨던 중요 포인트를 세 가지만 말씀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조문영입니다. 저는 현재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올해 2월까지는 피다의 전문위원으로도 활동을 했습니다.
<빈곤 과정>은 제가 지난 20년간 한국과 중국에서 빈곤이라는 화두를 어떻게 접근해 왔는지 정리하는 작업이었어요. 책에서 다룬 중국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빈곤의 역사성을 강조하고 싶었는데요. 빈자(貧者)들이 살면서 어떤 자원이나 기회에 닿기도 하고 닿지 못하기도 하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로 형성이 되어 가는 긴 역사성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는 취지가 있었고요.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비판하는 빈곤 포르노처럼 항상 ‘비참한 현재의 스냅샷’으로 보는 그 지점에서, 마치 나이테를 두르듯이 스스로에게 육화되기도 하는 가난의 경험을 통해서 빈자가 겪게 되는, 능동으로 설명할 수도, 수동으로 설명할 수도 없는 그 ‘분투’의 과정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빈자라는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현장 연구를 통해 보여 주고 싶었죠.
두 번째로, 제가 ‘빈곤 과정’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이기도 한데요. 빈곤에 대한 정의와 해결책, 이른바 솔루션 등을 굉장히 쉽게 정의하려는 충동이 있는데, 그걸 멈춰 주기를 바랐어요. 저는 이러한 충동이 현재 퍼포먼스 형태로 유행하는 사회 혁신의 위험성 중 하나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빈곤이라는 문제에 대해) 솔루션을 얘기한다는 것은, 그만큼 복잡다단한 연결망이자 배치로서의 빈곤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축소하고 단순화시키는 작업이거든요. 내가 이 정도면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거죠. 그런 방식이 비즈니스와 결합하면서 요새 광범위하게 유행하고 있어요. 솔루션이 범람하는 시대예요. 빈곤의 비참은 바뀌지 않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데, 사람들이 쉽게 뭔가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는 제안을 담았습니다.
또 책을 보시면 빈곤에 관한 내용이다 보니 사회복지와 관련된 얘기도 있고, 청년, 국제개발, 이주자, 심지어 ‘비인간’에 대한 얘기도 있습니다. 이게 전부 분과 학문으로 구획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고, 그래서 혹자는 이를 이건 각각 특정 학문, 특정 과에서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이런 지식의 전문화, 또는 칸막이화로 인해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연결성과 공통성을 보지 못하게 되는 맹점이 있어요. 여러 영역을 연결 지어 봤을 때 우리 사회와 세계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모순들이 더 새롭고 정교하게 드러날 수 있는데, 각자가 ‘전문성’의 외피를 두른 채 자기 얘기만 반복하는 현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자는 취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것 같은 질문들을 서로 연결해 가며 빈곤에 관한 쟁점을 발전시키고 싶었고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빈곤을 하나의 ‘배치(assemblage)’로 봤는데, 배치라는 건 부분도 전체도 아닌 하나의 다양체예요. 새로운 연결점이 만들어지면서, 또는 기존에 너무 강력했던 어떤 요소가 빠지면서 배치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죠. 저처럼 대학에 있는 사람도, 피다 같은 NGO에 계신 분들도, 다들 이 배치에서 하나의 액터로서 굉장히 다양한 네트워크 안에 연루돼 있기도 하고 또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는 존재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를 구속하는 구조를 외재화시키지 말고, 같이 연루되어 있다는 감각, 우리가 이 배치를 함께 생성해 내고 있다는 창발성에 대한 감각을 갖기를 바랐어요. ‘빈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가 기존에 어떤 빈곤을 어떻게 쟁점화해 왔는지, 빈곤에 대한 논의나 운동이나 정책 등을 어디로 가게 할 것인지 ‘빈곤 과정’이라는 흐름 속에서 생각하고 얘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Harryarts / Freepik
말씀하신 것처럼 ‘빈곤’이라는 것이 복잡하고 다층적인 과정인데, 국제개발협력에서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정해진 기한 내에 정해진 자금으로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는 접근이 고착되어 있다 보니 한계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런 프로젝트 방식은 어찌 보면 하나의 거대한 문법이 만들어진 거잖아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에서는 이런 걸 누구나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통과점(obligatory passage point)’이라고 부르는데, KOICA 같은 조직도 의무통과점이고, 프로젝트라는 문법도 의무통과점일 수 있겠죠.
그런데 예전에 강력한 의무통과점으로 보였던 담론, 조직, 제도 등도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 왔거든요. 국제개발 관련 활동을 하면서 현재의 지형이 답답하다고 생각될 땐 긴 역사를 두고 보면 변한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도 눈여겨보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예를 들어 개발에 관한 여러 주제도 변해 왔잖아요. 1950-1960년대에 한창 근대화 프로젝트가 가시화됐을 때 ‘여성’, ‘젠더’ 같은 주제는 별로 등장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 젠더 의제는 개발 프로젝트에서 상당히 주목받고 있죠. 제가 책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경향은 양가성을 가져요. 한편으로 2000년대 이후 가시화되어 온 세계화 흐름 속에서 액티비즘 자체가 글로벌화되고, 이 과정에서 젠더나 환경 관련 운동도 전 세계적 액티비즘으로 발전하면서 여성의 지위나 인권에 대해서 국제기구, 글로벌 운동 단체, (특히 서구) 국가가 압력을 행사한 부분이 있죠. 그런데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정책의 여성화’를 추동하는 가운데 여성의 ‘역량 강화’, 여성의 ‘참여’ 같은 빈곤 퇴치의 평가 기준으로 단순화됩니다. 라미아 카림이 <가난을 팝니다>에서 자세히 보여줬듯이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국제개발 프로그램이 오히려 지역의 여성들을 구속하고 서로를 감시하게 만든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죠.
저는 그래서 우리가 지금 봤을 때 굉장히 문제라고 하는 것들이 지난 역사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계속해서 저항하고 투쟁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성과이기도 하다고 봐요. 새로이 도출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또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해서 저항들이 이뤄지고 있고요. 피다에서 계속하는 감시 역할 같은 것도, 지금 현재로서는 작아 보일지라도 긴 역사의 흐름으로 봤을 땐 의미 있는 첫걸음일 수도 있다는 거죠.
국제개발협력에서는 SDGs, ESG 등이 교수님이 소개하신 의무통과점이라 생각됩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타 공여국보다 늦게 OECD DAC(개발원조위원회) 회원국이 되었기에 의무통과점 성격의 국제적 목표나 규범들을 지키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열심히 지켜 인정받으려는 ‘착한 후배’같다고 할까요? 혹시 한국 국제개발협력이 이 같은 글로벌 공여자 사회가 만든 ‘의무통과점’ 성격의 강력한 규범 체계들에 집중하는 사이, 글로벌 남반구의 발전을 위한 협력에 있어 놓친 것이 있을까요?
앞서 젠더 의제를 언급했는데, ‘커뮤니티’도 마찬가지였죠. 커뮤니티니 참여니 하는 것도 사실 1950-60년대에는 그렇게 강조되지 않았었는데, 이 또한 양가적인 면이 있어요. 197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글로벌 원조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서구가 경제적으로 불안정해지잖아요. 그러면서 글로벌 남반구에 대한 이전 같은 기존의 대단위 지원이 어려워지자 지역의 공동체, 지역민들의 행위자성, 지역민들의 참여 등을 강조하면서 재정 지원의 부족을 메우려고 했죠. 그런 점에서 ‘참여’나 ‘공동체’ 강조는 신자유주의 통치성과 무관하지 않아요. 하지만 사실 기존의 탑다운 방식의 원조에 대해 인류학자들은 내부에서 계속 문제를 제기해 왔거든요. 국제기구 내에서도 그런 비판들이 어느 정도 인정되면서 지역의 현지 NGO가 갖는 위상이 강화된 측면도 있었죠. 그런데 문제는 ‘프로젝트 할 돈을 이 정도 줄 테니 너희들이 한번 해 봐’ 했을 때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다시 글로벌 남반구 사람들의 결함이나 원조 피로도 같은 말들로 낙인을 재생산하게 되는 위험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문제의 해결이라는 건 단순히 해결이 아니라 늘 새로운 문제를 유발하는 과정인 것 같아요. 이런 점에 대해서 우리가 훨씬 더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 정부 조직 자체가 너무나 강력한 국제개발의 의무통과점이 됐는데, 국제개발의 외연을 넓히는 것도 필요해 보여요. 전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 열악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직접행동을 한 역사가 이미 너무나도 많단 말이죠. 소농들을 연결했던 국제 농민운동 조직 비아 캄페시나(Via Campesina)도 1993년에 생겼고, 로코아(LOCOA: Leaders and Organizers of Community Organization in Asia) 같은 아시아 빈민 연대 조직도 오랜 역사를 갖고 있죠. 이런 곳들이 국제개발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력한 의무통과점이 된 조직이나 제도의 문법에 종속되기보다, 현재의 국제개발에서 좀 다른 배치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이런 직접행동의 역사를 다시 한번 환기하는 작업이 필요해 보여요. MDGs, SDGs 등이 정형화되면서 계속 뭘 해 주라고 하잖아요. 이미 계속해서 해 왔던 역사가 있는데, 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거기도 하거든요. 자본주의 이식 모델은 식민지, 잘 사는 나라가 뭔가를 계속 투입하고, 피식민지, 못 사는 나라가 충격이든 지원이든 계속 흡수하는 모습을 가정하죠. 여성주의 지리학자들은 삽입의 메타포를 써서 이런 모델을 ‘남근주의’로 부르기도 했는데, 국제개발 원조도 이런 통념, 방식과 무관하지 않아요. 그렇게 상대의 행위자성을 애초에 인정하지 않으면서 원조의 문법을 일방적으로 정하고, 주민 참여다 커뮤니티다 하는 것을 ‘프로젝트’라는 거푸집 안에 욱여넣으니까, 실제로 우리가 지역민들의 창발성을 다 지워낸 상태에서 그들에게 계속 ‘행동해 봐’ ‘말해 봐’ 하고 강요하고 있다는 거죠. 이런 건 폭력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계속해서 글로벌 남반구의 땅과 자원, 원주민, 여성 등 모든 것을 저렴하게 이용하고 착취할 수 있는 프런티어로 삼아 온 역사가 자본주의죠. 그래서 원조라는 것에 대해 자랑할 것도 없고 호들갑 떨 것도 없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원조 피로도’를 논한다는 건 굉장한 폭력이라고 봐요. 제가 책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글로벌 정치경제의 구조적 폭력에 관한 역사적 논의 자체가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한 현재의 국제개발 레짐에서는 쉽게 지워진다는 점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이고요.
앞서서 칸막이에 대한 말씀을 드렸는데, 국제개발 레짐에서의 문법들은 어떻게 보자면 한 나라의 사회복지 문법과도 닮아 있어요. 복지 수급자의 틀을 만들어 놓고 그의 의존성이라는 담론까지 만들어내는 것처럼, 어떤 나라에 대해서 원조의 문법을 강제하고 때로 원조 대상의 도덕성까지 심판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일국의 사회복지에서 비판해 왔던 지점들을 통해서 다시 국제개발을 돌아볼 수도 있는 것이죠. 이런 여러 문법이 자기복제성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자기복제가 어떤 부분에서 위험하고 어떤 부분에서 비판이 필요한지를 연결해서 보는 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이미지 출처: un.org
국제개발협력에 참여하는 한국의 사회의 구성원 다수는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글로벌 빈곤을 야기하고 심화시키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폭력에 저항하는 ‘무거운 개입’보다는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라는 기본적 축을 훼손하지 않으며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방식을 지지하는 ‘가벼운 개입’을 선택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려운 지구촌의 이웃을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을 한 것일지요?
가벼운 개입이라는 것은 내가 별로 의식하지 않는 것이잖아요. 내가 커피를 마시거나 신발을 사거나 게임을 할 때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그런 배치를 만드는 건데요. 저는 한편에서는 이 현상을 계속 호기심을 갖고 들여다보고 싶어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런 형태의 개입은 우리를 덜 불편하게 만들죠. 다시 말해 각자 자기가 원하는, 자기가 개입할 수 있는 수준의 약자를 계속 만들어내는 작업인 것 같아요. 각자 ‘이 정도면 내가 개입했어, 이 정도면 내가 할 만큼 했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빈자와 빈곤을 만들어 내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논하는 거예요. 이게 어떤 순간에 문제가 되냐면, 우리가 흔히 약자라고 규정해 왔던 사람들이 갑자기 다른 요구를 하고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고 굉장히 이런 사고와 태도가 위험한 것인 양, 위험한 집단이 출현한 것처럼 보게 된다는 거죠. 자기가 그나마 다루기 편한 방식으로 빈곤이라는 주제나 빈자를 설정해 놓고, 이 빈곤·빈자가 자기가 생각했던 방식으로 등장하지 않았을 때 당혹해하는 그런 점에서는 이 ‘가벼운 개입’이라는 게 일종의 ‘통치로서의 거리 두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일단은 ‘돕는다’는 인식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분배정치의 시대>에서 제임스 퍼거슨은 오히려 빈자의 ‘몫’을 주장했어요. 누가 갚고 말고 할 선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몫이라고 주장한 거죠. 우리가 비서구를 그 자체로 ‘프런티어’로 삼으면서 성장해 온 게 지구의 역사라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뭔가를 제공하는 걸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감각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래서 글로벌 남반구에 대한 기후 보상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국제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중요해 보입니다.
행위자들 간의 네트워크와 배치에 대해 많이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 ‘배치’라는 것이 사회의 주류 세력이 중요시하는 가치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인지, 아니면 행위자 당사자들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면서 배치에 참여하고 나아가 주도할 수도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주류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사람들이 연결을 맺는 과정에서 굉장히 많은 ‘동맹’을 형성할 수 있다는 건데요. 배치에서 이런 모습들이 보이면 다른 행위자들이 계속해서 그 동맹을 거부하거나 균열을 내는 것이 한 방법일 수가 있고요. 기존의 강력한 동맹이 만들어지면 그걸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그 자체가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이는 거잖아요. 다른 연결을 통해 다른 배치를 만들기 시작해야죠.
한때 한국 사회에서 국제개발협력을 이야기할 때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라는 표현이 상당히 공감을 얻었었는데요. 그다음에 내세울 수 있는 기치는 무엇일까요? ‘세계시민’이라는 단어도 많이 이야기되고 있고요. 그런데 아직 한국 사회에서 글로벌 분배 정의 실현 차원에서 국제개발협력을 바라보는 시각은 드문 것 같습니다.
한국은 식민의 역사를 거쳤고, 압축적인 근대화 속에서 너무나 큰 부작용을 지금까지도 경험하고 있잖아요. 나 자신이 팔릴 만한 상품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사회, 모두가 쓸모를 인정받으려고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사회가 되었죠. 그래도 대한민국이 흥미로운 게, 우리가 겪었던 경험들이 굉장히 역동적이기도 하고, 내부에서 성찰, 비판, 논쟁도 많이 작동했던 사회라고 보거든요. 이런 점들을 레거시(유산)로 만드는 작업들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가령 다른 나라에서 한국의 경제 발전 역사를 배우려고 할 때 단순히 자화자찬할 게 아니라 이 역사가 만들어낸 어둠의 기록까지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가난하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내쫓기고, 시설에 감금되는 걸 당연시했던 그런 역사도 소개할 수 있어야겠죠.
교수님의 책 <빈곤 과정>의 5장과 6장에서는 실존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글로벌 빈곤과 접속한 청년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뤄진 2010년대 초중반의 대학생들과 현재 2020년대의 대학생들 간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을 것 같은데요. 최근에는 국제개발협력 분야 자체에 대한 청년들의 관심이 이전 한창때에 비해서는 많이 줄어든 것으로 보이는데, 교육 현장에서 만나시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그러한 변화가 있는지, 그리고 있다면 그것이 어떠한 사회적 변화들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코로나의 영향도 있기는 한데,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완벽하게 시대가 바뀌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지는 좀 조심스럽습니다. 현재 공정 담론이나 능력주의 논의가 청년들을 중심으로 세게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건 그만큼 한국의 자본주의가 청년들이 더 이상 어떤 미래를 생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반증하고 있는 거잖아요.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각자 다양한 이유와 생각을 갖고 KOICA 인턴 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해외에 다녀오는 청년들이 많았어요. 그 경험을 발판으로 국제기구로 가고 싶다는 청년들도 물론 있었고, 자신이 처한 힘든 상황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고자 했던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각자가 가진 서로 다른 열망과 고민이 유연하게 그 안에서 해소되기도 하고 골화되기도 하면서 다 섞여 있는 혼종적인 장이 형성됐죠.
그에 비해 지금 학생들은 확실히 ‘직무 연관성’을 많이 얘기해요. 대학에 들어오면서부터 어떤 수업을 듣고 어떻게 졸업해서 어떤 커리어를 밟아 나갈 것인지, 어떤 동아리에 들고 어떤 모임에 참여할 것인지를 판단해서 포트폴리오를 짜는 게 훨씬 촘촘하게 진행되는 것 같고요. 졸업할 때쯤 된 학생들이 지금 들어오는 학생들에 대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이 실험 저 실험 해 보면서 자기 계발을 하는 게 아니라 이 경험이 정말 쓸모 있는 경험인지 아닌지 일찌감치 따지는데, 그러다 보니 확실히 조급해지는 건 있어요.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의 인턴이나 봉사단 활동도 물론 여전히 다양한 이유에서 하겠지만, 이게 차후 자신의 국제기구 커리어 같은 것과 직접 연관이 있는지를 더 보는 경향이 있죠. 유연하고 탄력적인 장으로서 국제개발이 갖는 가치는 예전보다는 좀 줄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하지만 제가 직접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현장 연구를 한 건 아니라 단정 짓기는 조심스럽습니다. 청년들을 다시 구분 짓고 섣불리 판단할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 대학생과 청년들에게 있어 오늘날 가장 큰 화두는 역시 환경과 기후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 역시 글로벌 빈곤에 대한 2010년대 대학생・청년들의 관심과 그 맥락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기후 문제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은 확실히 많아졌는데, 그 스펙트럼은 다양한 것 같아요. 정말 급진적으로 기후 문제를 사고하는 친구들이 있죠. 기후정의파업 등과 같은 직접적인 행동을 하는 친구들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 우울해해요. 기후 우울증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더 이상 내 삶과 이 지구의 삶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무력감에 시달리면서도 문제의식의 표출 방식에 있어서는 급진적인 그룹이 있고요. 한편에서는 기후가 자기 커리어에 있어서 ‘핫한’ 주제가 돼 버리기도 했죠. 예를 들어 문화인류학과에서 ‘환경과 문화’ 수업을 듣고, 경영학과 가서 ESG 수업을 듣고, 정치외교학과 국제법 수업에서 파리협정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예요. 이렇게 다 골라서 들으면서 기후 관련한 국내외 조직으로 진출을 하는 경우도 많아진 것 같고요. 또 한편에서는 기후위기를 그야말로 하나의 트렌드처럼 소비하죠. 환경에 대해 관심을 갖고 비거니즘을 실천하고 제로웨이스트숍에 가고 이 과정을 다 SNS에 남기죠. 정치적 올바름을 학습하고 소비하는 방식이 정형화되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미지 출처: 월드프렌즈 코리아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교수님께서 책에서 소개하신 내용을 보면 오늘날 국제개발협력에 참여하는 많은 청년들이 본인이 하는 일은 피상적일 뿐이고, 거대한 틀 안에서 개인은 무기력하다고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의 발전을 지원하고 빈곤 문제를 해결한다는 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이 시대의 청년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하나의 행위자는 그 자체로 ‘행위자-네트워크’이죠. A, B, C와 연결된 ‘나’와, B를 빼고 A, C, D와 새롭게 연결된 ‘나’는 다른 사람이겠죠. 나라는 개인이 여러 군데 걸쳐 있을 수 있어요. 대학에서 전문적으로 기술이나 지식을 더 연마할 수도 있고, 시민사회 단체에 관여할 수도, 그러면서 다른 국제기구 활동을 할 수도, 이 모든 걸 다 할 수도 있고요. 저는 이게 자기분열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고만 보진 않아요. 연결의 대상, 방향, 속도를 바꿔가면서, 고민과 성찰을 거듭하면서 결국 자기 배치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쉽게 낙관할 필요도 비관할 필요도 없어요. 중요한 건 일에 애정을 갖되 확신을 반쯤 유보하는 자세인 것 같아요. 우리가 뭘 하든 절대로 구원자도 계몽자도 아니고, 결국 부족한 부분들을 서로 채우고 배워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저는 그런 겸손이 어디든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부에 있을 때는 쉽게 볼 수 없지만 국제개발 진영도 계속해서 변해 왔다는 것도 다시 환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피다에서도 다루고 있지만 청년 활동가들이 겪는 노동 문제, 성차별, 빈곤 포르노 등에 대해서 이제는 확실히 문제제기를 하는 시대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힘없는 개인 대 강력한 구조라는 이분법보다는 개인을 네트워크로 보면서 좀 더 유연하게 연결을 만들어 나가기도 하고, 기존의 강력한 연결을 다시 문제 삼기도 하고, 이렇게 한 사람이 동시에 다양하고 이질적인 연결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더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구조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계속해서 서로 얽히면서 만들어지는 다양체 자체가 바로 구조인 거죠.
오늘 말씀 들으면서 너무 큰 얘기들을 쉽게 단정하는 것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고, 현상 내에 촘촘하게 존재하는 변화들이나 가능성들을 차근차근 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 진행: 한재광
발전대안 피다 대표
인터뷰 정리: 김향지
발전대안 피다 애드보커시팀장
"글로벌 빈곤의 복잡한 배치 속에서 스스로 다양한 연결을 만들고 감각하기를 바라요"
- <빈곤 과정> 저자 조문영 교수 인터뷰
목련과 개나리, 벚꽃이 기후 위기의 화려한 증명으로 한꺼번에 피어나 흐드러지던 3월의 어느 날. 날씨는 초여름을 방불케 했으나 캠퍼스를 누비는 학생들의 모습만큼은 새봄 그 자체였던 연세대학교를 찾았다. 출간되자마자 화제를 모았던 책 <빈곤 과정>의 저자 조문영 교수와 만나기 위해서였다. <빈곤 과정>은 개념으로서의 빈곤이 구성되는 지점을 인류학자의 시선으로 포착하고, 그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로 표현되는 빈자들의 실존을 가시화한다. 빈곤 의제를 떠올릴 때 흔히 당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게 되는 이들, 즉 국제개발협력 활동을 통해 글로벌 빈곤 산업에 참여하는 청년들에게도 아홉 챕터 중 두 챕터가 할애된다. 청년과 국제개발협력, 피다의 레이더를 피해 갈 수 없는 주제어다. 연희관 연구실에서 조문영 교수를 만나 책의 내용과 오늘날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양상에 대한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문영 교수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서 <빈곤 과정>의 주요 내용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이 책을 통해 한국 사회에 꼭 전하고자 하셨던 중요 포인트를 세 가지만 말씀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조문영입니다. 저는 현재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올해 2월까지는 피다의 전문위원으로도 활동을 했습니다.
<빈곤 과정>은 제가 지난 20년간 한국과 중국에서 빈곤이라는 화두를 어떻게 접근해 왔는지 정리하는 작업이었어요. 책에서 다룬 중국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빈곤의 역사성을 강조하고 싶었는데요. 빈자(貧者)들이 살면서 어떤 자원이나 기회에 닿기도 하고 닿지 못하기도 하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로 형성이 되어 가는 긴 역사성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는 취지가 있었고요.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비판하는 빈곤 포르노처럼 항상 ‘비참한 현재의 스냅샷’으로 보는 그 지점에서, 마치 나이테를 두르듯이 스스로에게 육화되기도 하는 가난의 경험을 통해서 빈자가 겪게 되는, 능동으로 설명할 수도, 수동으로 설명할 수도 없는 그 ‘분투’의 과정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빈자라는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현장 연구를 통해 보여 주고 싶었죠.
두 번째로, 제가 ‘빈곤 과정’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이기도 한데요. 빈곤에 대한 정의와 해결책, 이른바 솔루션 등을 굉장히 쉽게 정의하려는 충동이 있는데, 그걸 멈춰 주기를 바랐어요. 저는 이러한 충동이 현재 퍼포먼스 형태로 유행하는 사회 혁신의 위험성 중 하나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빈곤이라는 문제에 대해) 솔루션을 얘기한다는 것은, 그만큼 복잡다단한 연결망이자 배치로서의 빈곤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축소하고 단순화시키는 작업이거든요. 내가 이 정도면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거죠. 그런 방식이 비즈니스와 결합하면서 요새 광범위하게 유행하고 있어요. 솔루션이 범람하는 시대예요. 빈곤의 비참은 바뀌지 않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데, 사람들이 쉽게 뭔가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는 제안을 담았습니다.
또 책을 보시면 빈곤에 관한 내용이다 보니 사회복지와 관련된 얘기도 있고, 청년, 국제개발, 이주자, 심지어 ‘비인간’에 대한 얘기도 있습니다. 이게 전부 분과 학문으로 구획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고, 그래서 혹자는 이를 이건 각각 특정 학문, 특정 과에서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이런 지식의 전문화, 또는 칸막이화로 인해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연결성과 공통성을 보지 못하게 되는 맹점이 있어요. 여러 영역을 연결 지어 봤을 때 우리 사회와 세계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모순들이 더 새롭고 정교하게 드러날 수 있는데, 각자가 ‘전문성’의 외피를 두른 채 자기 얘기만 반복하는 현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자는 취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것 같은 질문들을 서로 연결해 가며 빈곤에 관한 쟁점을 발전시키고 싶었고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빈곤을 하나의 ‘배치(assemblage)’로 봤는데, 배치라는 건 부분도 전체도 아닌 하나의 다양체예요. 새로운 연결점이 만들어지면서, 또는 기존에 너무 강력했던 어떤 요소가 빠지면서 배치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죠. 저처럼 대학에 있는 사람도, 피다 같은 NGO에 계신 분들도, 다들 이 배치에서 하나의 액터로서 굉장히 다양한 네트워크 안에 연루돼 있기도 하고 또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는 존재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를 구속하는 구조를 외재화시키지 말고, 같이 연루되어 있다는 감각, 우리가 이 배치를 함께 생성해 내고 있다는 창발성에 대한 감각을 갖기를 바랐어요. ‘빈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가 기존에 어떤 빈곤을 어떻게 쟁점화해 왔는지, 빈곤에 대한 논의나 운동이나 정책 등을 어디로 가게 할 것인지 ‘빈곤 과정’이라는 흐름 속에서 생각하고 얘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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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것처럼 ‘빈곤’이라는 것이 복잡하고 다층적인 과정인데, 국제개발협력에서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정해진 기한 내에 정해진 자금으로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는 접근이 고착되어 있다 보니 한계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런 프로젝트 방식은 어찌 보면 하나의 거대한 문법이 만들어진 거잖아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에서는 이런 걸 누구나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통과점(obligatory passage point)’이라고 부르는데, KOICA 같은 조직도 의무통과점이고, 프로젝트라는 문법도 의무통과점일 수 있겠죠.
그런데 예전에 강력한 의무통과점으로 보였던 담론, 조직, 제도 등도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 왔거든요. 국제개발 관련 활동을 하면서 현재의 지형이 답답하다고 생각될 땐 긴 역사를 두고 보면 변한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도 눈여겨보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예를 들어 개발에 관한 여러 주제도 변해 왔잖아요. 1950-1960년대에 한창 근대화 프로젝트가 가시화됐을 때 ‘여성’, ‘젠더’ 같은 주제는 별로 등장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 젠더 의제는 개발 프로젝트에서 상당히 주목받고 있죠. 제가 책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경향은 양가성을 가져요. 한편으로 2000년대 이후 가시화되어 온 세계화 흐름 속에서 액티비즘 자체가 글로벌화되고, 이 과정에서 젠더나 환경 관련 운동도 전 세계적 액티비즘으로 발전하면서 여성의 지위나 인권에 대해서 국제기구, 글로벌 운동 단체, (특히 서구) 국가가 압력을 행사한 부분이 있죠. 그런데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정책의 여성화’를 추동하는 가운데 여성의 ‘역량 강화’, 여성의 ‘참여’ 같은 빈곤 퇴치의 평가 기준으로 단순화됩니다. 라미아 카림이 <가난을 팝니다>에서 자세히 보여줬듯이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국제개발 프로그램이 오히려 지역의 여성들을 구속하고 서로를 감시하게 만든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죠.
저는 그래서 우리가 지금 봤을 때 굉장히 문제라고 하는 것들이 지난 역사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계속해서 저항하고 투쟁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성과이기도 하다고 봐요. 새로이 도출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또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해서 저항들이 이뤄지고 있고요. 피다에서 계속하는 감시 역할 같은 것도, 지금 현재로서는 작아 보일지라도 긴 역사의 흐름으로 봤을 땐 의미 있는 첫걸음일 수도 있다는 거죠.
국제개발협력에서는 SDGs, ESG 등이 교수님이 소개하신 의무통과점이라 생각됩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타 공여국보다 늦게 OECD DAC(개발원조위원회) 회원국이 되었기에 의무통과점 성격의 국제적 목표나 규범들을 지키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열심히 지켜 인정받으려는 ‘착한 후배’같다고 할까요? 혹시 한국 국제개발협력이 이 같은 글로벌 공여자 사회가 만든 ‘의무통과점’ 성격의 강력한 규범 체계들에 집중하는 사이, 글로벌 남반구의 발전을 위한 협력에 있어 놓친 것이 있을까요?
앞서 젠더 의제를 언급했는데, ‘커뮤니티’도 마찬가지였죠. 커뮤니티니 참여니 하는 것도 사실 1950-60년대에는 그렇게 강조되지 않았었는데, 이 또한 양가적인 면이 있어요. 197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글로벌 원조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서구가 경제적으로 불안정해지잖아요. 그러면서 글로벌 남반구에 대한 이전 같은 기존의 대단위 지원이 어려워지자 지역의 공동체, 지역민들의 행위자성, 지역민들의 참여 등을 강조하면서 재정 지원의 부족을 메우려고 했죠. 그런 점에서 ‘참여’나 ‘공동체’ 강조는 신자유주의 통치성과 무관하지 않아요. 하지만 사실 기존의 탑다운 방식의 원조에 대해 인류학자들은 내부에서 계속 문제를 제기해 왔거든요. 국제기구 내에서도 그런 비판들이 어느 정도 인정되면서 지역의 현지 NGO가 갖는 위상이 강화된 측면도 있었죠. 그런데 문제는 ‘프로젝트 할 돈을 이 정도 줄 테니 너희들이 한번 해 봐’ 했을 때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다시 글로벌 남반구 사람들의 결함이나 원조 피로도 같은 말들로 낙인을 재생산하게 되는 위험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문제의 해결이라는 건 단순히 해결이 아니라 늘 새로운 문제를 유발하는 과정인 것 같아요. 이런 점에 대해서 우리가 훨씬 더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 정부 조직 자체가 너무나 강력한 국제개발의 의무통과점이 됐는데, 국제개발의 외연을 넓히는 것도 필요해 보여요. 전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 열악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직접행동을 한 역사가 이미 너무나도 많단 말이죠. 소농들을 연결했던 국제 농민운동 조직 비아 캄페시나(Via Campesina)도 1993년에 생겼고, 로코아(LOCOA: Leaders and Organizers of Community Organization in Asia) 같은 아시아 빈민 연대 조직도 오랜 역사를 갖고 있죠. 이런 곳들이 국제개발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력한 의무통과점이 된 조직이나 제도의 문법에 종속되기보다, 현재의 국제개발에서 좀 다른 배치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이런 직접행동의 역사를 다시 한번 환기하는 작업이 필요해 보여요. MDGs, SDGs 등이 정형화되면서 계속 뭘 해 주라고 하잖아요. 이미 계속해서 해 왔던 역사가 있는데, 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거기도 하거든요. 자본주의 이식 모델은 식민지, 잘 사는 나라가 뭔가를 계속 투입하고, 피식민지, 못 사는 나라가 충격이든 지원이든 계속 흡수하는 모습을 가정하죠. 여성주의 지리학자들은 삽입의 메타포를 써서 이런 모델을 ‘남근주의’로 부르기도 했는데, 국제개발 원조도 이런 통념, 방식과 무관하지 않아요. 그렇게 상대의 행위자성을 애초에 인정하지 않으면서 원조의 문법을 일방적으로 정하고, 주민 참여다 커뮤니티다 하는 것을 ‘프로젝트’라는 거푸집 안에 욱여넣으니까, 실제로 우리가 지역민들의 창발성을 다 지워낸 상태에서 그들에게 계속 ‘행동해 봐’ ‘말해 봐’ 하고 강요하고 있다는 거죠. 이런 건 폭력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계속해서 글로벌 남반구의 땅과 자원, 원주민, 여성 등 모든 것을 저렴하게 이용하고 착취할 수 있는 프런티어로 삼아 온 역사가 자본주의죠. 그래서 원조라는 것에 대해 자랑할 것도 없고 호들갑 떨 것도 없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원조 피로도’를 논한다는 건 굉장한 폭력이라고 봐요. 제가 책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글로벌 정치경제의 구조적 폭력에 관한 역사적 논의 자체가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한 현재의 국제개발 레짐에서는 쉽게 지워진다는 점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이고요.
앞서서 칸막이에 대한 말씀을 드렸는데, 국제개발 레짐에서의 문법들은 어떻게 보자면 한 나라의 사회복지 문법과도 닮아 있어요. 복지 수급자의 틀을 만들어 놓고 그의 의존성이라는 담론까지 만들어내는 것처럼, 어떤 나라에 대해서 원조의 문법을 강제하고 때로 원조 대상의 도덕성까지 심판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일국의 사회복지에서 비판해 왔던 지점들을 통해서 다시 국제개발을 돌아볼 수도 있는 것이죠. 이런 여러 문법이 자기복제성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자기복제가 어떤 부분에서 위험하고 어떤 부분에서 비판이 필요한지를 연결해서 보는 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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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개발협력에 참여하는 한국의 사회의 구성원 다수는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글로벌 빈곤을 야기하고 심화시키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폭력에 저항하는 ‘무거운 개입’보다는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라는 기본적 축을 훼손하지 않으며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방식을 지지하는 ‘가벼운 개입’을 선택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려운 지구촌의 이웃을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을 한 것일지요?
가벼운 개입이라는 것은 내가 별로 의식하지 않는 것이잖아요. 내가 커피를 마시거나 신발을 사거나 게임을 할 때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그런 배치를 만드는 건데요. 저는 한편에서는 이 현상을 계속 호기심을 갖고 들여다보고 싶어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런 형태의 개입은 우리를 덜 불편하게 만들죠. 다시 말해 각자 자기가 원하는, 자기가 개입할 수 있는 수준의 약자를 계속 만들어내는 작업인 것 같아요. 각자 ‘이 정도면 내가 개입했어, 이 정도면 내가 할 만큼 했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빈자와 빈곤을 만들어 내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논하는 거예요. 이게 어떤 순간에 문제가 되냐면, 우리가 흔히 약자라고 규정해 왔던 사람들이 갑자기 다른 요구를 하고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고 굉장히 이런 사고와 태도가 위험한 것인 양, 위험한 집단이 출현한 것처럼 보게 된다는 거죠. 자기가 그나마 다루기 편한 방식으로 빈곤이라는 주제나 빈자를 설정해 놓고, 이 빈곤·빈자가 자기가 생각했던 방식으로 등장하지 않았을 때 당혹해하는 그런 점에서는 이 ‘가벼운 개입’이라는 게 일종의 ‘통치로서의 거리 두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일단은 ‘돕는다’는 인식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분배정치의 시대>에서 제임스 퍼거슨은 오히려 빈자의 ‘몫’을 주장했어요. 누가 갚고 말고 할 선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몫이라고 주장한 거죠. 우리가 비서구를 그 자체로 ‘프런티어’로 삼으면서 성장해 온 게 지구의 역사라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뭔가를 제공하는 걸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감각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래서 글로벌 남반구에 대한 기후 보상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국제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중요해 보입니다.
행위자들 간의 네트워크와 배치에 대해 많이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 ‘배치’라는 것이 사회의 주류 세력이 중요시하는 가치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인지, 아니면 행위자 당사자들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면서 배치에 참여하고 나아가 주도할 수도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주류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사람들이 연결을 맺는 과정에서 굉장히 많은 ‘동맹’을 형성할 수 있다는 건데요. 배치에서 이런 모습들이 보이면 다른 행위자들이 계속해서 그 동맹을 거부하거나 균열을 내는 것이 한 방법일 수가 있고요. 기존의 강력한 동맹이 만들어지면 그걸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그 자체가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이는 거잖아요. 다른 연결을 통해 다른 배치를 만들기 시작해야죠.
한때 한국 사회에서 국제개발협력을 이야기할 때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라는 표현이 상당히 공감을 얻었었는데요. 그다음에 내세울 수 있는 기치는 무엇일까요? ‘세계시민’이라는 단어도 많이 이야기되고 있고요. 그런데 아직 한국 사회에서 글로벌 분배 정의 실현 차원에서 국제개발협력을 바라보는 시각은 드문 것 같습니다.
한국은 식민의 역사를 거쳤고, 압축적인 근대화 속에서 너무나 큰 부작용을 지금까지도 경험하고 있잖아요. 나 자신이 팔릴 만한 상품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사회, 모두가 쓸모를 인정받으려고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사회가 되었죠. 그래도 대한민국이 흥미로운 게, 우리가 겪었던 경험들이 굉장히 역동적이기도 하고, 내부에서 성찰, 비판, 논쟁도 많이 작동했던 사회라고 보거든요. 이런 점들을 레거시(유산)로 만드는 작업들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가령 다른 나라에서 한국의 경제 발전 역사를 배우려고 할 때 단순히 자화자찬할 게 아니라 이 역사가 만들어낸 어둠의 기록까지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가난하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내쫓기고, 시설에 감금되는 걸 당연시했던 그런 역사도 소개할 수 있어야겠죠.
교수님의 책 <빈곤 과정>의 5장과 6장에서는 실존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글로벌 빈곤과 접속한 청년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뤄진 2010년대 초중반의 대학생들과 현재 2020년대의 대학생들 간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을 것 같은데요. 최근에는 국제개발협력 분야 자체에 대한 청년들의 관심이 이전 한창때에 비해서는 많이 줄어든 것으로 보이는데, 교육 현장에서 만나시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그러한 변화가 있는지, 그리고 있다면 그것이 어떠한 사회적 변화들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코로나의 영향도 있기는 한데,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완벽하게 시대가 바뀌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지는 좀 조심스럽습니다. 현재 공정 담론이나 능력주의 논의가 청년들을 중심으로 세게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건 그만큼 한국의 자본주의가 청년들이 더 이상 어떤 미래를 생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반증하고 있는 거잖아요.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각자 다양한 이유와 생각을 갖고 KOICA 인턴 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해외에 다녀오는 청년들이 많았어요. 그 경험을 발판으로 국제기구로 가고 싶다는 청년들도 물론 있었고, 자신이 처한 힘든 상황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고자 했던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각자가 가진 서로 다른 열망과 고민이 유연하게 그 안에서 해소되기도 하고 골화되기도 하면서 다 섞여 있는 혼종적인 장이 형성됐죠.
그에 비해 지금 학생들은 확실히 ‘직무 연관성’을 많이 얘기해요. 대학에 들어오면서부터 어떤 수업을 듣고 어떻게 졸업해서 어떤 커리어를 밟아 나갈 것인지, 어떤 동아리에 들고 어떤 모임에 참여할 것인지를 판단해서 포트폴리오를 짜는 게 훨씬 촘촘하게 진행되는 것 같고요. 졸업할 때쯤 된 학생들이 지금 들어오는 학생들에 대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이 실험 저 실험 해 보면서 자기 계발을 하는 게 아니라 이 경험이 정말 쓸모 있는 경험인지 아닌지 일찌감치 따지는데, 그러다 보니 확실히 조급해지는 건 있어요.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의 인턴이나 봉사단 활동도 물론 여전히 다양한 이유에서 하겠지만, 이게 차후 자신의 국제기구 커리어 같은 것과 직접 연관이 있는지를 더 보는 경향이 있죠. 유연하고 탄력적인 장으로서 국제개발이 갖는 가치는 예전보다는 좀 줄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하지만 제가 직접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현장 연구를 한 건 아니라 단정 짓기는 조심스럽습니다. 청년들을 다시 구분 짓고 섣불리 판단할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 대학생과 청년들에게 있어 오늘날 가장 큰 화두는 역시 환경과 기후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 역시 글로벌 빈곤에 대한 2010년대 대학생・청년들의 관심과 그 맥락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기후 문제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은 확실히 많아졌는데, 그 스펙트럼은 다양한 것 같아요. 정말 급진적으로 기후 문제를 사고하는 친구들이 있죠. 기후정의파업 등과 같은 직접적인 행동을 하는 친구들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 우울해해요. 기후 우울증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더 이상 내 삶과 이 지구의 삶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무력감에 시달리면서도 문제의식의 표출 방식에 있어서는 급진적인 그룹이 있고요. 한편에서는 기후가 자기 커리어에 있어서 ‘핫한’ 주제가 돼 버리기도 했죠. 예를 들어 문화인류학과에서 ‘환경과 문화’ 수업을 듣고, 경영학과 가서 ESG 수업을 듣고, 정치외교학과 국제법 수업에서 파리협정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예요. 이렇게 다 골라서 들으면서 기후 관련한 국내외 조직으로 진출을 하는 경우도 많아진 것 같고요. 또 한편에서는 기후위기를 그야말로 하나의 트렌드처럼 소비하죠. 환경에 대해 관심을 갖고 비거니즘을 실천하고 제로웨이스트숍에 가고 이 과정을 다 SNS에 남기죠. 정치적 올바름을 학습하고 소비하는 방식이 정형화되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미지 출처: 월드프렌즈 코리아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교수님께서 책에서 소개하신 내용을 보면 오늘날 국제개발협력에 참여하는 많은 청년들이 본인이 하는 일은 피상적일 뿐이고, 거대한 틀 안에서 개인은 무기력하다고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의 발전을 지원하고 빈곤 문제를 해결한다는 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이 시대의 청년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하나의 행위자는 그 자체로 ‘행위자-네트워크’이죠. A, B, C와 연결된 ‘나’와, B를 빼고 A, C, D와 새롭게 연결된 ‘나’는 다른 사람이겠죠. 나라는 개인이 여러 군데 걸쳐 있을 수 있어요. 대학에서 전문적으로 기술이나 지식을 더 연마할 수도 있고, 시민사회 단체에 관여할 수도, 그러면서 다른 국제기구 활동을 할 수도, 이 모든 걸 다 할 수도 있고요. 저는 이게 자기분열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고만 보진 않아요. 연결의 대상, 방향, 속도를 바꿔가면서, 고민과 성찰을 거듭하면서 결국 자기 배치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쉽게 낙관할 필요도 비관할 필요도 없어요. 중요한 건 일에 애정을 갖되 확신을 반쯤 유보하는 자세인 것 같아요. 우리가 뭘 하든 절대로 구원자도 계몽자도 아니고, 결국 부족한 부분들을 서로 채우고 배워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저는 그런 겸손이 어디든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부에 있을 때는 쉽게 볼 수 없지만 국제개발 진영도 계속해서 변해 왔다는 것도 다시 환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피다에서도 다루고 있지만 청년 활동가들이 겪는 노동 문제, 성차별, 빈곤 포르노 등에 대해서 이제는 확실히 문제제기를 하는 시대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힘없는 개인 대 강력한 구조라는 이분법보다는 개인을 네트워크로 보면서 좀 더 유연하게 연결을 만들어 나가기도 하고, 기존의 강력한 연결을 다시 문제 삼기도 하고, 이렇게 한 사람이 동시에 다양하고 이질적인 연결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더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구조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계속해서 서로 얽히면서 만들어지는 다양체 자체가 바로 구조인 거죠.
오늘 말씀 들으면서 너무 큰 얘기들을 쉽게 단정하는 것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고, 현상 내에 촘촘하게 존재하는 변화들이나 가능성들을 차근차근 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 진행: 한재광
발전대안 피다 대표
인터뷰 정리: 김향지
발전대안 피다 애드보커시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