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대안 피다는 국제개발협력의 안팎과 활동가의 사이를 흐르는 콘텐츠를 만드는 비영리 스타트업 '라운지플러스'와 함께 국제개발협력의 경계 또는 사각지대에서 새롭거나 대안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들을 만나는 인터뷰 시리즈를 선보입니다.
총 3회에 걸쳐 연재되는 본 시리즈의 두 번째 주인공은 사단법인 아디의 활동가 별빛(공선주)과 토리(정혜진)님입니다. 아디는 아시아 분쟁 지역에서 평화∙인권∙인도적 지원 활동을 펼치며 피해 공동체의 일상 회복에 기여하고 아시아 인권 향상을 위해 연대하는 단체인데요. 과거 피움을 통해서도 짧게 소개된 적 있는 아디는 피다와 같은 사무실 건물 같은 층에서 이웃으로 지내는 친숙한 곳이기도 합니다.
국제개발협력 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지만 일반적인 개발협력 단체와는 어딘가 다른 곳, 그 다름의 핵심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했던 대화를 소개해 드립니다.
우리는 기록한다, 당신이 지금 존재함을 증명하기 위해
사단법인 아디 별빛∙토리 활동가 인터뷰
사단법인 아디 로고 (출처: 아디 홈페이지)
아디가 활동을 시작한 지도 벌써 만으로 8년이 넘었어요. 창립 멤버분들이 모두 활동가 출신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기존에 하시던 일을 넘어서 새로운 판을 처음 만들고자 했을 때 되게 큰 각오가 있어야 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지금의 아디가 탄생하게 되었나요?
공선주 (이하 ‘별빛’) | 사실 처음에는 단체를 만들어서 활동을 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던 것 같아요. 창립 멤버들이 모두 인권 변호사, 평화 활동가, 인도적 지원 활동가 등 사회운동 출신이었는데요. 각자의 소속이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 지향하는 가치나 비전을 조직 안에서 실현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느끼고 고민을 하던 사람들이 우연찮게 만나 의기투합을 하게 됐어요. 제 경우는 국제개발협력과 인도적 지원을 계속하고 싶었는데, 기존 단체에서 하던 KOICA 지원 사업을 하면서 스스로 ‘작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웃음) 단체 상부에서 요구하는 결과물이 정해져 있고, 저는 그 결과물을 위한 타당성을 만들어 내야 했거든요. 물론 활동 자체는 정말 재밌게 했어요. 말만 잘 만들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지원 기관의 언어와 맥락으로 잘 옮겨서 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하는 일들이 현장에서 큰 시너지를 만들어 내는 걸 눈으로 보니까 즐거웠죠. 그런데 그런 활동을 몇 년 하다 보니까 가식적으로 하기는 싫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회사는 그만두고 1인 활동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다른 멤버들을 만나게 된 거죠.
서로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아쉬운 활동들을 통합적으로 해 보자는 얘기를 했었어요. 그냥 치고 빠지는 그런 사업 말고 정말 현장에서 필요한 사업이 뭐가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인권 운동을 해야 된다면 어떤 게 있을까. 지금 하고 있는 단체랑 똑같은 활동을 하지는 말자, 그럼 차라리 그 단체가 가서 열심히 하는 게 좋으니까. 그러면서 인권‧평화에 기반한 국제개발협력이나 인도적 지원 사업을 떠올렸어요. 사실 인권 옹호 활동만 하는 건 현장 사람들한테는 아쉬움이 남는 것 같아요. 진상 규명을 한다고 조사를 하러 갔는데, 피해자들은 생존의 문제가 달려 있으니까요. 정의 실현 좋은 건 알겠는데 지금 당장 살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이걸 통합적으로 접근하는 게 책임감 있는 인권 운동이 아닐까 하는 것에 동의를 했고요. 그때 한국 국제개발협력 단체들 중에 분쟁 지역에서 활동하는 단체가 없는 거예요. 인도적 지원을 한 뒤에 꾸준히 남아 있는 단체가 별로 없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남들이 하지 않고 있는 걸 해 보자고 하게 됐어요.
활동 지역을 아시아로 정하셨던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별빛 | 저를 포함한 창립 멤버들 모두가 기본적으로 아시아에서 활동을 해 본 경험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아시아는 아무래도 더 익숙하니까, 실수를 해서 현장에 피해를 주는 일은 덜하겠다고 생각했죠. 현실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가까우니 비행기 값이라든지 하는 여러 면에서도, 우리가 책임을 질 수 있는 지역이 아시아겠다 싶었고요. 사실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분쟁 이슈들도 너무 많잖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로 국한하기 위해 아시아로 활동 지역을 정하게 됐습니다.
지난 8년간 미얀마, 팔레스타인, 티베트 등의 아시아 내 분쟁 지역에서 인권 기록과 인도적 지원, 심리 지원, 연대 활동 등 다양한 일을 해 오셨어요. 이런 여러 활동을 하시면서 가장 주안점을 둔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별빛 | 2016년에 창립을 하고 나서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현장에 나가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애초에 단체를 설립하면서 현장 사람들 중심, 당사자 중심으로 사업을 한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에 그 방법을 안정적으로 완성해 가기 위해 계속 노력을 하고 있어요. 초기부터 했던 로힝야 여성 사업 같은 경우는 KOICA 사업을 장기적으로 하면서 아무래도 현장에 자본과 인력이 안정적으로 투입되다 보니 좀 정착이 됐고요.
팔레스타인 활동 같은 경우는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은 한국 사회보다 훨씬 시민운동이 강력하기 때문에 우리가 주도적으로 뭔가를 하는 것 자체가 맞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거든요. 사실 현장에서는 자원이 없는 것이 주로 문제인데, 우리는 자원을 줄 수 있는 단체가 아니다 보니까 어떤 위치에서 연대를 하면 좋을지 가늠해 보는 시간들이 좀 있었어요. 그러다 2018년에 팔레스타인 평화 여행이라는 걸 처음 기획해서 가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현장에서 젠더 관련 지원에 대한 수요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팔레스타인 여성지원센터, 여성 트라우마 힐링센터를 운영하면서 현장과의 관계가 정립이 되었어요.
그 사이에 티베트 인권 단체를 지원하면서 함께 인권 보고서를 내는 활동도 하고, 미얀마 메이크틸라에 평화도서관을 건립하기도 했는데요. 활동들을 어느 정도 세팅해 놓고 나니 이런 분쟁 지역의 이슈들을 한국 사회에 어떻게 알리느냐가 고민이더라고요. ‘누가 굶어 죽어 가고 있어요’ 하는 게 아니니까 대체로 별 관심이 없거든요. 그래서 공감을 할 수 있는 접점을 찾는 게 한동안 고민이었는데, 노동, 장애, 이주처럼 한국 사회에서도 이슈가 되는 주제들을 통해서 ‘나의 문제가 그들의 문제고 그들의 문제가 나의 문제다’라는 걸 알아 갈 수 있게 하는 기획 강의 시리즈 <커넥트톡(Connect Talks)>을 진행하기도 했죠.
유사한 맥락에서 <로힝야와 제주 4.3이 만나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었는데요. 한국에 거주하는 로힝야 난민 가족들과 한국인 참가자들이 함께 제주도에서 2박 3일간 제주 4.3 사건을 둘러싼 분쟁과 학살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의 여성의 삶에 대해 알아보는 테마 여행 프로그램이었어요. 한국의 4.3과 로힝야의 집단 학살이 어떻게 닮았고 다른지에 대해 배워 보자는 취지였죠. 사실 일정 중에 저희가 로힝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는 못했는데요. 하지만 우리가 로힝야 분들과 동행하면서 ‘로힝야’라는 이름 자체에 익숙해지고, 같은 시공간에 있어 보는 경험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던 활동이었어요.
결국 아디가 활동을 통해 다루는 분쟁 이슈들이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곱씹어 보고, 학살이나 분쟁에 대해서, 그리고 난민, 혐오 등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해 볼 수 있는 단초를 만들어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왼쪽부터 아디의 토리, 별빛
초기 창립 멤버는 모두 사회운동 배경을 갖고 계셨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현재는 또 어떤 배경을 가진 동료들이 함께하고 있나요?
정혜진 (이하 ‘토리’) | 제 경우엔 전공은 국제학을 했어요. 그래서 평화나 인권, 난민과 관련된 키워드로 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을 했고, 졸업 직후에 실제로 한국에 있는 난민 지원 단체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요. 인도적 지원이나 개발협력 활동이 치고 빠지는 사업적인 성격이 강하고, 시혜적인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일을 해야겠다는 뜻을 본격적으로 세우지는 못하다가 아예 지역 공동체 활동으로 빠졌었어요. 그러면서 지역 안에서 결혼 이주 여성이나 난민, 이주노동자 등 이주민들과 만나는 일들을 하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아디라는 단체에서 채용 공고를 낸 것을 봤는데,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여타의 개발협력 단체들과는 다른 워딩들을 많이 쓰고 있더라고요.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느껴지는 단체의 분위기가 있잖아요. 그리고 기록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도 저한테는 되게 특별했고요. 피해 당사자 중심 역량 강화와 관련된 활동을 한다든지, 지역 공동체의 생태계를 만들고 그것을 평화와 연결하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서 저도 가서 활동을 해 보고 싶다, 그러면 어깨 너머로 배우는 것들이 되게 많다는 생각을 해서 아디에 들어오게 됐어요.
아디에 오시기 전에도 국내 활동을 하셨고, 아디에서도 커뮤니케이션 활동가로 주로 국내에서 업무를 하고 계신데요. 혹시 업무를 하시면서 현장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셨나요? 그리고 국내와 해외, 서로 다른 공간적 맥락에서 난민 이슈를 다룸에 있어 토리님이 활동에 임하시는 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궁금해요.
토리 | 사실 처음에는 현장에 제가 직접 가는 건 크게 의미가 없고, 오히려 한국 사회에 이 이슈를 잘 알리고 표면적을 넓히는 게 더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으로 아디에 입사를 했는데요. 오히려 와 보니까 현장에 대한 감각과 감수성이 없으면 이 일을 하는 데 한계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현장을 조금이라도 경험을 해 봐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어느 정도의 기간이 됐든, 현장과의 연결감이 있어야 나에게 오는 감각이 달라지는 것이 있겠고, 또 내 감각이 달라져야 내가 말하는 메시지와 워딩이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국내와 해외의 차이라면, 국내에서 했던 활동들은 결국에는 관계성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우리의 공동체의 내부자로 받아들이는 일, 또는 우리의 공동체를 확장하는 일에 대한 활동들이 주였고, 계속 만나고 그 역동이 벌어져야 되는 일들이 많았어요. 소통하고, 관계 맺고, 또 우리의 다름을 확인하고, 동일성을 확인하고, 차이를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우리를 만들어내는 이런 활동들이 좀 주요했던 것 같고요.
해외 분쟁 지역 주민들과 관련해서는 어쨌든 그 한 사람을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는 것. 한 주체로서 운동할 수 있는 사람, 주체로서 활동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것. 이 부분이 좀 저한테는 좀 비슷한 맥락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아디가 제게 되게 특별했던 건, 이 한 사람 한 사람을 타자로 위치시키는 게 아니라 각자가 가지고 있는 주체성과 당사자성을 계속 강조하는 것이 되게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였거든요. 공간적으로는 좀 다른 맥락이고 또 개별적인 활동의 성격과 형태들은 좀 다르긴 한데, 그런 점에서는 비슷하게 통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좀 들었어요.
별빛 님도 그런 차이 혹은 유사점을 느끼신 적이 있나요?
별빛 | 저의 경우엔 오히려 한국 안에서 더 무력감이 커지는 거 같기도 해요. 권력 관계, 시스템 안에서의 견고한 벽이 더 느껴진달까요. 오만일 수도 있지만 개발협력 활동가는 다른 사회에 가서 뭔가를 해 볼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있잖아요. 한국에서는 사실 뭘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요, 법이나 체계가 너무 강력하니까. 저는 그래서 국제개발협력이 매력적이기도 한데요. 체계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도 너무 많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대화나 조정으로서 해결이 되는데, 한국에서는 그냥 법이잖아요. 자꾸 시스템을 갖다 대니까 (웃음) 저는 그런 게 좀 다른 점인 것 같아요.
한국은 말씀하신 법과 시스템의 견고함 외에도, 한국 사회의 태도나 인식이라는 되게 높은 벽이 또 있잖아요. 현장에서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계신 분들, 즉 기존 주민들과 난민들 간의 관계 혹은 갈등 상황에 있어 활동가가 고려해야 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별빛 | 사실 저희는 그런 것에 개입을 하지 않아요. 잘 모르기 때문에 개입을 할 수도 없고 우리가 개입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우리는 거기서 너무나 미약한 존재거든요. 그냥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을 통해서 듣고, 사업을 할 때는 갈등을 일으킬 만한 요소들을 최대한 없애는 거죠.
방글라데시 수용 공동체도 처음에는 되게 잘 받아들였대요. 옆에 살던 사람들인데 이 사람이 미얀마 사람인지 무슨 종교를 가졌는지 이런 걸 따졌겠어요. 그냥 저기 산 너머에 불이 타오르고 연기가 치솟고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와서 논밭에 앉아 있으니까 임산부들부터 집으로 들이고, 배고프니까 집에 있는 쌀 주고. 사실 사는 수준은 똑같거든요, 빈곤한 수준은. 근데 집에 있는 쌀 그냥 나눠 먹고 처음엔 그랬던 거죠. 근데 그 사람들을 갈라치기한 건 국제사회예요. 경계를 그어 놓고 이 안의 사람들한테만 쌀 주고 비누 주고. 다른 쪽도 사는 수준은 똑같은데, 도로가 갈라지고 인도적 지원 차량 출입 때문에 아이들 교통사고도 일어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지원이 없으니까 원망이 생기는 거죠.
저는 그게 선주민과 난민 이런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공동체가 살아가면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인데, 그게 정치의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인식이 문제가 아니라요. 처음에 현장에 수요 조사를 하러 갔을 때도, 아이들이 도로에 앉아 있으니까 ‘어떡하냐, 집에 들여서 밥 주고 재워야지’ 하는 거예요. 근데 그 집들이 정말 아무것도 없는 집이거든요. 흙으로 지어진 집에 사시는 분들이 그렇게 하셨다는 게 저는 되게 놀라웠어요. 보통 우리는 가진 게 있어야 나누는데, 가진 게 없지만 그냥 그 상태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분들한테 ‘왜 로힝야를 혐오하냐’라고 저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건 정치의 문제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오히려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그걸 바라보면서 그런 식으로 이슈를 만들어 내는 것 아닌가 할 때가 있죠.
아디의 별빛∙비바 활동가, 다원예술 창작자 오로민경, 국제분쟁전문기자 이유경, 독립 기획자∙연구자 전솔비의 공저로 출간된 <춤추고 싶은데 집이 너무 좁아서>
최근에 아디 활동가들이 필진으로 참여한 책이 나왔어요.
별빛 | 맞아요. <춤추고 싶은데 집이 너무 좁아서>라는 책인데, 콕스 바자르 로힝야 난민 캠프에 있는 여성 커뮤니티 센터인 ‘샨티카나’와 그 안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이에요. 2시간 정도면 읽을 수 있게 굉장히 쉽게 썼어요. 저희가 그간 계속 보고서로서 저희 사업을 얘기해 왔잖아요. 그런데 그게 대중들이 가볍게 볼 수 있는 콘텐츠는 아니니까요. 아디가 2020년부터 예술인들과의 협업으로 로힝야 여성들을 위한 활동을 해 왔는데요. 그때 한창 내부적으로 우리의 기록과 아카이빙한 자료들을 어떻게 대중들이 만날 수 있게 해 줄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저는 당위로서 운동을 해 온 사람이니까 그냥 해야 돼서 몸이 움직였던 거지만 대중들에게 저 같은 방식을 강요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한계를 느끼고 있었는데, 예술인들과 워크숍을 하면서 예술을 통해 그곳의 현실과 나를 연결시키는 작업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러면서 2021년쯤에 저희와 협력하던 예술가분들께 대중들한테 로힝야 여성들의 이야기를 좀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콘텐츠를 책이든 혹은 다른 매체의 형태로든 만들어 보자고 제안을 했고, 이렇게 책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널리 알려져서 2쇄, 3쇄도 나왔으면 좋겠네요.
별빛 | 여성들의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전달하고 싶은데 그걸 좀 쉽게 하려는 목표를 하지고 만들었거든요. 책을 기획할 때 어떤 내용으로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제작에 참여한 예술가 두 분이 직접 출장을 가셔서 샨티카나를 보시고 현장에서 감동을 많이 받으셨어요. 단순히 이름만 ‘평화의 집’이 아니라 여성들끼리 서로 진심으로 돌보고 치유하는 공동체로서 샨티카나의 존재를 몸으로 느끼신 거예요. 그래서 샨티카나를 주제로 책을 쓰기로 결정을 했는데요. 초등학생이나 중고등학생도, 로힝야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샨티카나라는 공간의 감동은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실 국제개발협력 현장의 이야기를 우리가 보고서의 형식으로, 아니면 개인 에세이의 형태로 많이 적잖아요. 이슈를 전달하기 위한 또 다른 방식, 새로운 시도로서의 책으로 봐 주시면 좀 더 의미 있을 것 같아요.
책도 내셨고, 말씀하신 것처럼 꾸준히 보고서도 내시는 등 기록 활동을 정말 많이 하고 계시는데요. 보통 국제개발협력에서 기록을 한다고 하면 그냥 행정적 기록, 혹은 홍보 목적의 기록만 흔히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아디에게 있어서 기록이라는 건 활동 그 자체이고 활동 방식이기도 한데, 특히 분쟁 지역과 난민 이슈와 관련해 기록이라는 행위가 갖는 더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별빛 | 저희가 처음 로힝야 난민캠프에서 수요 조사를 했을 때 여성들이 넘어온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는데도 그 트라우마가 엄청났었거든요. 이 사람들의 지금을 기록하고, 이들이 캠프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리는 게 되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어요. 로힝야는 공식적인 고유 문자가 따로 없고, 특히 여성들은 대부분 글씨를 읽고 쓰지 못해요. 로힝야는 정체성이 굉장히 복합적인데요. 미얀마에서는 ‘벵갈리(주: 방글라데시에서 온 불법 이주자라는 뜻의 명칭)’라고 하면서 방글라데시로 쫓아낸 거고, 방글라데시에서는 미얀마에서 강제 이주 당한 미얀마 시민이라고 부르거든요. 정체성 자체가 누구도 이들을 품으려 하지 않는 거예요. 전 세계적으로 250만 명 정도니까 숫자도 되게 작고, 보이지 않는 존재인 거죠. 그 안에서도 여성은 더 숨겨져 있어요. 로힝야 무슬림이 보수적이거든요. 미얀마에서 그렇게 억압과 착취를 당했기 때문에 더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데요. 캠프에 처음 갔더니 여성들은 텐트 안에 숨어서 지내면서 나올 때는 남성이랑 같이 나오거나 아니면 밤에 불 꺼졌을 때만 나오거나 하는 거예요. 이런 존재들의 역사는 그 누구도 기록하지 않을 거고, 로힝야 여성이 스스로 기록할 수도 없어요. 사진기도 없고, 기억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럼 그 다음 세대한테 로힝야를 어떻게 설명하고, 지금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래서 분쟁 지역에서 기록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아요. 저희는 지금도 사진을 찍을 때 외부에 공개하는 건 얼굴을 지우거나 얼굴이 안 나온 걸 사용하지만 얼굴이 나온 것도 따로 촬영을 하거든요. 분쟁 지역에서 기록을 한다는 건, 그것이 지금 당장 쓰이지 않을지라도 한 30년 뒤, 50년 뒤에 세상이 바뀌어서 이제 얼굴을 드러내도 될 때, 그때 그 시절 2024년에 로힝야의 여성들이 이렇게 살았다는 것에 대한 증명을 남기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기록이 넘쳐나는 사회를 살고 있는데, 동시대에 사는 누군가는 존재마저도 증명할 수 없게 살고 있으니까요. 저는 그게 아디의 중요한 임무라고 보고 있어요.
토리 | 저도 아디에 있으면서 기록 활동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요. 물론 그 당사자분들에게도 중요하지만, 동시대를 사는 한국 사람, 또는 그 어느 나라 사람에게 있어서도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하는 제동 장치로서도 기록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주 대대적으로 확산이 될 만한 콘텐츠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어딘가에 남겨둔 기록들은 이런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는 경고를 주죠. 한국 안에서도 폭력의 강도는 다르지만 사실은 비슷한 상황들이 연출될 때가 많잖아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가 스스로 조심하고, 이게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그런 상황이 있을 때 동시대인으로서 우리가 갖는 책임이 이런 것이라는 것들을 자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기록의 역할인 것 같아요.
별빛 |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되는 이유랑 같은 맥락인 거죠.
인터뷰 진행·정리: 발전대안 피다 x 라운지플러스
발전대안 피다는 국제개발협력의 안팎과 활동가의 사이를 흐르는 콘텐츠를 만드는 비영리 스타트업 '라운지플러스'와 함께 국제개발협력의 경계 또는 사각지대에서 새롭거나 대안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들을 만나는 인터뷰 시리즈를 선보입니다.
총 3회에 걸쳐 연재되는 본 시리즈의 두 번째 주인공은 사단법인 아디의 활동가 별빛(공선주)과 토리(정혜진)님입니다. 아디는 아시아 분쟁 지역에서 평화∙인권∙인도적 지원 활동을 펼치며 피해 공동체의 일상 회복에 기여하고 아시아 인권 향상을 위해 연대하는 단체인데요. 과거 피움을 통해서도 짧게 소개된 적 있는 아디는 피다와 같은 사무실 건물 같은 층에서 이웃으로 지내는 친숙한 곳이기도 합니다.
국제개발협력 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지만 일반적인 개발협력 단체와는 어딘가 다른 곳, 그 다름의 핵심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했던 대화를 소개해 드립니다.
우리는 기록한다, 당신이 지금 존재함을 증명하기 위해
사단법인 아디 별빛∙토리 활동가 인터뷰
사단법인 아디 로고 (출처: 아디 홈페이지)
아디가 활동을 시작한 지도 벌써 만으로 8년이 넘었어요. 창립 멤버분들이 모두 활동가 출신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기존에 하시던 일을 넘어서 새로운 판을 처음 만들고자 했을 때 되게 큰 각오가 있어야 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지금의 아디가 탄생하게 되었나요?
공선주 (이하 ‘별빛’) | 사실 처음에는 단체를 만들어서 활동을 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던 것 같아요. 창립 멤버들이 모두 인권 변호사, 평화 활동가, 인도적 지원 활동가 등 사회운동 출신이었는데요. 각자의 소속이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 지향하는 가치나 비전을 조직 안에서 실현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느끼고 고민을 하던 사람들이 우연찮게 만나 의기투합을 하게 됐어요. 제 경우는 국제개발협력과 인도적 지원을 계속하고 싶었는데, 기존 단체에서 하던 KOICA 지원 사업을 하면서 스스로 ‘작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웃음) 단체 상부에서 요구하는 결과물이 정해져 있고, 저는 그 결과물을 위한 타당성을 만들어 내야 했거든요. 물론 활동 자체는 정말 재밌게 했어요. 말만 잘 만들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지원 기관의 언어와 맥락으로 잘 옮겨서 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하는 일들이 현장에서 큰 시너지를 만들어 내는 걸 눈으로 보니까 즐거웠죠. 그런데 그런 활동을 몇 년 하다 보니까 가식적으로 하기는 싫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회사는 그만두고 1인 활동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다른 멤버들을 만나게 된 거죠.
서로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아쉬운 활동들을 통합적으로 해 보자는 얘기를 했었어요. 그냥 치고 빠지는 그런 사업 말고 정말 현장에서 필요한 사업이 뭐가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인권 운동을 해야 된다면 어떤 게 있을까. 지금 하고 있는 단체랑 똑같은 활동을 하지는 말자, 그럼 차라리 그 단체가 가서 열심히 하는 게 좋으니까. 그러면서 인권‧평화에 기반한 국제개발협력이나 인도적 지원 사업을 떠올렸어요. 사실 인권 옹호 활동만 하는 건 현장 사람들한테는 아쉬움이 남는 것 같아요. 진상 규명을 한다고 조사를 하러 갔는데, 피해자들은 생존의 문제가 달려 있으니까요. 정의 실현 좋은 건 알겠는데 지금 당장 살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이걸 통합적으로 접근하는 게 책임감 있는 인권 운동이 아닐까 하는 것에 동의를 했고요. 그때 한국 국제개발협력 단체들 중에 분쟁 지역에서 활동하는 단체가 없는 거예요. 인도적 지원을 한 뒤에 꾸준히 남아 있는 단체가 별로 없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남들이 하지 않고 있는 걸 해 보자고 하게 됐어요.
활동 지역을 아시아로 정하셨던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별빛 | 저를 포함한 창립 멤버들 모두가 기본적으로 아시아에서 활동을 해 본 경험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아시아는 아무래도 더 익숙하니까, 실수를 해서 현장에 피해를 주는 일은 덜하겠다고 생각했죠. 현실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가까우니 비행기 값이라든지 하는 여러 면에서도, 우리가 책임을 질 수 있는 지역이 아시아겠다 싶었고요. 사실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분쟁 이슈들도 너무 많잖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로 국한하기 위해 아시아로 활동 지역을 정하게 됐습니다.
지난 8년간 미얀마, 팔레스타인, 티베트 등의 아시아 내 분쟁 지역에서 인권 기록과 인도적 지원, 심리 지원, 연대 활동 등 다양한 일을 해 오셨어요. 이런 여러 활동을 하시면서 가장 주안점을 둔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별빛 | 2016년에 창립을 하고 나서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현장에 나가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애초에 단체를 설립하면서 현장 사람들 중심, 당사자 중심으로 사업을 한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에 그 방법을 안정적으로 완성해 가기 위해 계속 노력을 하고 있어요. 초기부터 했던 로힝야 여성 사업 같은 경우는 KOICA 사업을 장기적으로 하면서 아무래도 현장에 자본과 인력이 안정적으로 투입되다 보니 좀 정착이 됐고요.
팔레스타인 활동 같은 경우는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은 한국 사회보다 훨씬 시민운동이 강력하기 때문에 우리가 주도적으로 뭔가를 하는 것 자체가 맞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거든요. 사실 현장에서는 자원이 없는 것이 주로 문제인데, 우리는 자원을 줄 수 있는 단체가 아니다 보니까 어떤 위치에서 연대를 하면 좋을지 가늠해 보는 시간들이 좀 있었어요. 그러다 2018년에 팔레스타인 평화 여행이라는 걸 처음 기획해서 가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현장에서 젠더 관련 지원에 대한 수요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팔레스타인 여성지원센터, 여성 트라우마 힐링센터를 운영하면서 현장과의 관계가 정립이 되었어요.
그 사이에 티베트 인권 단체를 지원하면서 함께 인권 보고서를 내는 활동도 하고, 미얀마 메이크틸라에 평화도서관을 건립하기도 했는데요. 활동들을 어느 정도 세팅해 놓고 나니 이런 분쟁 지역의 이슈들을 한국 사회에 어떻게 알리느냐가 고민이더라고요. ‘누가 굶어 죽어 가고 있어요’ 하는 게 아니니까 대체로 별 관심이 없거든요. 그래서 공감을 할 수 있는 접점을 찾는 게 한동안 고민이었는데, 노동, 장애, 이주처럼 한국 사회에서도 이슈가 되는 주제들을 통해서 ‘나의 문제가 그들의 문제고 그들의 문제가 나의 문제다’라는 걸 알아 갈 수 있게 하는 기획 강의 시리즈 <커넥트톡(Connect Talks)>을 진행하기도 했죠.
유사한 맥락에서 <로힝야와 제주 4.3이 만나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었는데요. 한국에 거주하는 로힝야 난민 가족들과 한국인 참가자들이 함께 제주도에서 2박 3일간 제주 4.3 사건을 둘러싼 분쟁과 학살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의 여성의 삶에 대해 알아보는 테마 여행 프로그램이었어요. 한국의 4.3과 로힝야의 집단 학살이 어떻게 닮았고 다른지에 대해 배워 보자는 취지였죠. 사실 일정 중에 저희가 로힝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는 못했는데요. 하지만 우리가 로힝야 분들과 동행하면서 ‘로힝야’라는 이름 자체에 익숙해지고, 같은 시공간에 있어 보는 경험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던 활동이었어요.
결국 아디가 활동을 통해 다루는 분쟁 이슈들이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곱씹어 보고, 학살이나 분쟁에 대해서, 그리고 난민, 혐오 등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해 볼 수 있는 단초를 만들어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왼쪽부터 아디의 토리, 별빛
초기 창립 멤버는 모두 사회운동 배경을 갖고 계셨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현재는 또 어떤 배경을 가진 동료들이 함께하고 있나요?
정혜진 (이하 ‘토리’) | 제 경우엔 전공은 국제학을 했어요. 그래서 평화나 인권, 난민과 관련된 키워드로 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을 했고, 졸업 직후에 실제로 한국에 있는 난민 지원 단체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요. 인도적 지원이나 개발협력 활동이 치고 빠지는 사업적인 성격이 강하고, 시혜적인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일을 해야겠다는 뜻을 본격적으로 세우지는 못하다가 아예 지역 공동체 활동으로 빠졌었어요. 그러면서 지역 안에서 결혼 이주 여성이나 난민, 이주노동자 등 이주민들과 만나는 일들을 하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아디라는 단체에서 채용 공고를 낸 것을 봤는데,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여타의 개발협력 단체들과는 다른 워딩들을 많이 쓰고 있더라고요.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느껴지는 단체의 분위기가 있잖아요. 그리고 기록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도 저한테는 되게 특별했고요. 피해 당사자 중심 역량 강화와 관련된 활동을 한다든지, 지역 공동체의 생태계를 만들고 그것을 평화와 연결하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서 저도 가서 활동을 해 보고 싶다, 그러면 어깨 너머로 배우는 것들이 되게 많다는 생각을 해서 아디에 들어오게 됐어요.
아디에 오시기 전에도 국내 활동을 하셨고, 아디에서도 커뮤니케이션 활동가로 주로 국내에서 업무를 하고 계신데요. 혹시 업무를 하시면서 현장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셨나요? 그리고 국내와 해외, 서로 다른 공간적 맥락에서 난민 이슈를 다룸에 있어 토리님이 활동에 임하시는 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궁금해요.
토리 | 사실 처음에는 현장에 제가 직접 가는 건 크게 의미가 없고, 오히려 한국 사회에 이 이슈를 잘 알리고 표면적을 넓히는 게 더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으로 아디에 입사를 했는데요. 오히려 와 보니까 현장에 대한 감각과 감수성이 없으면 이 일을 하는 데 한계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현장을 조금이라도 경험을 해 봐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어느 정도의 기간이 됐든, 현장과의 연결감이 있어야 나에게 오는 감각이 달라지는 것이 있겠고, 또 내 감각이 달라져야 내가 말하는 메시지와 워딩이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국내와 해외의 차이라면, 국내에서 했던 활동들은 결국에는 관계성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우리의 공동체의 내부자로 받아들이는 일, 또는 우리의 공동체를 확장하는 일에 대한 활동들이 주였고, 계속 만나고 그 역동이 벌어져야 되는 일들이 많았어요. 소통하고, 관계 맺고, 또 우리의 다름을 확인하고, 동일성을 확인하고, 차이를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우리를 만들어내는 이런 활동들이 좀 주요했던 것 같고요.
해외 분쟁 지역 주민들과 관련해서는 어쨌든 그 한 사람을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는 것. 한 주체로서 운동할 수 있는 사람, 주체로서 활동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것. 이 부분이 좀 저한테는 좀 비슷한 맥락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아디가 제게 되게 특별했던 건, 이 한 사람 한 사람을 타자로 위치시키는 게 아니라 각자가 가지고 있는 주체성과 당사자성을 계속 강조하는 것이 되게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였거든요. 공간적으로는 좀 다른 맥락이고 또 개별적인 활동의 성격과 형태들은 좀 다르긴 한데, 그런 점에서는 비슷하게 통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좀 들었어요.
별빛 님도 그런 차이 혹은 유사점을 느끼신 적이 있나요?
별빛 | 저의 경우엔 오히려 한국 안에서 더 무력감이 커지는 거 같기도 해요. 권력 관계, 시스템 안에서의 견고한 벽이 더 느껴진달까요. 오만일 수도 있지만 개발협력 활동가는 다른 사회에 가서 뭔가를 해 볼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있잖아요. 한국에서는 사실 뭘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요, 법이나 체계가 너무 강력하니까. 저는 그래서 국제개발협력이 매력적이기도 한데요. 체계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도 너무 많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대화나 조정으로서 해결이 되는데, 한국에서는 그냥 법이잖아요. 자꾸 시스템을 갖다 대니까 (웃음) 저는 그런 게 좀 다른 점인 것 같아요.
한국은 말씀하신 법과 시스템의 견고함 외에도, 한국 사회의 태도나 인식이라는 되게 높은 벽이 또 있잖아요. 현장에서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계신 분들, 즉 기존 주민들과 난민들 간의 관계 혹은 갈등 상황에 있어 활동가가 고려해야 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별빛 | 사실 저희는 그런 것에 개입을 하지 않아요. 잘 모르기 때문에 개입을 할 수도 없고 우리가 개입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우리는 거기서 너무나 미약한 존재거든요. 그냥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을 통해서 듣고, 사업을 할 때는 갈등을 일으킬 만한 요소들을 최대한 없애는 거죠.
방글라데시 수용 공동체도 처음에는 되게 잘 받아들였대요. 옆에 살던 사람들인데 이 사람이 미얀마 사람인지 무슨 종교를 가졌는지 이런 걸 따졌겠어요. 그냥 저기 산 너머에 불이 타오르고 연기가 치솟고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와서 논밭에 앉아 있으니까 임산부들부터 집으로 들이고, 배고프니까 집에 있는 쌀 주고. 사실 사는 수준은 똑같거든요, 빈곤한 수준은. 근데 집에 있는 쌀 그냥 나눠 먹고 처음엔 그랬던 거죠. 근데 그 사람들을 갈라치기한 건 국제사회예요. 경계를 그어 놓고 이 안의 사람들한테만 쌀 주고 비누 주고. 다른 쪽도 사는 수준은 똑같은데, 도로가 갈라지고 인도적 지원 차량 출입 때문에 아이들 교통사고도 일어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지원이 없으니까 원망이 생기는 거죠.
저는 그게 선주민과 난민 이런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공동체가 살아가면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인데, 그게 정치의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인식이 문제가 아니라요. 처음에 현장에 수요 조사를 하러 갔을 때도, 아이들이 도로에 앉아 있으니까 ‘어떡하냐, 집에 들여서 밥 주고 재워야지’ 하는 거예요. 근데 그 집들이 정말 아무것도 없는 집이거든요. 흙으로 지어진 집에 사시는 분들이 그렇게 하셨다는 게 저는 되게 놀라웠어요. 보통 우리는 가진 게 있어야 나누는데, 가진 게 없지만 그냥 그 상태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분들한테 ‘왜 로힝야를 혐오하냐’라고 저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건 정치의 문제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오히려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그걸 바라보면서 그런 식으로 이슈를 만들어 내는 것 아닌가 할 때가 있죠.
아디의 별빛∙비바 활동가, 다원예술 창작자 오로민경, 국제분쟁전문기자 이유경, 독립 기획자∙연구자 전솔비의 공저로 출간된 <춤추고 싶은데 집이 너무 좁아서>
최근에 아디 활동가들이 필진으로 참여한 책이 나왔어요.
별빛 | 맞아요. <춤추고 싶은데 집이 너무 좁아서>라는 책인데, 콕스 바자르 로힝야 난민 캠프에 있는 여성 커뮤니티 센터인 ‘샨티카나’와 그 안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이에요. 2시간 정도면 읽을 수 있게 굉장히 쉽게 썼어요. 저희가 그간 계속 보고서로서 저희 사업을 얘기해 왔잖아요. 그런데 그게 대중들이 가볍게 볼 수 있는 콘텐츠는 아니니까요. 아디가 2020년부터 예술인들과의 협업으로 로힝야 여성들을 위한 활동을 해 왔는데요. 그때 한창 내부적으로 우리의 기록과 아카이빙한 자료들을 어떻게 대중들이 만날 수 있게 해 줄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저는 당위로서 운동을 해 온 사람이니까 그냥 해야 돼서 몸이 움직였던 거지만 대중들에게 저 같은 방식을 강요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한계를 느끼고 있었는데, 예술인들과 워크숍을 하면서 예술을 통해 그곳의 현실과 나를 연결시키는 작업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러면서 2021년쯤에 저희와 협력하던 예술가분들께 대중들한테 로힝야 여성들의 이야기를 좀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콘텐츠를 책이든 혹은 다른 매체의 형태로든 만들어 보자고 제안을 했고, 이렇게 책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널리 알려져서 2쇄, 3쇄도 나왔으면 좋겠네요.
별빛 | 여성들의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전달하고 싶은데 그걸 좀 쉽게 하려는 목표를 하지고 만들었거든요. 책을 기획할 때 어떤 내용으로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제작에 참여한 예술가 두 분이 직접 출장을 가셔서 샨티카나를 보시고 현장에서 감동을 많이 받으셨어요. 단순히 이름만 ‘평화의 집’이 아니라 여성들끼리 서로 진심으로 돌보고 치유하는 공동체로서 샨티카나의 존재를 몸으로 느끼신 거예요. 그래서 샨티카나를 주제로 책을 쓰기로 결정을 했는데요. 초등학생이나 중고등학생도, 로힝야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샨티카나라는 공간의 감동은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실 국제개발협력 현장의 이야기를 우리가 보고서의 형식으로, 아니면 개인 에세이의 형태로 많이 적잖아요. 이슈를 전달하기 위한 또 다른 방식, 새로운 시도로서의 책으로 봐 주시면 좀 더 의미 있을 것 같아요.
책도 내셨고, 말씀하신 것처럼 꾸준히 보고서도 내시는 등 기록 활동을 정말 많이 하고 계시는데요. 보통 국제개발협력에서 기록을 한다고 하면 그냥 행정적 기록, 혹은 홍보 목적의 기록만 흔히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아디에게 있어서 기록이라는 건 활동 그 자체이고 활동 방식이기도 한데, 특히 분쟁 지역과 난민 이슈와 관련해 기록이라는 행위가 갖는 더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별빛 | 저희가 처음 로힝야 난민캠프에서 수요 조사를 했을 때 여성들이 넘어온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는데도 그 트라우마가 엄청났었거든요. 이 사람들의 지금을 기록하고, 이들이 캠프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리는 게 되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어요. 로힝야는 공식적인 고유 문자가 따로 없고, 특히 여성들은 대부분 글씨를 읽고 쓰지 못해요. 로힝야는 정체성이 굉장히 복합적인데요. 미얀마에서는 ‘벵갈리(주: 방글라데시에서 온 불법 이주자라는 뜻의 명칭)’라고 하면서 방글라데시로 쫓아낸 거고, 방글라데시에서는 미얀마에서 강제 이주 당한 미얀마 시민이라고 부르거든요. 정체성 자체가 누구도 이들을 품으려 하지 않는 거예요. 전 세계적으로 250만 명 정도니까 숫자도 되게 작고, 보이지 않는 존재인 거죠. 그 안에서도 여성은 더 숨겨져 있어요. 로힝야 무슬림이 보수적이거든요. 미얀마에서 그렇게 억압과 착취를 당했기 때문에 더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데요. 캠프에 처음 갔더니 여성들은 텐트 안에 숨어서 지내면서 나올 때는 남성이랑 같이 나오거나 아니면 밤에 불 꺼졌을 때만 나오거나 하는 거예요. 이런 존재들의 역사는 그 누구도 기록하지 않을 거고, 로힝야 여성이 스스로 기록할 수도 없어요. 사진기도 없고, 기억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럼 그 다음 세대한테 로힝야를 어떻게 설명하고, 지금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래서 분쟁 지역에서 기록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아요. 저희는 지금도 사진을 찍을 때 외부에 공개하는 건 얼굴을 지우거나 얼굴이 안 나온 걸 사용하지만 얼굴이 나온 것도 따로 촬영을 하거든요. 분쟁 지역에서 기록을 한다는 건, 그것이 지금 당장 쓰이지 않을지라도 한 30년 뒤, 50년 뒤에 세상이 바뀌어서 이제 얼굴을 드러내도 될 때, 그때 그 시절 2024년에 로힝야의 여성들이 이렇게 살았다는 것에 대한 증명을 남기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기록이 넘쳐나는 사회를 살고 있는데, 동시대에 사는 누군가는 존재마저도 증명할 수 없게 살고 있으니까요. 저는 그게 아디의 중요한 임무라고 보고 있어요.
토리 | 저도 아디에 있으면서 기록 활동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요. 물론 그 당사자분들에게도 중요하지만, 동시대를 사는 한국 사람, 또는 그 어느 나라 사람에게 있어서도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하는 제동 장치로서도 기록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주 대대적으로 확산이 될 만한 콘텐츠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어딘가에 남겨둔 기록들은 이런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는 경고를 주죠. 한국 안에서도 폭력의 강도는 다르지만 사실은 비슷한 상황들이 연출될 때가 많잖아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가 스스로 조심하고, 이게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그런 상황이 있을 때 동시대인으로서 우리가 갖는 책임이 이런 것이라는 것들을 자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기록의 역할인 것 같아요.
별빛 |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되는 이유랑 같은 맥락인 거죠.
인터뷰 진행·정리: 발전대안 피다 x 라운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