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들[6호] 경계 너머의 사람들이 만들어 낸 변화 - 영화 <러빙>을 보고

2018-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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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너머의 사람들이 만들어 낸 변화

- 영화 <러빙>을 보고 -


얼마 전 가까운 이가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게 되었다. 목발을 짚고 수업을 들으러 다니는데, 기숙사에서 강의실까지 거리는 별로 멀지 않지만, 산악 지형에 계단이 많다 보니 이동하기가 참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학교가 얼마나 장애인 친화적이지 않은 곳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학교를 걷다 보니 정말 그랬다.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타고 있다면 접근이 어려운 곳도 있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거나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곳도 많았다. 아무 생각 없이 오르내리던 나무 계단이, 목발을 짚은 사람에게는 한 번 실수로 뒤로 넘어지면 아주 큰 일 날 곳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내가 비장애인이라는 다수 집단에 속해 살아가기 때문에 알지 못했을 뿐 ‘경계 너머의 삶’은 예전부터 이러했을 것이다. 그나마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것이리라 짐작한다. (경사로가 없는)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 (저상 버스가 아닌) 버스를 타는 것처럼 경계 안쪽의 사람들이 아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영위하는 일상이, 그 너머에 있는 이들에게는 선택하고 싶어도 선택할 수 없는 가짜 선택지인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영화 ‘러빙’의 주인공 리처드와 밀드레드가 서로 사랑함에도 부부가 되어 가정을 꾸릴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 영화 ‘러빙(Loving)’의 주인공 리처드와 밀드레드 © 2016 Focus Features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1950년대 말 미국의 버지니아 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밀드레드가 자신의 임신 소식을 전하고, 이 이야기를 들은 리처드가 기뻐하는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지금의 우리 눈에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커플이지만, 당시 그곳에서 이들은 매우 눈에 띄는 존재였다. 이유는 단 하나. 밀드레드는 흑인 여성이고 리처드는 백인 남성이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주에서는 백인과 유색 인종 간의 결혼이 불가능했기에 둘은 인종 간 결혼이 허용되는 워싱턴  D.C.로 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어 돌아온다. 그렇지만 버지니아 주의 ‘법과 질서’는 이들이 조용히 부부로 살아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고, 벽에 걸어놓은 결혼증명서도 러빙 부부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한밤중에 보안관들이 나란히 잠들어 있는 부부의 침실에 들이닥쳐 손전등을 비추며 이들을 깨우는 모습은 사적 영역을 침해하는 공권력의 폭력을 잘 보여준다. 그렇게 부부는 구치소에 끌려가고, 카운티에서 가장 수완이 좋다는 변호사는 이들에게 재판에서 아래의 죄를 인정하면 형 집행은 피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결혼을 취소하거나, 25년 동안 버지니아 주를 떠나는 것을 조건으로 말이다.


“리처드 페리 러빙은 백인으로서 유색 인종인 밀드레드 돌로레스 지터와 불법 결혼을 목적으로 버지니아 주를 벗어나 컬럼비아 특별구로 가서 1958년 6월 2일 비밀리에 혼인한 후 버지니아 주에 돌아와 캐롤라인 카운티에서 남편과 아내로 동거함으로써 연방의 평화와 존엄을 위배했다.”


부부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고향에 사는 것과 부부로 살되 고향을 떠나는 것. 선택의 기로에 놓인 러빙 부부는 결국 버지니아 주를 떠나 워싱턴 D.C.로 가서 정착하지만, 첫 출산을 앞두고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이들의 결혼이 그러했듯, 가족들 곁에서 아이를 낳는 것도 그들에게는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니었다. 남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만삭의 밀드레드는 차 뒷좌석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숨어 있다가 어둡고 한적한 도로에서 다른 차로 급히 갈아타고, 리처드는 따로 이동해 밀드레드의 집에서 합류한다. 하지만 가족들을 만난 기쁨도 잠깐, 밀드레드의 출산 이후 이들은 다시 보안관에게 적발되어 재판을 받을 위기에 놓이고, 그나마 판사의 선처(?)로 감옥에 가지는 않고 버지니아 주에서 쫓겨난다. 그 후로 둘은 고향에 돌아가는 일 없이 도시에서 아이들을 낳아 기르며 살아가는데, 한창 인종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시위가 고조되었을 때 밀드레드가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계기로 이들은 자유시민연맹에서 지원하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버지니아 주와의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영화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당한 러빙 부부의 삶을 담담히 그려낸다. 이들의 고통은 한순간 고조되었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조용히 지속되는 성질의 것이다. 밀드레드는 사랑하는 가족들의 곁을 떠나 삭막한 도시에서 아이들을 기르는 것을 괴로워한다. 어디를 둘러 보아도 자연이 가득했던 그녀의 고향과 달리 도시에는 아이들이 뛰어놀 곳이 마땅치 않다. 결국, 길에서 놀던 아이가 차에 치여 다치는 사고를 당하자, 밀드레드는 다시 체포될 위험을 감수하면서 버지니아 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리처드는 그런 밀드레드의 뜻에 따르지만, 재판이 시작되고 이들의 이야기가 매스컴을 타면서 점점 불안을 느끼게 된다. 미장이로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리처드의 백인 동료들은 대놓고 그를 비난하지는 않지만, 조용한 시선과 위협이 그를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둘은 자신들의 삶을 꿋꿋이 살아낸다. 결국, 이들을 통해 역사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만, 이들이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거나 자신들의 문제를 사회 구조적인 관점으로 파악해 공권력에 항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 밀드레드와 리처드는 참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변호사를 처음 만났을 때, 변호사는 러빙 부부의 사례를 계기로 인종차별법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이들의 케이스가 대법원까지 갈만한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리처드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며 자신들을 버지니아 주 밖으로 추방한 그 판사와 조용히 이야기해서 해결하면 안 되느냐고 묻는다. 이런 모습을 볼 때, 밀드레드와 리처드는 인종차별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갖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기보다,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인종 간 결혼 금지’라는 경계선을 넘었으며 그로 인해 평범한 일상을 위협받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사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삶을 통해 투쟁한 이들이었다. 리처드의 흑인 친구가 말한 것처럼, 그에게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이혼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골치 아픈 일들을 모두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자신과 가족의 삶을 지켜내고, 밀드레드 또한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변호사들은 대법원 재판에 밀드레드와 리처드가 오기를 바라지만, 둘은 이를 거절한다.

대법원에 전할 말이 없냐고 묻는 변호사에게 리처드는 이렇게 말한다.

“있어요. 판사에게… 판사에게 전해줘요 난 아내를 사랑한다고.”


영화에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밀드레드와 리처드가 권리를 찾는 과정에 함께 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법정 투쟁을 돕는 변호사는 한 부부의 일을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해 인간의 기본권을 지키고자 한다. 또,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라이프 매거진을 비롯해 여러 매체에서 이 가족을 취재하러 오는데, 이처럼 권리를 침해당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달하는 사람들의 역할도 중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좀 더 나은 방향으로의 변화가 있기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몫을 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밀드레드는 한 인터뷰에서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응원하는 이들도 있기에 비난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영화에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조용히 지지를 보낸 시민들 또한 이 변화에 기여한 바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우리의 눈에는 인종에 따라 결혼을 금지한다는 발상 자체가 참 놀랍지만, 생각해 보면 불과 60년 전의 일이다. 이들과 같은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 중 다수는 이러한 ‘구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고, 일부는 강력하게 지지했을 것이다. “참새와 종달새가 다르게 태어난 건 다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보안관이나, “전능하신 신은 온갖 피부색의 인종들을 창조하여 각각의 대륙에 살게 하셨다.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은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신은 인종끼리 서로 섞이는 걸 원치 않으셨다.”고 판결한 버지니아 주의 판사처럼 말이다. 이제는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당시에는 진리로 받아들여졌으리라.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그때보다 나은 시대에 살고 있다. 영화에서처럼 인종에 따라 결혼이 금지되는 일은 더 이상 없고, 성별에 따른 차별도 예전보다는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국적, 인종, 종족, 신분, 성별, 성 정체성, 성적 지향, 종교, 장애 등에 따라 권리를 침해받는 이들이 있다. 우리 사회가 그런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기보다는, 누군가의 존재 자체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고 ‘기존의 질서와 규범을 해친다’고 핍박하지는 않은지, 또 그런 사람들의 권리까지 보장하기에는 ‘비용이 많이 든다’고 말하며 못 본 척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한때는 당연했던 차별이 이제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된 것처럼, 다수가 속한 울타리의 바깥에서 권리를 위협받으며 살아가는 이들이 좀 더 안전하고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과 법, 제도가 변화하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발전’은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기사 입력 일자: 2017-04-25


작성: 김은파  피움 편집위원, 서울대 글로벌교육협력 전공 석사과정 / piyabb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