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다뷰[피다뷰] 분열과 개발: 주민을 위한 개발 공약에 지구인으로서 답하자

2024-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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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전국을 순회하며 연일 쏟아 놓는 개발 공약에 머리가 어지럽다. 그린벨트 해제를 주장하며 던진 “절대적인 보존만이 환경이라 생각하면 인류가 발전할 수 없다”는 대통령의 말은 절대적인 개발로 인해 온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고, 그 때문에 각국 대표들과 과학자 수천 명이 매년 모여 머리를 맞대고 지구를 환경 위기에서 구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전체 인류 공동체에 대한 모독이다. 도대체 지구상 어느 곳에 “절대적인 보존”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우리가 기후 위기에 직면한 우리 모두를 공동체라고 부르고 기후 위기를 한국 날씨 위기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를 아는 것인가. 지구의 허파 정도를 보유한 국가의 대통령이 하는 말이면 다소 이해가 갈 수 있겠다. 그러나 전 국토를 공장으로 채워, 헐값으로 전기를 나누어 주며 이미 일인당 전력 사용량 세계 3위, 이산화탄소 배출 세계 9위의 탄소 강국이 되는 것을 마다 않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니다. 한국은 일인당 연간 탄소 배출이 11톤이 넘는 곳으로 러시아나 일본보다도 많으며 베트남의 5배가 넘는다. 이곳에 “절대적인 보존”이 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지 그 과학적 기준이 민망할 뿐이다. 


대통령이 전국의 시도를 방문하며 하나씩 풀어놓는 개발 공약은 우리 고장을 더 잘살게 해 줄 것처럼 들리지만 이를 종합하자면 국토의 모든 도시들을 보다 많은 도로와 자동차와 빌딩과 쇼핑몰과 공장으로 채우며 전국 팔도의 산과 강을 공장과 핵 발전소와 골프장과 그 위를 지나가는 케이블카로 채우는 계획이다. 이런 공약에 환호를 지른다면 전체를 보지 않고 우리 고장의 변화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작 건물 더미에 시야가 가려지지 않아 숨 돌릴 수 있는, 조금 더 깨끗한 공기를 가족, 친구와 나눌 수 있는, 조금 더 많은 별빛을 즐길 수 있는, 이제는 잘 태어나지도 않는 아이들과 뛰어놀 수 있는 산과 들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이런 공약에 열광하고 흥분하면서 동시에 주말에 내 차 타고 빌딩 숲을 벗어나면 그런 자연 가득한 곳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바로 옆의 산과 들도 우리의 도시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러한 개발의 종착역이기 때문이다. 아마 바로 옆 마을 사람들은 똑같은 기대를 하며 우리 마을로 올 것이다. 그들이 발견할 것은 똑같은 케이블카와 브랜드만 다른 골프장들이다. 이것을 막는 것이 애초에 그린벨트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대통령은 춘천 강원도청 별관에서 열린 ‘민생을 행복하게, 강원의 힘’이라는 민생 토론회에서 강원도의 “산림 자원이 관광 자원으로 더 활성화하도록 규제를 대폭 풀겠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산림 자원”이란 강원도의 국유림을 말한다. 이를 국유림으로 지정한 것은 정확하게 이것이 “자원”이 되지 말고 “자연”으로 남으라고 한 것이다. 이를 “자원”이라고 칭하면서 대통령은 이미 나무와 숲에 대한 담론 전쟁을 시작했다. 이러한 담론 전쟁은 이미 15세기에 유럽 식민주의와 함께 시작된 것으로,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몰랐지만 우연히 신대륙을 발견해 유명해진 크리스토퍼 콜롬버스가 그 원조 격이다. 라츠 파텔과 제이슨 무어의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에 따르면 그는 신세계의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스페인에 가져가면 돈이 될 것들과 돈이 되지 않을 것을 구분하는 목록을 작성했다. 그가 “개척한” 자연관은 17세기에 이르러 철학적으로 정립된다. 흔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알려진 데카르트는 1640년대에 인간만을 생각하는 유일한 실체로 보고 이들이 주도하는 유럽 문명이 자연의 지배자이자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각하는 나의 존재는 사실 자연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자연을 인간 사회가 통제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고, 이렇게 자연을 “자원”으로 바라보는 현대의 시각이 시작되었다. 담론적 승리는 그 뒤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적 발전으로 실현되었고, 이제 자연은 그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상품의 형태를 띤 자원에 불과하게 되었다. 본디 자원은 사용이 목적이니 이들에게 “보존”이란 있을 수 없는 낭비인 셈이다. 


최근 한국 엘리트들의 철학의 부재를 생각한다면 대통령의 자연관과 그가 늘어놓는 개발 공약은 데카르트보다는 콜럼버스를 연상시킨다. 이들의 적나라한 개발주의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이 금전적이고 인간 중심적 자연관은 한때 인류를 비극으로 몰아갔고 또 현재까지 전 지구적 환경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근대의 자연관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동안 알려진 기후 위기의 징후들, 즉 산업적 탄소 배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세기에 지구 표면의 평균 온도가 0.85도 상승했으며, 지난 100년간 관측된 가장 더운 열네 개 연도 중 열셋이 이제 막 시작한 21세기에 있었으며, 20세기 이후 해수면은 20cm 정도 상승했고 계속 올라가고 있으며, 이미 한반도의 십수 배에 달하는 빙하가 사라졌고, 우리가 현재와 같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지구 온도는 50년 안에 2도 이상 상승하여 모든 지구의 살아있는 것들에 중대한 위협이 될 것이라는 사실들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양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성장의 한계, 인류 위기에 관한 로마클럽 프로젝트 보고서>가 급속한 개발은 환경의 위협을 초래해 결국 성장을 멈추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 무려 1972년의 일이다. 온실 효과가 기후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제안한 브룬트란트 위원회의 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가 나온 것이 1987년이며, 1992년 리우 정상회의 이후 유엔 기후협약을 맺으며 국제 사회가 탄소 배출 감소를 논의하기 시작한 것도 이미 30년이 넘었다. 만일 세계의 지도자들이 인류의 장기적 생존과 자연의 보존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그 정도 얘기했을 때 알아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아듣는 지도자들은 소수였고, 우리에게는 그들이 없다. 


근대 자연관의 또 다른 특징은 이 자원이 되어버린 자연에 “신대륙”의 원주민이 이른바 “옵션”으로 딸려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베어지는 나무들, 헤쳐지는 벌판과 함께 유럽의 발전을 위한 식민지 개발의 소모품으로 취급당하였고, 많은 경우 아예 자취를 감출 때까지 “보존”되지 않고 활용되었다. 콜럼버스가 이끈 스페인의 식민주의자들은 카리브 제도에서 수백만의 원주민 타이노들을 학살했고, 뒤이어 현재 볼리비아 땅 포토시 광산에서는 스페인 국고에 채울 은을 채굴하기 위해 동원되어 전멸한 지역 원주민 대신 아프리카 노예들을 “사용”해야 했다. 왕관의 보석이라 불린 남아시아에서 영국 식민주의는 값싼 식량 수출을 위해 수백만 명의 주민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사시켜 마이크 데이비스는 이를 “빅토리아 시대 홀로코스트”라고 불렀다. 일본 제국의 식민지 개발 속에서 조선인 소작농들의 경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듯 맹목적 개발주의는 단순히 자연을 점령의 대상으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을 도구화한다. 현 정부에서도 역시나 거꾸로 가고있는 노동과 여성 정책을 보면 인간을 포함한 지구 거주자들을 위계로 나누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자원으로 취급하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진다면 과장일까? 우리가 우리 고장을 잘살게 해 주겠다는 개발주의에 현혹되어 이들 정책을 지지하고 또 그것이 소중한 민주적 권리의 행사로 이어진다면, 아마도 우리는 우리 자신마저 자원으로 취급받는 미래의 문을 여는 것일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이제 환경의 파괴는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공약 이행의 이름을 걸고 우리의 터전을 하나씩 잠식해 들어올 것이다. 


아직도 개발 공약을 남발하며 역행에 역행을 거듭하는 이들 지도자의 말을 우리는 지지해야 할까? 시민들이 나서서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야야 할 때이다. 모두에게 약속되는 내 고장의 개발은 내 고장만의 개발이 아니라 전국의 시민 모두가 숨 돌릴 곳 없어지는 개발의 악순환을 의미한다. 내 고장의 개발을 위해 분열함으로써 돌이키지 못할 길을 가지 말고 지구와 다양한 생명체들, 우리의 환경권을 위해 단결할 때이다. 지역 주민이 아니라, “동료 시민”이 아니라, 지구인이 되어 헛된 약속에 답해야 한다. 한국의 지도자들도 한번 망쳐 버리면 회복에 수 세대가 걸릴 파괴의 길에서 한발 물러서, 반세기 동안 계속된 기후 위기와 환경에 대한 인류 공동체의 논의를 성찰할 기회를 가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우리만 살고 말 지구가 아니지 않은가. 



글쓴이: 장대업

발전대안 피다 4기 운영위원

서강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