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들[7호] 진실의 부정, 그리고 부정할 수 없는 진실: 영화 ‘나는 부정한다(Denial, 2016)

2018-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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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부정, 그리고 부정할 수 없는 진실: 영화 ‘나는 부정한다(Denial, 2016) 


홀로코스트가 허구라고 주장하는 궤변론자에 맞서 역사를 법정에 세우고 진실을 입증해야 했던 한 역사학자의 이야기.


우리는 홀로코스트(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증거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으며, 얼마나 강력한가. 1996년부터 2000년까지 4년에 걸쳐 서른두 번의 공판이 열렸고, 334페이지에 달하는 판결문이 기록된 재판. ‘역사를 심판하는 법정’으로 불리며 화제가 되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나는 부정한다(Denial, 2016)’는 당연히 역사적 실체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을 법리적으로 증명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한 유대인 역사학자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  


▲ 실존 인물 데보라 립스타트 교수 역할을 맡은 배우 레이첼 와이즈 ©네이버 영화



홀로코스트는 감상에 젖은 허구의 역사일 뿐이다

1994년 가을 어느 날, 미국 애틀랜타 소재 에모리 대학에서 현대 유대사학을 가르치는 홀로코스트 연구의 권위자인 데보라 립스타트 교수(레이첼 와이즈)가 자신의 책 『홀로코스트 부정하기』의 출간을 기념하는 강연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그 강연장에 그녀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증거를 조작해 홀로코스트를 부인한다’라고 비난한 장본인 데이비드 어빙(티모시 스폴)이 나타난다. 어빙은 립스타트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사람과는 논쟁하지 않는 것을 두고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려운 거라고 강하게 비난하고, 히틀러가 학살을 명령했다는 증거 문서를 가져오는 사람에게 1천 달러를 주겠다며 강연을 엉망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어 자신의 동기와 역량을 공격하고 역사학자로서의 지위와 명성을 위협했다며 런던 고등법원에 그녀와 출판사를 명예 훼손 혐의로 고소한다. 영화 초반부에 데이비드 어빙이 의도적으로 데보라 립스타트 강연에 찾아와 난동을 부렸던 것도 실제 사건 장면을 그대로 재현, 강렬한 법정 드라마의 시작을 알리는 극적인 도입부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한편 ‘나는 부정한다’의 법정 장면에 등장하는 모든 대화는 공식 기록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또한, 나치 옹호자이자 히틀러 추종자로 알려진 데이비드 어빙은 주류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히틀러의 전쟁’ 등 군사 및 정치적 관점에서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 독일에 주목하는 다수의 글을 썼고,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아우슈비츠 어디에도 인종 청소를 위한 가스실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평소 독일 극우 집회에 참석해 더 이상 독일인들이 전쟁에 대해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TV에 출연해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유대인보다 미국 정치인의 자동차 뒷좌석에서 죽은 여자들이 더 많을 거라고 비웃곤 했다. 홀로코스트란 유대인들이 조작한 허구의 역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라는 역사를 법정에 세우다

미국과 달리 피고인의 ‘무죄 추정’이 인정되지 않는 런던 고등법원의 법칙에 따라 피고 립스타트 교수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했다. 즉, 명예 훼손으로 소송을 제기한 어빙이 명예 훼손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소를 당한 피고인 립스타트 교수가 무죄를 입중하기 위해 명예 훼손이 아니며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재판정에서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사실’에 대해서는 논쟁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평소 신념을 깨고, 립스타트 교수가 ‘홀로코스트는 존재했었다’라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라는 역사를 법정에 세우게 된 것이다. 자신의 신념에는 반하지만, 거짓이 승리하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데보라 립스타트는 법정에서 싸울 것을 결심한다. 사실 법정에 선다는 건 자신의 학자로서의 능력뿐 아니라 그동안 지켜 온 삶의 원칙 등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립스타트가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법정에서 어빙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조목 조목 그 궤변을 반박하는 일도 일어나지 못했다. 변호인단은 립스타트에게 오히려 침묵을 부탁했다. 막말과 미디어 플레이로 증언대에 서는 사람들을 조롱거리로 만드는 어빙에게 립스타트 교수를 먹잇감으로 내어줄 수 없다는 전략적인 판단이었다.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재판에서 이겨야만 하고, 이기기 위해서 침묵해야 했다. 이 재판 전략으로 인해 데보라 립스타트는 재판을 참관만 하고 재판장에서나 언론을 대상으로 그 어떤 증언이나 발언도 하지 않았다.


▲가스실을 포함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구조를 설명하는 립스타트 측 변호인단 ©네이버 영화


2000년 1월 첫 공판이 열리는 날, 런던 왕립 재판소 앞에는 역사적인 재판을 취재하려는 언론의 열기가 뜨거웠다. 언론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 없이 법정으로 향하는 립스타트 뒤로 데이비드 어빙이 특유의 언변으로 인터뷰를 하고,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법정으로 들어선다. 한편 런던의 유대인 커뮤니티도 그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문제를 크게 만들지 말고 어빙과 조용히 합의하라고 조언하는가 하면, 거대 로펌의 스타급 변호사들과 일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목격자들도 어떻게 우리의 증언 없이 이런 역사적인 재판을 진행할 수 있냐고 그녀를 조용히 비난했다. 립스타트 내면의 양심은 목격자들의 소리 없는 눈물과 고통이 재판을 통해 전해져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목격자들을 증인으로 세웠던 이전의 쥔델(1985, 1988년)이나 엑소더스(1964년) 재판에서 생존자들은 세부사항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 조롱거리가 되거나 그로 인해 재판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했다. 다시 한번 이기기 위해서 침묵을 해야만 했다. 변호사 줄리어스가 말했듯 재판은 치료(therapy)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진실을 위해, 이기기 위해 침묵해야 했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에는 이렇게 미국식 법정 드라마가 보여주는 극적인 장면, 눈물을 요구하는 감동이나 반전 대신,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을 내려 놓아야 하는 립스타트의 내면적 갈등이 섬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목격자와 그들의 고통스러운 증언조차 조롱거리가 될 수 있는 재판이라는 냉엄한 현실.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오직 양심과 신념만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가?’ 라고 영화는 묻고 있다.  
 
생존자들에게 증언할 기회를 주겠다고 한 약속을 스스로 깨야만 했던 날, 립스타트는 램프턴과 아런 대화를 나눈다.


"제가 가진 거라곤 제 목소리와 양심뿐이죠. 전 제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런 제가 다른 누군가에게 양심을 맡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문제는 가장 옳다고 느껴지는 게 최선은 아니라는 겁니다. 
악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신념을 이야기하면 만족감을 느끼겠죠. 하지만 이 경우 패배의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대신 입을 꾹 다물고 이기는 겁니다. 자신을 부정하는 거죠."


리처드 램프턴은 립스타트와 했던 약속대로 오직 증거와 사실로 데이비드 어빙을 압박해 나간다. 어빙이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은 포로들을 죽이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발진티푸스에 걸린 시체를 훈증 소독하기 위한 방이라고 주장하자 램프턴은 곧 화장될 시체인데 훈증 소독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 어렵고, 또 굳이 두꺼운 이중 유리와 금속 철망까지 달린 밀폐된 문은 왜 필요했는지 반문한다. 어빙이 두꺼운 문은 영국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고 대답하자, 독일군 막사와 거의 4km에 달하는 거리에 대피소를 짓는 것이 비상식적이며 공습은 아우슈비츠가 건설된 다음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결국, 그는 이성적인 판단력과 열정적인 지성으로 어빙이 주장하는 논리의 허점을 찌르며 재판을 승리로 이끈다. 마침내 2000년 4월 11일, 판사는 판결문에서 데이비드 어빙이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기록을 체계적으로 왜곡하고 조작하였으며 이에 피고 데보라 립스타트의 승소를 선고한다고 적었다.


▲립스타트 교수와 변호인단이 런던 왕립재판소로 들어가는 장면 ©네이버 영화



모든 의견이 다 동등한 것은 아니다

한편 이번 판결이 비록 궤변과 왜곡이긴 하지만, 앞으로 데이비드 어빙과 같은 일반 시민이나 학자들의 언론(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학계와 미디어의 우려에 대해 데보라 립스타트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나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걸 남용하고자 했던 누군가로부터 자유를 보호하고자 했다. 언론의 자유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것에는 책임이 따르며, 우리가 해서 안 되는 것이 거짓말이다. 모든 의견이 다 동등한 것은 아니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는 공격적이고 궤변을 늘어놓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데이비드 어빙에 맞서, 거짓이 승리하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진실이 침묵하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는 길을 힘겹게 선택하고 결국 진실을 입증하는 유대사학자 데보라 립스타트의 이야기이다.


“부정(denial)이란 다른 무언가에 접근할 수 있는 문의 자물쇠를 여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영화 초반부에서 데보라 립스타트)


영화 ‘나는 부정한다’의 제작자가 영화 제작을 결심하게 된 건, 데보라 립스타트의 저서 『재판에 오른 역사: 홀로코스트 부인론자와 법정에서 보낸 나날들』을 읽고 생각보다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라고 한다. 그래서 이 재판을 유대인 역사학자 데보라 립스타트와 히틀러를 동경하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데이비드 어빙의 싸움보다는 왜곡과 조작, 그리고 거짓이 가져오는 파괴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영화 촬영장소인 영국왕립재판소에서 레이첼 와이즈(왼쪽)와 데보라 립스타트(오른쪽). 실존 인물인 립스타트 교수는 실제 의상을 빌려주거나 고증을 위해 적극 협조하는 등 영화 제작에 크고 작은 기여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네이버 영화


이 영화는 그래서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이란 무엇이고, 그 진실이 정면으로 반박되거나 부정될 때 어떻게 그 진실을 입증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진실은 언제나 부정될 수 있으며 반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재확인하고 있다. 재판을 결심하는 립스타트가 “만약 우리가 진다면 홀로코스트가 없었다는 주장이 갑자기 인정되는 거예요. 절대로 져서는 안돼요.” 라고 말했던 것처럼.  



기사 입력 일자: 2017-05-31

작성: 최윤정 피움 편집위원 / ayc9003100@gmail.com



[참고] 립스타트 교수가 말하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의 근거
1.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했던 어떤 체계적이거나 조직적인 시도도 없었다  
2. 5~6백만 명 보다 훨씬 적은 숫자였다
3. 아우슈비츠는 인종 청소를 위해 지어지지 않았다
4. 유대인이 만들어 낸 근거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5. 홀로코스트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전쟁에는 희생이 따른다.