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들[4호] 분배와 발전, 그리고 다니엘 블레이크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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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와 발전, 그리고 다니엘 블레이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다른 이름, <나, 다니엘 블레이크>
 
피움 편집국으로부터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대한 기사를 요청받았다. 마침 지난해 말 영화를 보고 먹먹해지던 마음을 어딘가에라도 끄적이려던 참이었던 터라 크게 고민하지 않고 응했는데, 막상 키보드 앞에 앉으니 내 부족한 글재주로는 여간해서 담기 어려운 영화를 겁없이 맡았다는 때늦은 후회가 몰려온다.
 
소위 ‘주류 경제학’을 알지 못하면 빈곤에 관해 이야기해선 안될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에 경제학 대학원에 덜컥 입학한 적이 있었다. 단숨에 경제학을 정복해버리겠다는 호기로운 도전도 잠시, 처절한 실패를 맛봐야 했던 늦깎이 신입생의 첫 학기를 가장 골치 아프게 했던 건 다름 아닌 그래프들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함수와 선으로 담아내려는 듯 정교해 보이기 이를데 없었던 통계와 그래프는, 숫자에는 젬병인 내 머릿 속에 마치 점령군처럼 군림했더랬다. 점령군은 자신의 원칙에 따라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했는데, 원칙의 대전제는 보통 다음과 같았다.
 
사람들은 언제나 최대의 효용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소비자이다,
기술의 진보는 노동과 자본을 절감한다.

 
정부와 기업은 공급자의 관점에서 사람들로부터 돈을 벌어들이고 물건을 분배한다. 그들의 책상에는 매일 수많은 그래프와 통계로 이루어진 자료가 넘쳐나고 있을 것이다. 생산과 소비 행위를 근간으로 하는 그 자료들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숨소리나 일상의 온기를 찾기는 쉽지 않다. 기술 발전으로 인해 일자리가 없어진 사람들은 그래프의 어느 평면에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 우리의 쉬운 언어는 그들을 ‘소외계층’, ‘취약계층’, 혹은 ‘하층민’이라고 부른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그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다. 생산자로서 노동력을 갖추지 못하고 소비자로서 구매력을 갖추지 못했지만, 그들은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이웃들이다. 또래의 학교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고, 몸이 아파 병원을 가고, 돈을 벌기 위해 구직 활동을 한다. 얼마 되지 않지만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고, 이웃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 돕고 위로 받으며, 억울할 때는 화를 내고, 슬플 때는 눈물을 흘리는 비합리적인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사회는 어떻게든 그들이 그래프 안으로 들어오도록 ‘지원’이라는 이름의 포장된 폭력을 가한다.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기 위해 그들은 반드시 인터넷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하고, 각종 직업훈련을 받아야 하며, 구직활동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출해야만 한다. 전형적인 주는 자의 언어다. 그런데 이상하다. 개도국의 가난한 이웃을 위해 도움을 주고 있는 우리에게도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언어가 아닌가?

▲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굶어 죽기 전에 질병 수당 항고 날짜를 잡아달라고 요구한다.' 

구직센터 담벼락에 스프레이 글씨로 본인의 시민권을 선언한 주인공 다니엘. ⓒeOne Films


시대의 문맥과 <자기 앞의 생>
 

지난해 이맘때 작고한 신영복 교수는 모든 개인의 삶은 ‘시대의 문맥’에서 살펴보아야 한다고 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신자유주의 시대의 맥락에서 개인의 삶을 담아낸 영화라면, 비운의 작가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은 시간을 거슬러 2차 세계대전 무렵 태어나 버림받은 고아 소년 모모의 눈에 비친 배제된 이웃들에 관한 ‘웃픈’ 작품이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키워준 유대인 창녀 출신 로자 아줌마가 병을 앓고 서서히 죽어가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모모는 삶의 비극적인 모순을 알아가게 된다. 열다섯살 생기발랄한 소녀 로자가 광기 어린 나치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 내며 하층민 신분으로 외롭게 죽어가고 있는 늙은 아줌마가 되기까지, 로자라는 한 사람을 파괴하고 죽음으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삶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삶을 희망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람은 ‘사랑없이 살 수 없다’는 단순하지만 위대한 사실이다. <자기 앞의 생>에서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의 마지막을 이웃의 고아, 동성애자, 매춘부, 흑인들이 지켜주는 모습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죽어가는 다니엘에게 꼬마 소녀 데이지가 “우릴 도와주셨죠? 저도 돕고 싶어요” 라고 하는 장면과 묘하게 겹친다. 사랑과 돌봄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부의 유무를 넘어서는 우리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이다. 우리가 ‘개발’ 또는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사는 보이지 않는 이웃을 위해 일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 책 '자기 앞의 생' 표지 ⓒ다음 책


다니엘 구하기: 분배정치의 출현과 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인공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보조금을 지급했다면 영화의 줄거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신발창이 떨어져 나가버린 초등학생 데이지는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기 전에 예쁜 신발을 신고 학교에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데이지의 엄마 케이티는 딸에게 신발을 사주기 위해 몸을 팔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은 다니엘은 사랑하는 이웃 케이티 가족이 보는 앞에서 평온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지 않았을까.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 교수의 2015년도 저작 <분배정치의 시대>는 영화에 대한 이런 상상에 실증적인 담론을 제공하는 책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생산을 모든 경제 활동의 중심으로 사고하는 ‘생산주의적’ 경제관을 신앙처럼 믿어왔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가르침에 따라 취학 아동의 먹을 권리는 ‘공짜 밥’으로, 일자리가 없는 청년들에게 주어지는 현금은 ‘포퓰리즘’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당연하게 개도국 주민들의 소득을 증대하기 위해 교육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고, 직업을 구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민들의 일자리와 소득은 기대만큼 늘어나지 않았고, 제한된 규모의 임금노동은 대부분 ‘건장한’ 성인 남성에게 제공됨으로써 가부장적 사회 질서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세계적인 차원의 불평등만 커져 왔다. 세계 곳곳에서 더 많은 ‘다니엘 블레이크’가 양산되어 온 것이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오늘 1,000만명의 다니엘이 죽는다 해도 내일 각 국의 ‘증권거래소에서는 잔물결조차 일지 않으리란 사실’이다.


▲ 책 '분배정치의 시대' 표지 ⓒ 연합뉴스


<분배정치의 시대>는 남아프리카 지역의 사회보조금 정책을 사례로 제시하며 생산주의 관점을 분배주의 관점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은 기존의 경제학 그래프에서 사라져 버린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생산된 부에 대한 정당한 몫(rightful share)의 소유자임을 강조한다. 그런 맥락에서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주는 게’ 아니다.” 우리는 다함께 소유한 공유재산의 몫을 받을 뿐이다. 죽음을 통해 자신의 시민권을 선언했던 다니엘 블레이크의 영화 속 유언은 현실 세계에서도 윤리적이고 이론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다. 퍼거슨 교수는 임금노동자만이 사회적 생산물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는 기존 사유 체계의 허구성을 인류학적인 논거를 들어 비판하며, 우리가 지구라는 ‘공동소유물’에서 함께 생산한 몫을 다같이 나누는 분배의 가치를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직접적인 현금 지급을 통한 분배가 부양자(성인 남성) - 피부양자(여성, 노인, 아동) 간 일방적 의존성을 완화하고 오히려 새로운 성장을 이끈다고 반박한다.
 
사회적인 부를 정당한 소유자에게 ‘돌려준다(return)’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국제개발 분야에서 흔히 쓰고 있는 원조(aid), 지원(assistance), 보조금(grants)과 같은 용어도 재고가 필요하다. 퍼거슨 교수는 ‘사냥한 동물’을 가지고 사냥꾼이 마을로 돌아왔을때 자격을 따지지 않고 몫을 나누었던 인류의 오랜 전통을 상기하며, 사회적인 것에는 본래부터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구분이 없다고 지적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논쟁이 되는 기본소득 제도를 비롯하여, 국제개발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는 다양한 방식의 현금지급 프로그램들도 이런 공유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새로운 분배정치에 대한 실험이 이미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가 자리잡고 있는 북반구의 선진국보다 남반구의 저개발국에서 활발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남반구 국가를 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국제개발 활동가들이 새로운 도전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례로 필자가 일하고 있는 기관에서는 2년 전부터 파키스탄에서 비문해 여성들과 조건부현금이전(Conditional Cash Transfer, CCT)
[1]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동안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전세계적으로 이론적 근거와 논의가 퍼지고 있는 만큼 앞으로 현금지급 프로그램이 개도국 여성들의 삶과 권리 향상에 미치는 영향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국내외에 소개할 계획이다.
 
 
우리들, 다니엘 블레이크가 꿈꾸는 세상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가 꿈꾸는 ‘누구도 소외당하지 않는(Leaving no one behind)’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인공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삶이 동등하게 존중받는 세상일 것이다. <분배정치의 시대>가 보편적 시민권 차원으로의 분배를 강조하며 국민국가의 지평을 넘어서는 국제적인 규범 제정을 제안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일게다. 엉뚱하긴 하지만, 어린 시절 믿던 성경 속 하늘나라가 존재한다면 아마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보이지 않는 가슴’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친구여 나는 너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다…너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게 내 뜻이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냐.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게 너의 눈에 거슬리느냐?’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 「마태복음」 제20장



기사 입력 일자: 2017-02-28

작성: 정용시 피움 편집위원,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브릿지아시아팀 팀장
/ yongshi78@unesco.or.kr




[1] 조건부현금이전은 빈곤 가구를 대상으로 적용되는 복지 프로그램으로, 해당 가구가 복지 상황 개선을 위한 일정한 조건을 충족하면 현금을 직접 지급하는 프로그램이다. 주로 교육이나 보건 상황 개선을 위한 행동의 변화 등의 조건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이나 무조건부 현금이전(Unconditional Cash Transfer, UCT)과 구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